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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86)화 (186/449)

제186화

황제는 분노가 가라앉지 않는 걸 느꼈다.

“고생?”

지금 진짜 고생을 겪고 있는 건 황제 자신이었다. 장서열이 그 몸으로 세자가 아닌 태자에게 시집올 수 있었던 건 그야말로 천운이 따른 결과였다. 그런데 구염락에게는 그게 고생으로 보이는 모양이었다. 아들은 여인 때문에 그 정도로 분별력을 잃고 있었다.

황제가 이어 말했다.

“짐이 여태까지 그리도 입이 아프게 설명을 했거늘, 넌 여전히 네 고집만 부리는 구나. 대체 무슨 속셈이냐? 네가 그 아이를 데려오느라 저지른 일이 미안해서 보상이라도 해 주겠다는 게야?”

구염락은 황제가 왜 그런 생각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오랜 기간 제위에 앉아 있던 탓인지 그는 생각보다 더욱 안하무인이었고 모든 걸 권력 하나로 해결할 수 있다고 여겼다. 구염락은 차라리 그가 황제여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황제가 아닌 자가 저러고 있으면 얼마나 꼴사납겠는가.

“아니요. 그 자리는 원래 그녀의 것이었으니까요.”

구염락은 황제와 입씨름을 할 마음이 없었다. 괜히 그가 장서열을 모욕할까 두려웠다.

황제가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주관이 뚜렷한 구염락의 얼굴이 처음으로 몹시 거슬렸다. 구염락의 고집과 그가 장서열을 위해 하는 모든 행동들이 전부 다 거슬리기 시작했다.

황제가 처음으로 싸늘한 표정을 지었다.

“구염락, 날 실망시키지 마라. 난 네게 그 아이뿐만 아니라 권력을 주었다. 네가 무엇을 중히 여겨야 하는지는 네가 더 잘 알겠지. 짐에게는 아직도 널 대신할 사람이 많다는 걸 명심해라.”

구염락은 그리 놀랍지 않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물론 잘 알고 있었다. 그와 황제의 관계는 애초에 거래를 통해 형성되었다. 그는 능력을 팔았고, 황제는 권력을 주었다.

만일 그에게 태자의 자질이 없었다면 그는 여전히 남소원에서 썩고 있었을 것이다. 황제의 아들이라는 건 허울 좋은 이름일 뿐이었다. 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면 구염락은 영원히 황제의 눈에 들지 못했을 것이다.

구염락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황제는 장서열을 태자비로 세워선 안 된다는 생각을 더욱 굳혔다. 끝끝내 거절하던 장서열이 결국 입궁하게 된 이유만 생각해 보아도 그러했다.

“네게 마음이 없는 여인을 굳이 태자비로 만들려는 까닭이 무엇이냐? 권 씨 가문에서 어떻게 나올지 생각해 보았느냐? 사람들의 입방아는? 넌 네 사랑을 이루려는 것이냐, 아니면 네 위대함을 과시하려는 것이냐?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게 아니라면 사랑 타령은 그만 두고 태자 역할이나 성실히 하거라!”

보아하니 대화가 통할 것 같지 않았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던 구염락이 시선을 거두고 입을 열었다.

“이번 전란에 서북 장군의 공이 적지 않으므로 소자가 특별히 그를 연경으로 불렀습니다. 머지않아 입궁하여 폐하께 용서를 구할 것입니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황제가 노발대발하기 시작했다.

“서북 장군을 뭐 어째? 누가 감히 그를 불렀다더냐!”

서북 장군은 과거 황제에게서 조옥언을 빼앗으려 한 전적이 있을 뿐만 아니라 서북에서 구염락을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후에 서북 장군은 그 역겨운 여인과 그녀의 아들인 구염락을 들이밀어 또 한 번 황제의 속을 뒤집어 놓았다.

서북 장군은 시도 때도 없이 황제를 도발하는 자였다. 유년 시절 조옥언을 숭배하던 무리 중 풍윤은 사실 황제라는 신분 외에 내세울 게 없었다. 과거 그가 서숭산(西崇山, 서북장군의 본명)을 쫓아내 조옥언에게서 멀어지게 만들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그가 황제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심지어 지금은 서북 장군이 길러낸 구염락까지 태자가 되어 있었다. 덕분에 장장 스무 해 가까이 연경에 발을 들이지 못했던 자가 연경에 돌아오게 된 것이다. 과거 황제는 죽을 때까지 서북 장군을 연경에 들이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 이제 그의 맹세는 우스갯소리가 되어 버렸다.

구염락을 바라보는 황제의 눈 속에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어째서 그런 짓을 벌인 게냐?”

구염락은 황제가 전혀 두렵지 않았다. 오히려 걸핏하면 화를 내는 그가 우습다고 생각했다.

“신하가 연경에 돌아오는 것이 잘못된 일입니까?”

“네 이놈!”

구염락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그는 황제와 서북 장군 사이의 일에 관심이 없었다.

“네 뜻을 이뤄주지 않았다고 지금 짐에게 복수하는 게냐?”

구염락은 우스웠다. 두 가지 일이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인가. 전공을 세운 서북 장군이 연경에 공물을 바치러 오는 건 신하로서 당연한 도리였다. 황제는 쓸데없는 오해를 하고 있었다.

“만일 짐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쩔 것이냐?”

황제가 구염락을 쏘아보았다. 그는 처음으로 아들이 생각만큼 완벽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폐하의 동의와 상관없이 그는 이미 귀경길에 올랐습니다. 그는 적과 맞서 싸운 공로가 크니 폐하께서도 상을 내림에 있어 신중을 기하셔야 할 것입니다. 이미 출발한 서북 장군을 다시 돌려보낸다면 사람들이 뭐라 입방아를 찧겠습니까.”

황제가 소리쳤다.

“당장 꺼져라!”

“그럼 소자,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 * *

조로궁(朝露宫)은 내명부에 아침 이슬처럼 복을 내린다는 의미와 황후의 은덕이 조용히 만물을 적신다는 두 가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백 년의 역사를 지닌 이 전각은 수차례의 보수를 거쳐 더욱 으리으리한 모습을 자랑했다. 황후의 거처였기에 각종 진귀한 물건들이 보존되어 있는 것은 물론 진열되어 있는 모든 물품은 값을 매길 수 없는 천하의 보물들이었다.

조로궁 안, 봉황이 조각된 홍목 의자 위에 희고 여린 그림자 하나가 오열하고 있었다. 봉황 비녀에 화려한 금의(金衣)를 입은 황후가 퉁퉁 부은 눈으로 가슴 아파했다.

“착하지. 그만 울렴. 응? 본궁이 잘못했다. 다 못난 고모 탓이야.”

권여아는 고개를 저었지만 흐르는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전날 태자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곧장 자복궁으로 가 하룻밤을 보냈다. 아무리 마음을 넓게 먹으려 해도 답답하고 괴로운 건 어쩔 수 없었다.

권여아는 태자의 행동에 전의를 상실했다. 그가 어떻게 자신을 이리 대할 수 있단 말인가. 권여아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명분도, 품계도 없는 그녀에게 따져 물을 자격이 있을 리 없었다.

“황후마마, 고모… 저를 집으로 돌려보내 주세요. 제발 돌려보내 주세요…….”

황후도 울고 있었다. 아들이 태자 지위를 잃고 심지어 조카딸까지 이런 수모를 겪고 있으니 황후인 그녀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황제조차 자신에게 그렇듯 몰인정한 말을 하는 마당에 이대로 궁에 남아 있다 한들 무슨 좋은 꼴을 보겠는가.

눈물을 닦은 황후가 말했다.

“그래. 우리 함께 돌아가자꾸나. 고모가 너와 함께 가겠다.”

조로궁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황후를 달래는 소리와 땅에 이마를 찧는 소리가 가득했다. 모두들 황후에게 심사숙고하라고 말하고 있었다.

놀란 권여아는 감히 더 울지 못하고 바닥에 꿇어앉아 황후에게 명을 거두어 달라고 빌었다. 일국의 국모가 궁을 떠나는 건 국가의 존엄과 관계된 일이었다. 권여아는 황후가 궁을 떠나도록 부추겼다는 죄를 차마 감당할 수 없었다.

물론 황후는 자신이 궁을 나갈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녀에게는 태후와 같은 무소불위의 권위가 없었다.

순간 효자태후를 떠올린 황후가 갑자기 눈물을 멈췄다. 그녀의 눈 속에 한 줄기 섬광이 스쳐 지나갔다. 너무나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었다. 비록 권력을 내어준 효자태후가 외부와의 관계를 끊고 단출한 생활을 하고 있다고 해도 결코 황후의 체면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태후에게 간청한다면 어쩌면 여아에게도 기회가 있을지 몰랐다.

황후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눈물을 닦은 황후가 급히 권여아를 데리고 자녕전(慈宁殿)으로 향했다. 황후는 아직 황궁에 자신을 위해 시시비비를 가려줄 사람이 있다고 굳게 믿었다.

* * *

잠시 낮잠을 자고 일어난 장서열은 연자죽(연꽃의 열매를 넣어 만든 죽)과 간식을 먹었다. 그녀는 뒤뜰에 앉아 희극을 보는 중이었다. 오늘은 시끄러운 극이 아닌, 남녀 간의 사랑을 노래하는 조용하고 슬픈 극이었다.

장서열은 무료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녀는 평소처럼 침대에서 일어난 후 뒤뜰에서 차를 마시고 희극을 들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냈다. 시간이 남으면 바둑을 두었고, 점심을 먹으면 낮잠을 잤다. 오후에는 책을 보고 저녁이 되면 다시 가무를 감상하는, 지극히 단조로운 생활이었다.

농교와 완정은 많은 변화를 느꼈다. 예를 들어 아가씨가 먹는 연자죽의 양이 많아졌고, 주방에서는 무려 수십 가지나 되는 간식을 준비했다. 농교는 심사숙고 끝에 그중 열 가지를 골랐다. 심지어 오늘 올린 차는 평소보다 몇 배는 향기로웠다.

화 마마는 이 모든 게 태자 덕분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는 궁에 돌아온 첫날 바로 장 양원을 찾았고 자복궁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는 크나큰 은총이었기에 아랫사람들은 결코 자복궁을 홀대할 수 없었다.

의자에 앉은 장서열은 무대 위에서 펼쳐지는 극을 감상하며 때로는 슬퍼하고 때로는 기뻐했다. 농교와 완정, 화 마마와 같은 하인들도 극을 좋아했다. 주인을 따라 매일 극을 감상할 수 있는 건 큰 복이었다.

몇몇 사람들은 극에 매우 몰입했다. 연인이 억지로 헤어지는 장면에서 화 마마는 눈물을 흘렸다. 그녀는 당장 무대에 올라가 못된 시어머니를 혼내 주겠다고 큰소리를 쳤다.

장서열 역시 극에 몹시 빠져들었다. 하지만 연인이 사랑을 속삭일 때는 촉촉한 두 눈을 몇 차례 깜빡였을 뿐, 이야기에 완전히 몰입하지는 못했다.

무대와 관객석 모두 너나할 것 없이 연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구염락이 나타났다. 그는 울고 있는 장서열을 보자 마음이 떨려 오는 걸 느꼈다.

“태자 전하 납시오!”

동시에 무대를 둘러싼 격앙된 분위기가 끊겼다. 사람들은 모두 무릎을 꿇고 천세를 외쳤다. 무대 위에서 반쯤 매질을 당하던 어린 며느리와 조금 전까지 눈을 부라리던 시어머니 역시 모두 무릎을 꿇었다.

순간 정신이 든 장서열은 실망한 기색을 드러냈다. 희자들이 무릎을 꿇으니 몰입감이 완전히 사라져 조금 전 울고 있던 스스로가 바보처럼 느껴졌다.

몸을 일으킨 장서열이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검붉은 관복을 걸친 그는 차갑고 딱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뒤를 따르고 있는 시감(侍监, 관직명) 때문인지 그는 격식에서 벗어난 표정은 짓지 않았다.

태자가 다가오자 모두들 숨을 죽였다. 주변의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구염락은 차가운 얼굴과 달리 친히 앞으로 나아가 장서열이 몸을 일으키도록 부축했다. 평소 처소에서 보여 주던 조심스러운 얼굴을 지운 그가 낮게 깔린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노래이기에 눈시울이 붉어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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