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8화
장서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누이동생의 머리를 잠시 쓰다듬었다. 어릴 때부터 부담스러울 정도로 총명했던 동생이었다. 그토록 억울한 일을 당한 뒤에도 그녀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그는 황실에 시집을 간 누이동생을 앞으로 어떻게 보호해 줄 것인지 고민해야 했다.
“안심해. 이 오라버니가 기필코 대장군이 되어 네 의지처가 되어 줄게.”
“그럼 정말 열심히 노력하세요. 혹시라도 나중에 제가 오라버니를 대신해 전하께 말단관직이라도 달라고 간청하지 않도록 말이에요.”
“뭐? 서열아, 이 오라버니는 정말로 상처받았다. 아무래도 난 다시는 널 볼 수가 없겠구나.”
오라버니의 손을 당긴 그녀가 속없이 활짝 웃었다. 그녀를 바라볼 때의 구염락보다도 더욱 기쁜 웃음이었다. 역시 오라버니는 희망에 찬 모습이 가장 잘 어울렸다.
장서열이 호기롭게 말했다.
“전하께서는 제가 오라버니를 그리워하는 걸 알고 자리를 마련해 준 거예요. 그러니 걱정 마세요. 설령 오라버니가 올케 문제로 몸져눕는 한이 있더라도 저는 멀쩡히 잘 지낼 테니까요.”
장서전은 누이동생이 자신을 안심시키기 위해 더욱 과장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는 딱히 반박하지 않고 그저 안쓰러운 심정으로 누이동생의 이마를 콕 찔렀다. 그리고 동생의 뜻에 따라 마음을 놓기로 했다.
사실 그로서는 누이동생이 세자와 혼인을 하든, 태자와 혼인을 하든 모두 기쁜 일이었다. 이제 남은 건 그가 능력을 키우는 일뿐이었다. 그렇다면 누구든 그녀의 오라버니를 생각해서라도 감히 누이동생에게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오라버니를 만난 후 장서열의 기분은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어두운 마음 한 구석에 불현듯 촛불 하나가 켜진 기분이었다. 비록 눈부실 정도는 아니었지만 한 줄기 빛만으로 희망을 얻기에 충분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기뻐하자 함께 기뻐했다. 그는 저녁 무렵 궁으로 돌아와 장서열과 함께 노래를 들었다. 물론 겉보기에 그러했을 뿐, 장서열이 뒤에서 노래를 듣는 동안 그는 앞에서 상소문을 검토했다.
군부(军部)를 대규모로 재편성하면서 서둘러 처리해야 할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만약 장서열이 있지 않았다면 구염락은 한동안 아예 저군전으로 돌아오지 않았을 것이다.
구염락은 황제만 믿고 있을 만큼 바보가 아니었다. 특히 황제가 권력을 넘겨줄 때까지 마냥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더더욱 없었다. 그에게는 장서열과 함께 있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 장서열의 버팀목이 되어주기 위해 그는 반드시 뛰어난 성과를 보여야 했다.
장서열은 기분이 좋았다. 그녀가 듣고 있는 건 유명한 희곡이었다. 궁정 악사들은 과연 범상치 않았다. 작품이 훌륭할 뿐만 아니라 사람을 웃게 만드는 실력도 대단했기에 장서열은 평상에 비스듬히 앉은 채 한없이 즐거워했다.
농교와 완정 역시 기뻐했다. 어찌 되었든 아가씨가 기쁘면 그녀들도 기쁘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앞쪽에서 태자의 시중을 들고 있던 소리자는 안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를 들으며 무표정한 얼굴로 서 있었다. 그는 생전 처음으로 태자가 소음에 노발대발하며 그녀들을 야단치거나 혹은 아예 자복궁으로 내쫓아 버리기를 기도했다.
하지만 소리자는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태자의 시선은 줄곧 상소문의 주석을 향해 있었으나,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몰랐고 필체는 온화했다. 소리자는 태자의 기분이 매우 좋다는 걸 알았다. 이 모든 게 안에서 웃고 있는 여인 덕분이었으므로 그의 기도는 망상에 가까웠다.
고개를 숙인 화 마마가 작게 속삭였다.
“양원마마, 전하께서 야참을 드실 시간입니다.”
장서열이 기분 좋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서 사람을 보내라.”
장서열은 노래를 멈추게 한 뒤 앞쪽으로 걸어갔다. 주렴을 통과하자 구염락의 책상이 눈에 들어왔다.
상소문은 구염락의 머리가 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쌓여 있었다. 때마침 그는 붓을 들고 무언가를 휘갈겨 쓰고 있던 참이었다. 빠른 속도였지만 그는 상소문 하나하나를 모두 꼼꼼히 읽었다.
장서열은 구염락에게 강박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일의 경중과 관계없이 그는 모든 일을 세심하게 처리했다. 그런 그의 목표가 근면한 제왕이 아닌, 전쟁을 일으키는 데 있다는 게 불가사의할 뿐이었다.
그녀는 그를 방해하지 않고 빙 돌아서 전전(前殿)의 의자에 앉았다. 화 마마가 보낸 이가 야참을 가지고 들어오자 그녀는 작은 쟁반 위에 몇 가지 반찬을 고른 후 그릇에 죽을 덜었다.
장서열이 직접 쟁반을 들고 건너가자 농교가 의자를 옮겼다. 말없이 수저를 든 그녀가 죽 위에 반찬을 올린 후 바쁘게 업무를 보고 있는 구염락의 입가에 가져갔다.
구염락은 순간 어리둥절했다. 옥처럼 투명한 손톱과 희고 가느다란 손가락은 오히려 수저에 든 음식보다 더욱 탐스럽게 보였다.
그러나 구염락은 지난번처럼 감히 경거망동할 수 없었다. 게다가 지금은 매우 바빴다. 그가 계속해 장서열을 태자비로 고집한다면 황제가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므로 그는 더욱 열심히 일해야 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내민 수저를 한 입에 다 받아먹은 뒤 다시 상소문으로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번잡한 상소문의 내용이 그렇게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장서열은 천천히 구염락에게 죽을 먹였다. 백수도(百寿图, 장수를 의미하는 수(壽)자로 만든 도안)가 그려진 수저가 화려한 그릇을 한 번 휘저었다. 수저에 다시 죽을 담은 그녀는 그 위에 두어 개의 녹색 반찬을 올린 후 자신을 볼 새도 없이 바쁜 구염락의 입가로 가져갔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무엇을 주든 개의치 않고 그저 충실히 받아먹었다. 맛이 없다고 어깃장을 놓거나 평소처럼 야참을 성가셔 하지도 않았다.
장서열은 조용한 동작으로 이를 반복했다. 그녀의 시선은 무언가를 생각하는 사람처럼 대부분 죽 그릇 위에 머물러 있었다.
마침내 죽 한 그릇을 다 먹인 장서열이 금서(锦书)에게 그릇을 건네주고 시간을 보았다. 자야 할 시간임을 확인한 그녀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구염락이 돌연 입을 열었다.
“여기서 자.”
잠시 안을 바라본 장서열이 입을 가리고 웃었다.
“일 보세요. 전 이제 못 버티겠으니 자러 가겠습니다.”
장서열이 우아하게 하품을 하며 하인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구염락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도대체 이 망할 궁에는 무슨 놈의 규칙이 이리 많단 말인가.
물론 서열이 이곳에서 잘 자격이 없다면 그 역시 자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구염락은 상소문을 자복궁으로 옮기라고 지시했다. 그는 장서열은 그대로 푹 자게 둔 뒤 자신은 바깥에서 업무를 보았다. 장서열은 미간을 찌푸렸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구염락이 뜻대로 하게 두었다.
화 마마는 침대의 휘장을 내려 주며 끊임없이 장서열에게 속닥거렸다. 화 마마는 전하의 행동이 규칙에 어긋나며, 장서열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질책했다. 아울러 이럴 때일수록 그녀가 나서서 그에게 군사 기밀을 후원에 갖고 와서는 안 되며, 태자비도 아닌 양원의 거처에서 상소문을 읽는 행위는 예법에 어긋나는 행동임을 일깨워야 한다고 채근했다.
장서열은 화 마마의 말을 못 들은 척했다. 애초에 구염락이 설득이 가능한 사람이었다면 그녀부터가 잠을 자는 대신 기꺼이 그를 설득하는 데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다.
* * *
서쪽으로 기운 달그림자는 마치 보름달처럼 밝았다. 장서전은 잠이 오지 않았다. 누이동생을 보고 온 탓인지 더욱 잠을 이룰 수 없었다.
다행히 누이동생은 잘 지내는 듯 보였지만 오라버니로서 누이동생에게 힘이 되어 주지 못하고 어머니를 행복하게 해 드리지 못하는 스스로가 무능력하게 느껴졌다.
비록 입 밖에 꺼내지는 못했지만 그는 누이동생이 정말로 입궁했다는 게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그럼 서풍엽은?’
서풍엽은 아마도 누이동생의 마음속에 상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장서전은 과거처럼 철부지가 아니었다. 그는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위해 멀리 보고 깊게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옥언 역시 잠을 이룰 수 없어 전원(前院)까지 산책을 나간 참이었다. 그녀는 아들 방에 아직까지 등불이 켜져 있자 가까이 다가갔다. 서열이가 잘 지내고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조옥언은 잠시 생각한 끝에 끝내 이를 묻지 않았다.
“시간이 늦었으니 일찍 자거라.”
장서전이 어머니를 바라보았다. 어머니는 어렸을 때부터 한결같이 자식에게 모든 걸 내어 준 분이었다.
‘하지만 어머니는 정말로 그게 최선이었다고 생각하는 걸까?’
조옥언은 아들의 눈 속에 떠오른 의문을 알아차렸다. 비록 오랫동안 곁을 떠나 있던 아들이었지만 그녀가 자식의 생각을 눈치채지 못할 리 없었다.
자신의 두 아이가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누리며 행복하기만을 바라는 조옥언은 옳고 그름을 떠나 오로지 자신의 판단을 믿었다. 구염락은 정식으로 황자 교육을 받은 이가 아니었다. 그런 구염락이라면 마땅히 모든 걸 걸어볼 만했다. 그리고 그녀의 딸에게는 충분한 가능성이 있었다. 그게 아니었다면 평생 황실의 눈치나 보며 살다가 장래에 외손녀를 입궁시키는 길을 모색해야 했을 것이다.
‘그럴 수는 없어!’
조옥언은 딸아이에게 주도권을 쥐여 주고 싶었다. 딸은 심지어 자신보다도 침착하고 뛰어났다. 모친인 조 노부인조차 인정한 아이였다. 이렇게 된 이상 그녀는 절대 포기할 수 없었다.
장서전이 돌아서는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어머니, 이게 정말 서열이에게 더 나은 선택이었을까요?”
조옥언이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조 노부인은 일단 일을 저질렀으면 후회가 없어야 한다고 했다. 후회란 반반의 확률을 지닌 싸움을 패배로 이끄는 원인이 될 뿐이었다. 조옥언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네가 보기에는 서열이가 잘 못 지내는 것 같으냐?”
곰곰이 생각하던 장서전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매우 잘 지내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전과 같이요. 태자 전하는… 제게 서열이를 만날 수 있게 해 주셨고요.”
구염락은 누이동생을 많이 아끼고 있었다. 과거에 누이동생이 그에게 매우 잘했으니, 그 역시 누이동생을 총애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 됐다. 이만 자거라. 앞으로 네가 서열이의 버팀목이 되어 줘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더 말해 봐야 소용없다는 걸 안 장서전이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머니도 안녕히 주무세요.”
장서전은 부모님의 이혼을 그리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 한 번은 장신성이 그를 찾아온 적이 있었다. 아버지는 성질이 난폭한 어머니가 자신을 내쫓았다며 울고불고 소란을 피웠지만 장서전은 바보가 아니었다. 누가 누구를 먼저 실망시켰는지 장서전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장서전은 앞으로 혼인을 하면 절대로 아버지처럼 배은망덕한 사람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