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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89)화 (189/449)
  • 제189화

    이틀을 기다린 후에도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자 현천기의 눈은 더욱 음산해졌다. 대체 무엇 때문에 이토록 짜증이 나고 불쾌한 건지 알 수 없었다. 현천기가 최근 새로 만든 도자기를 던져 깨뜨렸다.

    “도… 도련님…….”

    기겁한 시동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현천기는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서풍엽이 이런 수모를 겪고도 가만히 있는다고?’

    현천기는 황궁으로 뛰쳐 들어간 서풍엽이 장서열은 내 것이라고 사방팔방 외친 후 그녀의 손을 붙잡고 나와 세상을 떠돌며 살 것이라 예상했었다. 그리고 그래야만 서풍엽이 진정한 남자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현천기가 원하던 연극은 전혀 시작할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는 속이 답답해져 오는 걸 느꼈다. 모두들 하나같이 몸을 사리며 그 빌어먹을 가문의 위신을 생각하고 있었다. 그들은 모두 이 행복하고 만족스러운 삶을 위해 반드시 뒷일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사람인 척 굴었다.

    ‘그럼 나는 뭐란 말인가! 나는 이런 꼴을 당해도 싸단 말인가?’

    그는 혼자만 가족에게 떠밀려 황실의 분노를 잠재우는 역할을 하는 데 의문을 품었다. 헌데 남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어쩔 수 없다고 말하면서도 결국 달콤한 인생을 살고 있었다. 이건 너무 불공평했다.

    현천기는 이번 한 번만 하늘을 믿어 보기로 했다. 하늘은 그에게 반드시 보답해야 했다. 모든 이가 함께 고통 받고, 서풍엽은 뛰쳐나가 결단을 내리거나 혹은 구염락의 손에 죽어야 마땅했다. 무엇보다 최고의 결말은 죄책감에 못 이긴 장서열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이었다.

    ‘마땅히 자결해야지!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다 같이 끝장을 보자!’

    현천기는 치솟던 노기가 다시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그에게 문득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태자가 아직 어린 탓에 지금은 이해를 못하는지도 모르지… 딱 한 살만 나이를 더 먹는다면…….’

    현천기가 다시 음흉하게 웃기 시작했다. 일 년이었다. 딱 일 년만 인내심을 갖고 기다린다면 결국 구염락이 서풍엽을 갈기갈기 찢어 죽일 날이 올 것이다. 그 때가 되면 모두가 함께 고통에 빠지리라.

    ‘나와 똑같은 고통을 느껴야 한다!’

    현천기가 힘껏 탁자를 밀자 책상 위에 있던 물건들이 와르르 떨어지며 부서졌다. 그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참, 서풍엽에게 알려 줘야겠군. 구염락은 결벽증이 심하고 정신이 온전치 못해 병이 발병하는 날에는 쥐도 새도 모르게 곁에 있는 사람을 죽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이것이야말로 서풍엽에게 알리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최근 몹시 바빠진 현천기는 흥미로운 놀이에만 빠져 있을 시간이 없었다.

    전쟁이 끝나고 관원들이 삿된 마음을 품기 시작하자 마침내 별러 온 숙청 작업이 시작되었다. 각 주()의 관원들을 솎아 내는 일이 바로 현천기의 일이었다.

    현천기의 눈에 관원들은 모두 해부를 기다리는 실험 대상이었다. 비록 궁 안에 있는 ‘그’를 망신 주는 것만큼 재미있지는 않았지만 지금처럼 무료한 나날을 보내는 것보다는 훨씬 나았다.

    볕이 들지 않는 방 안 구석으로 향한 그가 음산하게 얼굴을 씰룩거렸다. 마침내 기분전환을 할 만한 일이 생겼다.

    * * *

    연경 중앙으로 길게 이어진 황궁에는 헤엄치는 용과 하늘을 나는 봉황, 파란 사자와 육중한 거북 석상 등이 여러 전각을 장식하고 있었다. 오랫동안 문을 열지 않았던 자녕궁(慈宁宫)은 지난 이틀간 내리 무거운 문을 열어젖힌 채 귀중한 손님을 맞이했다.

    오늘 아침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침 조례가 끝나지도 않은 시각, 또 소리 없이 자녕궁의 문이 열렸다. 모든 하인들이 공손하게 고개를 숙인 채 발끝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세상만사에 흥미가 없는 얼굴로 대단한 인물을 손님으로 맞이하고도 이를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같은 시각, 태후는 자녕궁의 불당 안에서 손에 쥔 염주를 굴리며 예불을 드리고 있었다. 연로한 입에서 길디긴 법문이 흘러 나왔다. 비록 목소리가 조금 떨리긴 했지만 여전히 위엄 넘치는 모습이었다.

    일련의 과정이 끝나자 오랜 세월 태후를 모신 노 마마가 손수건을 내밀며 말했다.

    “태후마마, 황후마마께서 아직도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태후가 평소와 다름없는 표정으로 폭삭 늙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휘황찬란했던 과거조차 흐르는 세월을 막을 수 없었다. 그녀는 거동이 불편한 몸으로 노 마마의 부축을 받으며 내불당(内佛堂)에서 외불당(外佛堂)으로 자리를 옮겼다.

    “매일 오다니 그 아이가 인내심이 있구나. 권 씨 가문에서 그러한 딸을 길러낸 게 복인지 화인지 모르겠다.”

    말을 마친 그녀는 젊은 궁녀가 내온 불차(佛茶, 절에서 만든 차, 혹은 불교에서 의식에 사용하는 차)를 받아들었다. 노 마마는 태후와 마찬가지로 세월의 흔적이 남은 얼굴을 움직여 쓴웃음을 지었다. 오랜 세월 태후를 모신 덕분에 노 마마는 격의 없이 말을 나눌 수 있었다.

    “황후마마께서는 본분을 지킬 줄 아는 분입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평탄한 생활을 유지하다보면 때때로 생각이 짧아져 조급한 때에 실수를 저지를 수 있지요.”

    태후가 탄식했다. 황후에게 승부욕이 있다는 걸 그녀가 어찌 모르겠는가. 그러나 과거에 그런 며느리를 선택한 건 바로 태후 자신이었다.

    “그 아이는 행동은 침착하나 새로운 길을 모색하는 머리가 부족하다.”

    노 마마가 태후를 향해 웃었다.

    “마마께서 황후마마를 마음에 들어하신 이유가 바로 그 점이지 않습니까.”

    한동안 넋을 놓고 있던 태후가 물었다.

    “며칠이나 꿇어앉아 있었느냐?”

    “오늘로 사흘이옵니다.”

    태후가 손에 든 염주를 굴렸다. 흰 서리가 잔뜩 내려앉은 머리는 깔끔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다. 한참을 생각하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이렇게 하자. 일단 오늘도 돌아가라고 전해라. 대신 이틀 후에는 만나줄 테니 너무 조급하게 굴지 말라고 하고. 그 아이는 고생을 좀 해야 해. 내가 은혜를 내리듯 쉽게 만나 준다면 태자에게나 황후에게나 좋을 것이 없다.”

    노 마마가 믿음직스럽다는 듯 태후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마마께서는 사리를 꿰뚫어 보십니다.”

    그러나 태후 역시 심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태자가 이틀 연속 자복궁에서 묵었다고?”

    노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감히 태자의 행동에 함부로 의견을 달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합니다.”

    눈을 가늘게 뜬 태후가 다시 불경을 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마음을 굳혔다.

    태후가 애초에 구염락의 요청을 수락한 것은 조옥언보다 그녀의 딸 장서열이 더욱 침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과거 태후의 눈에 조옥언은 그야말로 장점이 없는 규수였다. 만약 황제가 정말로 조옥언과 혼인했다면, 제멋대로 구는 조옥언의 성격과 황제의 맹목적인 애정이 결국 황제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그를 만신창이로 만들었을 것이다.

    따라서 태후는 결코 조옥언을 며느리로 들일 수 없었다. 그러나 다행히 조옥언의 딸은 총명했고, 모친처럼 지나치게 순진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난 이틀간 구염락을 지켜본 태후는 아무래도 마음을 놓을 수 없었다. 태후 역시 권여아가 자라는 것을 곁에서 지켜본 터였다. 그리고 그녀는 권여아가 태자비의 재목이라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으나, 권 씨 가문에서 또 다시 태자비가 나오는 건 원치 않았다.

    마침 황후가 자진해서 나섰으니, 태후가 이 절호의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리 만무했다.

    황후는 무려 일주일을 자녕궁 앞에 꿇어앉아 있었다. 이에 감동해 마지않은 태후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장서열은 태후가 자녕궁에서 나왔다는 소식에도 눈 하나 깜짝 않고 계속해 가극을 들었다.

    태후는 여전히 위엄이 넘쳤다. 하얗게 센 머리와 노쇠한 몸도 그녀의 기세를 감추진 못했다. 모습을 드러낸 태후는 황후가 뭐라 입을 열 새도 없이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자네 오라비를 부르시게. 조석궁(朝夕宫)으로 갈 것이야.”

    눈물바람을 준비하던 황후가 멈칫했다. 그녀는 태후가 왜 오라버니를 부르라는 것인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태후가 입을 연 이상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한편에 무릎을 꿇고 앉은 권여아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녀가 입을 뗀다 한들 들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예전이었다면 권여아는 미련 없이 집으로 보내 줄 것을 간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그녀는 알아서 물러나 주는 것으로 장서열을 편하게 만들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리고 권여아는 구염락을 좋아했다. 그녀는 박학다식하고 용맹무쌍한 사내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의 권리와 부귀를, 그것도 무려 두 번이나 같은 여인의 손에 빼앗길 수 없었다.

    권여아는 제아무리 대단한 장서열이라도 매번 자신을 이길 수는 없을 거라고 믿었다. 외모는 허상에 불과했다. 게다가 지난 몇 년간 그녀 역시 구염락에게 지극히 노력해 왔으므로 아주 자신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비록 실낱같은 희망일지라도 그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권 노야가 입궁했다. 태후가 함께한 자리에 울상이 된 황후를 마주한 권 노야의 마음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가장 맞닥뜨리고 싶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태후는 여전히 위엄 있는 태도를 유지했다. 마찬가지로 꼿꼿한 권 노야를 쳐다본 태후가 속으로 조용히 해야 할 말을 골랐다. 황후가 나선 이상 이제 황실은 권 씨 가문에 어떠한 빚도 없는 셈이었다. 오히려 황실에 매달리게 된 것은 권 씨 가문이므로 태후는 이 진흙탕 싸움에 발을 들일 만반의 준비를 갖췄다.

    태후가 가쁜 숨을 뱉으며 입을 열었다. 몸에 좋다는 것을 모두 썼어도 세월 앞에 장사는 없었다. 앞으로 그녀에게 남은 여명은 길어야 이 년 정도에 불과했다. 잠시 숨을 고른 그녀가 다시 위엄을 떨치며 말을 이었다.

    “황후는 내게 어려운 부탁을 하고 있네. 어떤 내용인지는 잘 알고 있겠지. 황후의 오라비인 자네의 의견이 듣고 싶군.”

    권 노야는 침묵했다. 관직에서 수십 년을 보낸 그가 태후의 심중을 모를 리 없었다. 태후는 이미 마음속에 다른 생각을 품은 것이다.

    만약 권 씨 가문에서 줄곧 침묵했다면 황실은 그들의 여식을 데려간 죄로 권 씨 가문에 빚을 진 모양새가 되었을 터였다. 그렇다면 황실에서는 해명을 하기 위해서라도 권여아를 태자비로 세워야 했다.

    그러나 황후는 끝내 자중하지 못했다. 인내하지 못하고 먼저 들고 일어섰으니 이제 권 씨 가문에서 태자비를 배출하는 건 물거품이 된 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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