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5화
가을바람이 불었다. 하늘에 걸린 달이 희미한 빛을 발했다. 태양은 아직 완전히 떠오르지 않은 상태였다.
장서열은 이미 깨어 있었다. 그러나 모처럼 악몽을 꾸지 않고 잠이 든 구염락은 아직도 곤히 잠든 채였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구염락의 습관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곁에 있는 사람이 조금만 움직여도 즉시 잠에서 깨곤 했다. 감각이 예민한 탓이었지만 달리 말하면 누군가 그를 죽일까 두려워한다는 뜻이었다.
전날 맡은 안신향의 약효를 완전히 떨쳐낸 후 장서열은 푹 자고 일어나 어제보다 훨씬 맑은 정신을 회복했다. 간밤의 일을 떠올린 그녀는 눈살을 한 번 찌푸렸지만 곧 어쩔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어차피 받아들이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장서열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침내 깨어난 구염락이 몽롱한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냉담한 얼굴로 눈을 깜박이던 그의 얼굴에 곧 미소가 떠올랐다.
“일어났구나.”
그제야 몸을 일으킨 장서열이 구염락의 소세(梳洗, 머리를 빗고 얼굴을 씻음) 시중을 들었다.
“시간이 늦었어요.”
잠시 멈칫하던 구염락이 장서열을 따라 침대에서 나왔다. 그 역시 어제보다 훨씬 맑은 표정이었다.
“내가 할 테니 좀 더 자.”
이미 시녀에게서 수건을 받아 든 장서열이 그의 손을 닦아주었다.
“졸리지 않아요. 어차피 당신이 가고 나면 난 또 잘 수 있어요.”
구염락은 자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장서열을 보며 낯선 감동을 느꼈다. 서둘러 표정을 숨긴 그가 옷을 갈아입혀 주는 장서열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조례 마치고 돌아올게.”
구염락의 허리띠를 묶고 있던 장서열의 손이 잠시 우뚝 멈췄다.
“별 말씀을요. 전 이미 적응했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전하께서는 이제 막 돌아오신 터라 할 일이 많으실 거예요. 제가 전하의 하인을 괴롭힐까 걱정되는 게 아니라면 마음 편히 일 보고 오세요.”
구염락은 빙긋 웃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는 혼자 옷을 갈아입을 수 있었지만 장서열이 옷을 집어 들자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을 위해 바쁘게 움직이는 그녀의 모습에 구염락은 말로 다할 수 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그녀가 있는 집은 그가 줄곧 바라 오던 소망이었다.
진작에 남소원에서 돌아온 소리자는 방 한편에 선 채 감히 나서지 못했다.
문무백관이 모두 참석한 조례가 시작되었다. 웅장한 승건전(升乾殿) 바깥으로 북소리가 울렸다. 저군전에서의 온화한 모습을 지운 구염락이 문무백관을 이끌고 조정에 나아갔다. 선두에 선 구염락의 위엄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차갑고 침착한 얼굴이 더욱 돋보였다.
“황제 폐하, 만세 만세 만만세!”
조례는 처음부터 끝까지 황제의 공적과 은덕을 찬양하는 말로 마무리 되었다. 뭇 신하들이 태자를 바라보는 시선은 조심스럽기 그지없었다. 신하들은 태자의 눈에 들지 못한 스스로를 자책하면서도 감히 태자의 앞에 나아가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 보이지 못했다.
황제는 신하들의 충성에 보답하듯 손을 한 번 흔들었다. 아울러 태자의 노고를 치하하며 그에게 사흘간 휴식을 주었다.
조례가 끝난 뒤, 구염락은 불쾌한 얼굴로 황제의 뒤를 따라 밀실로 향했다. 싸늘한 시선에는 분노가 어려 있었다.
“저는 분명 태자비라고 했습니다.”
장서열을 일개 후궁에 앉힌 건 구염락에게 있어 명백히 그녀를 업신여기는 행위였다. 그러나 황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도 미리 생각해 둔 말이 있었다.
“넌 아직 어려서 깊이 생각할 줄 모른다. 장서열은 정혼을 한 데다 납치까지 당했지. 그런 아이를 태자비로 삼는다면 사람들의 비난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이 딱 적당하지 않느냐. 아무도 그 아이에게 관심을 갖지 않을 뿐더러 그 아이가 후궁이 된 것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이것이야말로 두 마리 토끼를 잡은 게 아니냐.”
그러나 구염락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요. 그녀는 태자비여야 합니다. 유언비어는 제가 책임집니다.”
“어림없는 소리! 네가 뭘 책임질 수 있느냐? 누가 널 태자로 만들었는지 잊었느냐? 네가 태자비 자리를 놓고 배신한다면 황후가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그럼 사람들은 널 배은망덕한 놈이라고 손가락질 하겠지! 고작 여인 하나에 그런 가치가 있느냐?”
고개를 든 구염락이 결연한 얼굴로 황제를 바라보았다.
“네. 누가 뭐래도 그녀는 저의 태자비입니다. 이 일은 제가 알아서 처리합니다.”
결국 황제가 폭발했다.
“닥치거라! 너는 태자이자 장래 대주국의 황제다! 장서열이 태자비라고? 여인이란 네가 총애할 때나 가치가 있는 법, 그렇지 않으면 총애를 잃고 이름 없는 여인이 될 뿐이다. 평생 한 여인만 바라볼 작정이냐? 어찌 태자비 하나로 더 큰 미래를 포기하려 하느냐!”
“제 미래는 제가 결정합니다. 제 마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아이는 이미 한 번 정혼을 했던 몸이다! 멀리 떨어져서 생각을 좀 해 보거라!”
구염락은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녀는 정혼을 했었고 예기치 못한 사고를 당했지만 결국 용감한 선택을 했습니다. 백성들에게 그녀는 정의를 위해 선뜻 자신을 희생한 여인으로 비칠 겁니다. 한 사람을 구하기 위해 황제의 뜻을 받든 여인으로 말이지요. 어느 모로 보나 그녀에게는 단점이 없습니다.”
황제는 화가 나 뒤로 넘어갈 지경이었다.
“그럼 짐은 뭐가 되느냐! 짐을 기회를 틈타 신하의 아내를 가로챈 소인배로 만들 셈이냐?”
“…….”
“구염락! 그 아이가 어떤 위치에 있는지 똑바로 직시해라. 짐이 아니었더라도 그 아이는 어차피 세자와 혼인하지 못했을 몸이다. 그 아이의 아비를 아느냐? 그런 무식한 사내의 여식이 뭐 얼마나 대단할 것 같으냐?”
구염락의 눈빛이 일순간 차갑게 변했다. 황제가 드디어 본심을 말하고 있었다. 그에게 장신성은 기분에 따라 갖고 노는 손 안의 장난감일 뿐이었다. 뿐만 아니라 장서열, 장서전 역시 그저 조옥언의 곁가지에 불과했다.
‘당신은 조옥언을 제외한 모든 장 씨 가문 사람들을 업신여겼지.’
황제는 아마 다른 남자와 혼인한 조옥언을 내내 원망했을 것이다. 그와 혼인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어 평생 황제를 위해 살았어야 했다. 그것이 바로 황제가 생각하는 완벽한 결말이었다.
“왜 날 그렇게 보느냐!”
고개를 돌린 구염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친아들조차 죽게 내버려 둔 인간이 이제 와 남의 자식을 생각해 줄 리 없었다.
황제의 눈에 장서열은 그저 예쁜 장난감에 불과했다. 세상을 심심풀이 장난감으로 보는 황제에게 신하라고 별반 다를 리 없었다. 그는 기분이 좋으면 총애하는 척, 그렇지 않으면 완전히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이었다.
구염락은 황제의 행태를 크게 비난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는 훗날 자신이 제위에 앉는 날 그 역시 황제처럼 위선적인 사람이 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구염락이 말이 없자 한숨을 쉰 황제가 인내심을 갖고 다시 한번 설득을 시도했다.
“네가 그 아이를 좋아하는 걸 안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생각하거라. 그 아이는 태자비에 적합하지 않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구염락이 조소를 터뜨렸다.
“과거 그녀를 기필코 태자비로 만들고자 하신 분은 폐하 아니셨습니까?”
황제가 즉시 답했다.
“상황이 달라졌다.”
“납치 때문입니까?”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니야.”
뒷짐을 지고 선 황제가 용상 위에 놓인 용머리 조각을 바라보았다. 그도 나름 많은 생각을 거친 후였다.
그는 모후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태후는 태자가 장서열을 맞이하기 전부터 많은 정성을 들이고 있으니, 정말로 장서열을 태자비로 세운다면 태자가 그녀에게 맹목적으로 휘둘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황제는 모후를 신뢰했다. 과거 자신 역시 조옥언에게 세상 전부를 주지 못하는 걸 한스러워 하지 않았던가. 만약 태후가 나서서 이를 막지 않았더라면 그 역시 한 여인에게 빠져 뼈와 살까지 모두 내어 주었을 것이다.
구염락은 정식 황자로 길러지지 않았기에 이제껏 접촉한 여인이 적었다. 황제는 구염락이 지금처럼 깊은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고 장서열에게 휘둘릴 사태를 우려했다. 과거 구염단신의 태자비로 장서열을 허락했던 이유는 그가 구염락보다 훨씬 이성적인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구염단신은 어려서부터 대주국의 태자로 자랐다. 따라서 그는 인간관계나 감정에 있어서 언제나 주도권을 쥐도록 교육받았고, 이에 따른 책임감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달랐다. 특히 장서열을 얻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그의 모습은 황제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황제의 눈에 구염락은 뛰어난 제왕의 길을 걸을 수 있는 재목이었다. 이렇게 우수한 인재를 하찮은 사랑 따위에 매달리게 둘 수 없었다.
“너도 이제 어린 나이가 아니다. 올해는 마침 수녀 선발이 있는 해이니 마음에 드는 아이가 있거든 소리자를 통해 짐에게 알리거라. 없다면 짐과 황후가 알아서 고를 것이다.”
구염락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는 장서열을 대하는 황제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서열이의 지위는,”
황제가 즉시 구염락의 말을 잘랐다.
“그 일은 짐도 어쩔 수 없다!”
그러나 구염락은 끝까지 고집을 굽히지 않았다. 오히려 차분한 목소리로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서열이는 저의 태자비입니다.”
고개를 돌린 황제가 제왕의 위엄을 드러내며 불같이 화를 냈다.
“아니! 그 아이는 네 후궁이다! 권여아는 어쩔 것이냐? 그렇게 계속 고집을 부리다가 황후의 얼굴을 어찌 보려고 그러느냐!”
구염락은 여전히 태연했다.
“그건 제 소관입니다.”
그는 누군가 장서열을 싫어할 수 있다는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장서열에게는 결점이 없었다. 그들이 그녀를 싫어한다면 자신이 보호하고 감싸면 그만이었다.
“뭐야? 제 구실도 못하는 녀석이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간밤에 그 아이가 대체 네게 뭐라고 한 것이냐? 여인을 품에 안아 보니 정신을 못 차리겠더냐?”
순간 구염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의 눈이 서릿발처럼 얼어붙었다. 그녀를 이런 식으로 모욕하는 건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시비를 가릴 줄 모른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전 있는 그대로를 말했을 뿐입니다. 그녀를 궁에 들인 건 저고, 그녀는 마땅히 자신의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누구도 그녀를 고생시킬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