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7화
그가 손수건으로 직접 그녀의 눈가를 닦아주었다. 목소리와 달리 부드러운 동작에는 애정이 가득했다.
장서열은 안도했다. 그녀는 이러한 구염락의 모습이 익숙했다. 비록 자신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낯설었지만 적어도 어젯밤의 그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소리자는 뒤따르는 사람들과 함께 장서열에게 절을 올렸다. 장서열은 그들에게 굳이 일어나란 말을 하지 않고 구염락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이는 한참 재미있는 극을 중단시킨 소리자에 대한 원망이었다.
나긋나긋 이어지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구염락이 엷게 미소 지었다. 뚜렷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어떤 내용이기에 이렇게 운 건지 궁금하군. 여봐라! 악관들에게 알려라. 장 양원을 웃게 만드는 자에게는 상을 내리겠다!”
무대 위에 있던 이들이 황급히 머리를 조아리며 태자의 은혜에 감사를 표했다. 장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실소했다.
“모르는 소리 마세요. 극을 보면 인생의 천태만상과 희로애락을 알 수 있어요. 지금 당신의 말 한 마디는 제 인생의 재미를 그만큼 줄어들게 한 거예요.”
구염락은 장서열의 원망 섞인 말조차도 그저 기뻤다. 만약 밖이 아니었다면 그는 그녀에게 달라붙어 직접 노래를 불러주겠다고 나섰을 것이다.
“슬픔은 몰라도 돼.”
슬픔은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서전이 돌아왔어. 내가 입궁하라고 명했지. 함께 가서 만나 보겠어?”
소리자는 고개와 허리를 숙인 자세를 유지하기가 몹시 힘이 들었다. 이는 다른 태감들과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장서열이 의아한 시선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구염락은 칭찬을 바라는 얼굴로 그녀를 마주보고 있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을 위해 일부러 장서전을 부른 것이었다. 그는 장서열이 전쟁터에 나간 서풍엽과 장서전에게 많은 서신을 보냈다는 걸 알고 있었다. 이후 그녀는 서풍엽에게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지만 장서전에게 보내는 서신은 끊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오라버니가 몹시 그리울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적잖은 감동이 느껴졌다. 지금 그녀의 신분으로는 쉽게 가족을 만날 수 없었다. 그런데 구염락이 오라버니를 만나게 해 준 것이다.
잠시 생각하던 장서열이 답했다.
“좋아요.”
구염락이 웃었다. 자신의 성의를 받아 주는 그녀보다 더욱 그를 기쁘게 하는 것은 없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일어서는 것을 도운 뒤 함께 발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서전이는 키가 많이 자랐어. 체격도 우람해지고 콧수염도 생겼지. 헌데 조금 전에 보니 그건 이미 깨끗하게 정리했더군. 당신에게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쉬워. 위로 쑥 올라간 게 정말 웃겼거든.”
구염락이 자신의 얼굴 위에 수염 모양을 그리며 웃었다.
“오라버니는 소대를 이끌고 최전선에서 용맹하게 싸웠어요. 분명 출셋길에 오를 테니, 그때가 되면 어머니께서도 분명 기뻐하실 거예요.”
“확실히 예전보다 많이 진중해졌지. 일개 병사의 신분으로 가장 힘들고 위험한 곳에서 싸우다니 말이야. 나도 그를 다시 봤어. 이따 그를 보면 어느 곳을 원하는지 물어봐도 좋아. ‘일등공’과 ‘제일군’ 모두 자리가 비어 있거든.”
구염락이 신중하게 말했다. 그는 장서전을 좋은 자리에 등용하여 장서열을 기쁘게 하고 싶었다.
장서열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올해 들어 마침내 그녀를 실망시키지 않는 일이 생겼다. 오라버니가 능력을 인정받게 되다니 이보다 기쁜 일은 없었다.
그녀의 미소에 구염락이 더욱 열심히 말을 이었다. 마치 전문 이야기꾼처럼 살뜰한 모습이었다.
마침내 상서방(上书房, 황자가 공부하는 곳)에 도착했을 때, 장서열을 향해 눈을 찡긋해 보인 그가 부드럽게 말했다.
“들어가 봐. 오라버니가 있을 거야.”
구염락은 장서열이 ‘누군가’에게 전달할 물건을 준비하지 않았다는 걸 알았다. 만약 장서열이 장서전을 통해 ‘그’에게 소식을 전하고자 했다면 구염락은 이번 한 번은 그녀의 소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허나 오직 한 번뿐이었다. 두 사람에게도 작별인사가 필요할 것이다.
장서열은 무심코 손을 들어 어린 시절처럼 구염락의 머리를 쓰다듬으려 했으나 이제 그의 머리에 손이 닿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곧 손을 거두었다.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허리를 숙인 구염락이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순간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린 그녀가 마치 상을 하사하듯 그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어 주었다. 그리고 뒤를 돌아 상서방으로 들어갔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사라지자마자 차가운 얼굴이 되어 뒤에 선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그녀를 화나게 한 일이 있느냐?”
소리자가 털썩 바닥에 꿇어앉았다.
“전하, 소인은 모르는 일이옵니다! 소인은 줄곧 전하 곁을 지켰사온데 어찌…….”
“모르겠으면 생각해 내라.”
구염락은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바닥에 꿇어앉은 소리자는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사실 어젯밤 금용을 만나러 갔었다. 하지만 단지 금용에게 태의를 불러 주고 처소를 바꿔 주었을 뿐이었다. 남소원은 비록 잘 꾸며져 있었지만 어둡고 습해 아픈 금용에게 좋지 않았다.
‘설마 이것도 안 된단 말인가? 장 양원은 높은 자리에 앉아있으면서 어째서 이토록 금용을 물고 늘어지는 걸까?’
게다가 그 사건은 엄밀히 말해 금용의 잘못이 아니었다.
* * *
“오라버니.”
잠시 멍하니 장서열을 바라보던 장서전이 곧이어 미친 듯이 기뻐했다.
“서열아, 내 누이야!”
장서전은 날 듯이 뛰어왔다. 함박웃음을 지은 얼굴에는 소년 특유의 득의양양한 기세가 가득했다.
“이것 봐. 이 오라버니가 승전보를 울렸어! 어때, 대단하지? 태자 전하께서 친히 이 오라버니를 궁으로 부르셨어! 나도 이제는 공을 세운 사람이야! 천하를 누비며 능력을 펼칠 수 있다고!”
장서열은 오라버니의 지나친 자랑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요? 겹경사군요. 마침 어머니께서 오라버니를 위해 올케를 두 명이나 구해 놓았거든요. 어때요. 더 기쁘죠?”
장서전의 얼굴은 금세 울상이 되었다.
“어머니도 그러시더니 너까지 나를 놀리는구나!”
“솔직히 말해 봐요. 너무 기뻐서 어쩔 줄 모르겠죠?”
두 남매는 얼굴을 마주한 채 활짝 웃었다.
잠시 후, 별안간 장서열의 어깨에 손을 얹은 장서전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마치 누이동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살펴보려는 듯했다.
“집에 돌아가고 싶니?”
“이제는 아니에요. 사람은 감사할 줄 알아야 해요.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잘 지내면 그걸로 됐어요.”
가족들의 안위만 보장된다면 자신이 잘 지내는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장서전은 잠시 누이동생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그는 동생에게 할 말이 많았지만 끝내 입을 다물었다.
“어머니는 잘 지내시고요?”
“응, 잘 드시고 잘 주무셔. 참, 어머니께서 장서영을 양녀로 받아 주셨어. 몰랐지? 장 씨 가문 사람들은 전부 정신이 나간 것 같아. 죄다 몰려와서 우리 집 대문 앞에 꿇어앉아 성을 바꾸겠다고 난리들이야. 물론 어머니는 들은 체도 하지 않으셨지. 심지어 장서양도 꿇어앉아 있었다니까! 정말 웃기지 않니?”
장서열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들은 자존심도 없대요?”
“그러게. 아무래도 어머니가 적잖이 심심하신 것 같아. 개를 다 키우고 싶어 하시다니 말이야. 자, 이제 그 이야기는 그만 하자. 네가 보기에는 어때? 이 오라버니가 제법 건장해진 것 같지 않아? 난 요새 한 끼에 밥을 여덟 공기나 먹고 있어!”
“…….”
“하하, 실은 세 공기야. 몸집을 거인처럼 키워서 가족과 나라를 지켜야지.”
장서열은 누구보다 활기찬 장서전을 보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고 생각했다.
‘오라버니는 이것으로 됐어.’
장서전은 혹시라도 누이동생이 나쁜 기억을 떠올리게 될까 봐 다른 말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망설이던 그가 결국 입을 열었다.
“궁에서는 항상 몸조심 해. 행여나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게 주의하고. 전하는 바쁘시니 네가 많이 양해해 줘.”
사실 장서전은 태자야말로 무서운 사람이니 최대한 그를 멀리하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또 그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서북 변경에서 장서전은 구염락과 같은 군에 있었다. 장서전은 태자가 친히 출정하여 적진에 뛰어드는 모습을 보았다. 온몸에 피를 뒤집어 쓴 그가 잔혹한 방식으로 적을 무찌르는 모습은 그간 수없이 많은 죽음을 접한 장서전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들었다.
적군의 목이 날아갈수록 태자의 기세는 더욱 거세졌다. 나중에는 대여섯 명의 장정들이 한꺼번에 뜯어 말려야 비로소 그를 멈출 수 있을 정도였다. 장서전은 만일 그때 태자를 진정시키는 데 실패했다면 그가 적군을 모조리 죽인 후 그대로 같은 편까지 해쳤대도 놀랍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장서전의 말에 장서열이 입을 가리고 비웃었다.
“오라버니나 조심하세요. 예전에 매일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던 사람이 누군데요.”
장서전은 무안한 듯 괜히 머리를 긁적였다. 그렇지 않아도 그는 자신이 두 번째 목숨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앞으로는 절대 전하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길 바라요.”
장서전은 말로는 누이동생을 당할 수 없다는 걸 알고 화제를 바꿨다.
“그나저나 태자 전하는? 전하께서 나보고 여기서 기다리라고 하셨거든.”
“밖에 계세요. 저보고 먼저 오라버니를 만나보라고 했어요. 아마도 오라버니가 언감생심 대장군 자리를 넘보는 일이 없도록 미리 단속하라는 뜻이겠죠? 괜히 전하를 난처하게 만들지 않도록 말이에요.”
“무슨 소리! 난 소장군 정도면 충분해.”
그리고 사람들이 주의하지 않는 틈을 타 장서전이 장서열의 귓가에 속삭였다.
“서풍엽은 걱정하지 마.”
이어 그가 누이동생을 끌어안고 괜스레 핀잔을 주었다.
“그런데 너 머리가 왜 이래? 정말 못 봐 주겠다.”
장서열이 장서전의 손을 뿌리쳤다.
“오라버니가 뭘 알아요? 난 나이 들어 보이는 건 딱 질색이에요. 아직 어리잖아요.”
“그래? 그럼 이리와 봐, 이 오라버니의 솜씨를 보여 주지!”
장서열이 얼른 몸을 피했다. 그는 예전부터 그녀의 머리카락으로 장난치는 걸 좋아했다. 문제는 그가 머리카락을 틀어 쥘 때마다 매우 아팠던 데다 심지어 한 번도 머리를 제대로 땋아본 적이 없다는 점이었다. 그러니 그녀가 자신의 머리를 오라버니에게 맡길 리 만무했다.
“병사가 무슨 머리를 만져요! 설마 제가 남자 올케를 보게 되는 건 아니죠?”
“장서열, 정말 못하는 소리가 없구나!”
역시 괜한 걱정이었다. 누이동생은 백 번을 입궁한다 해도 결코 무너지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