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4화
“금용은? 금용은 어떻습니까?”
소리자의 목소리를 들은 금용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는 흥분하여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지만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아 크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녀가 즉시 외쳤다.
“태자께서 보내셨군요! 다른 말은 없으셨어요? 당장 저를 불러오라고 하시지요? 태의는 어디 있어요?”
금용은 말을 잇는 도중 더욱 화가 나는 걸 느꼈다. 이제껏 태의의 보살핌조차 받지 못하다니. 소리자가 아니었다면 그녀는 작은 의원이 처방한 약조차 받아 보지 못했을 것이다.
소리자는 괜스레 자신이 죄를 지은 기분이 들었다. 기대에 찬 금용에게 차마 태자가 그녀를 신경조차 쓰지 않는다는 말을 전해 줄 수 없었다.
송 마마와 금수는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소리자를 보낸 것을 보니 그래도 태자가 그 요녀에게 완전히 홀린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금용의 초췌한 몰골에 소리자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아팠다. 그는 가까이 다가가 금용을 부축해 주고 싶었지만 애써 그 마음을 눌렀다. 정말로 금용을 위한다면 이런 못된 버릇은 반드시 고쳐 놓아야 했다. 앞으로 전하께서는 더욱 많은 비빈을 둘 것이고, 그 여인들은 하나같이 만만치 않을 상대일 것이다.
소리자가 차마 어떤 것도 하지 못한 채 눈으로만 열심히 상태를 살피자 답답해진 금용이 간절하게 물었다.
“말을 해요! 벙어리가 됐어요? 나를 데리러 온 거죠? 됐어요.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 낮에 다시 오세요. 모든 사람들이 보고 있을 때 당당히 돌아가겠어요!”
금용의 말에 소리자가 드디어 입을 열었다.
“전하께서는… 잠시 이곳에서 요양을 하고 다 나으면 양원께 사죄하라고 명하셨다. 양원께 용서를 받아야만 다시 저군전으로 돌아갈 수 있어.”
소리자는 금용이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길 바랐다. 장서열을 대하는 전하의 태도를 본 후, 소리자는 앞으로 전하께서 아예 금용을 보호하지 않을까 두려웠다.
금용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일순간 그녀의 목소리가 지붕을 뚫어버릴 만큼 쩌렁쩌렁 울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예요! 거짓말하지 마! 내게 사죄하라고 하셨다고?”
송 마마와 금수 또한 놀란 얼굴로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말도 안 된다!”
소리자는 거의 무너질 것 같은 얼굴의 금용을 바라보며 아픈 마음을 꾹 누른 채 한 자 한 자 힘주어 말했다.
“그게 전하께서 전하신 말이다.”
심지어 이조차 소리자가 빌고 빌어 겨우 얻은 기회였다. 실제 구염락의 말은 더욱 매정했다. 그는 아예 금용을 내치고 다시는 양원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고 명했다.
소리자는 금용이 정확히 알았으면 했다. 궁에서 누구보다 가장 건드리지 말아야 할 사람은 바로 장서열이었다. 아무리 싫더라도 분을 삭이고 장서열의 비위를 맞춰야 했다. 만약 양원의 기분을 상하게 한다면 전하는 냉정하게 금용을 내칠 것이다.
금용이 흥분해서 소리쳤다.
“말도 안 돼! 태자 전하께서 내게 사과하라고 했을 리 없어요. 맞은 건 나인데 어째서 전하께서 나를 보지도 않고 그런 명을 내리셨다는 거예요? 난 아무 짓도 안 했어요! 그 독한 여자가 나를 질투해서 몰아내고 태자 전하를 독점하려는 거라고요!”
소리자는 미동도 없이 차갑게 말했다.
“너는 스스로를 대단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있구나. 양원께선 여아 아가씨도 상대하질 않는데 하물며 너 따위에게 손을 쓸 것 같으냐?”
금용이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그가 이렇게 매몰찬 말을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금용은 옥으로 장식된 베개를 그에게 던지려 했지만 힘이 없는 탓에 채 반도 나아가지 못했다.
“어떻게 내게 그런 말을!”
“그만 정신 좀 차려! 정말 주인이 되고 싶으면 태자 전하께 성심을 다하거라! 남을 음해하는 것도 먼저 능력을 갖춘 후에나 가능한 일이지. 일개 시녀인 주제에 상전을 못살게 굴다니, 화를 자초하는 게 아니고 무엇이냐!”
그래서 지금 네가 얼마나 상처를 받았는지 보라는 말을 소리자는 굳이 덧붙이지 않았다.
“지금 날 비웃는 거예요?”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한 채로 금용이 난폭하게 달려들려고 했다. 소리자가 얼른 다가가 그녀를 붙들며 차갑게 말했다.
“모두들 나가요!”
송 마마와 금수가 얼른 고개를 숙이며 방에서 물러갔다.
금용은 이미 울고 있었다. 몸부림을 치며 소리자의 손에서 벗어난 그녀가 침대에 엎드려 흐느껴 울었다.
“내가 대체 뭘 잘못했어요? 내 탓이 아닌데 전하께서는 양원 말만 듣잖아요… 전하께서는 이제 우리가 필요없어진 거예요… 전하는 변했어요…….”
“닥쳐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는 장 양원이 전하께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지 않느냐!”
소리자가 이제껏 보여준 적 없는 냉담한 얼굴로 말했다.
“네가 왜 장 양원을 괴롭히려 했는지를 잘 생각해 봐라. 넌 그녀를 난처하게 만들고 싶었겠지. 전하께서 우리를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 주고 싶었을 테고. 하지만 잊지 마라. 태자 전하께서 처음으로 우리에게 손찌검을 했던 게 바로 장 양원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순간 금용이 흠칫 몸을 떨었다. 생각하기 싫은 과거의 일이 떠오르자 그녀는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한숨을 쉰 소리자가 조금 부드러워진 말투로 말했다.
“물론 전하께서 우리와 나눈 정이 있지만 그건 장 양원에 비할 게 못 돼. 그녀는 높은 신분을 갖고 있는 데다 전하께 큰 사랑을 받고 있으니 그녀와 싸우면 너만 곤란해질 뿐이야.”
금용이 입술을 깨물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는 구염락을 좋아했고, 장서열이 싫었다.
“그러니까 난 시녀에다 천한 몸이라 이거죠? 전하께서는 까맣게 잊어버리셨군요. 과거에 누가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고 곁을 지켰는지 말이에요. 또…….”
“그만하지 못해!”
소리자가 격노했다.
“금용! 전하를 모실 수 있는 건 우리의 복이다! 더군다나 이미 전하께서는 보답으로 너희 집안에 많은 선물을 내리시지 않았느냐! 이제 보니 전하와 내가 너를 너무 오냐오냐했구나. 네가 궁의 법도를 모르는 건 다 그 때문이었어! 다시 한번 말하지만,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장 양원만큼은 절대로 건드려선 안 된다. 절대로!”
금용은 소리자가 계속해 장서열의 중요성을 강조하자 더욱 억울함을 느꼈다. 그녀도 자신이 문제를 일으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전하께서는 자신을 보러 오지 않았고, 소리자는 그런 자신을 위로하기는커녕 오히려 상처에 소금을 뿌리고 있었다.
“장 양원께 사죄 드리거라.”
소리자의 냉담한 말에 본래 고집불통인 금용은 침대에 엎드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없이 침대 가장자리에 앉은 소리자가 금용을 바라보았다. 소리자라고 그녀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넌 똑똑한 아이지. 이제껏 받아 온 총애를 빌미로 전하의 인내심을 시험하려 하지 마라. 그랬다간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게 될 거야.”
“하지만 난 정말 잘못한 게 없단 말이에요…….”
물론 장서열을 골탕 먹이려던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금용 역시 바보가 아니었기에 나름대로 트집을 잡힐 만한 어떠한 허점도 남기지 않았다. 오히려 터무니없는 말로 억지를 부리는 건 장서열이었다.
“장 양원이 그렇다면 그런 거야.”
“그녀가 주인이니까요?”
금용의 눈 밑은 새빨갰다.
“그래. 그녀가 주인이니까.”
소리자가 흔들림 없는 눈으로 금용을 바라보았다. 금용이 눈물을 닦았다.
“좋아요. 가서 사과할게요.”
기껏해야 고개나 숙이면 될 일이었다. 어차피 해본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 * *
깊은 밤, 이슬이 대지를 적셨다. 어두운 달빛이 저택 대문에 자리한 사자 석상을 비췄다. 장엄하고 신성한 광경이었다.
충왕부는 쥐 죽은 듯 조용했다. 저택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온 주인을 축하하는 소리도 없이 이상할 정도로 고요했다. 난간에 심어진 푸른 대나무 옆으로 등불이 비쳤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차가운 바람이 탁자 위에 놓인 옥문죽(屋文竹)을 스치고 지나갔다.
침대 위 그림자는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았다. 냉담한 얼굴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굳센 이목구비는 웃음을 잃어 더욱 딱딱해져 있었다. 그는 침대에 달린 낯선 휘장을 바라보며 적잖은 피로감에 휩싸였다. 떠날 때 붉은 색으로 바뀌어 있던 기억이 있었다.
순식간에 모든 게 달라졌다.
충왕비는 줄곧 밖을 지키고 있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아들을 묶어둔 그녀의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그녀는 서풍엽이 순간의 충동으로 사고를 일으킬까 걱정스러웠다. 이미 일이 이렇게 된 이상, 그가 장서열의 애틋한 마음을 헛되이 저버리게 둘 순 없었다.
물론 이는 핑계일 뿐, 사실 충왕비는 이기적일지라도 아들을 보호하고픈 마음이 더 컸다. 그녀는 장서열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녀에게 자식이라고는 오로지 서풍엽 한 명뿐이었다. 아들을 기쁘게 만들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었지만 그것도 다 아들의 목숨이 붙어 있은 후에야 가능한 일이었다.
서풍엽은 극도로 괴로웠다. 그는 그저 장서열을 한 번 만나보고 싶은 것뿐이었지만 충왕비는 이를 이해하지 못했다. 만일 반대의 입장이었다면 그 역시 장서열을 살리기 위해 같은 선택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어떻게 그 치열한 황궁에서 자리를 잡고 살아갈 수 있단 말인가.
서풍엽은 스스로가 증오스러웠다. 그는 장서열이 앞으로 어떠한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선이 닿는 곳에 장서열을 두고 싶었다. 만일 전공(战功)을 통해 그녀를 놓아 주겠다는 확답을 들을 수만 있다면 그는 몇 번이고 전쟁터에 나갈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자신을 오해하고 있었다. 서풍엽은 부모님을 위해서, 그리고 장서열에게 폐를 끼치지 않기 위해서라도 소란을 일으킬 생각이 없었다. 다만 장서열이 못난 자신 때문에 험난한 길을 걷게 되었으므로 그는 태자라도 만나 이야기를 해 보고 싶었다.
어쩌면… 서열이를 궁에 들인 것은 오로지 황제의 뜻일 뿐이었다는 약간의 기대를 품고서.
그렇다면 구염락은 과거의 정을 생각해 서열이를 놓아줄지도 모른다. 혹시라도 그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자신과 서열이를 함께 하도록 해 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차피 서열이는 이미 자신의 여인이므로 구염락 역시 더는 우기지 못할 것이다.
서풍엽은 충분히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구염락과 대화로 해결해 볼 작정이었다. 구염락이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그는 구염락이 시키는 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었다.
충왕 역시 잠을 이루지 못했다. 술을 마셨지만 정신은 오히려 더 또렷했다. 빳빳한 소매를 걷어 올린 그가 등불에 이끌려 밖으로 나왔다. 충왕비는 아직도 문밖을 지키고 있었다. 그가 탄식하며 가까이 다가가 부인을 껴안으며 말했다.
“가서 눈 좀 붙이시오. 여긴 내가 있겠소…….”
남편의 어깨에 기댄 충왕비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아들을 지켜야 했다. 직접 지켜야만 안심할 수 있었다. 아들을 볼 수 없었던 지난날들은 그녀에게 말 그대로 공포였다.
충왕은 강요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회랑 복도에 선 채 방 안의 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아들이 더 이상 몸부림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한 그들은 그제야 비로소 마음을 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