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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83)화 (183/449)
  • 제183화

    두 사람이 식사를 마쳤다. 구염락은 곧장 안마봉을 든 채 귀비탑에 앉아 소화를 시키는 장서열에게 안마를 해 주기 시작했다. 장서열이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 구염락을 저지했다.

    “하루 종일 고생하셨는데 앉아서 좀 쉬세요. 이런 일은 하인에게 시키면 됩니다.”

    그녀와 함께 귀비탑에 앉은 구염락은 할 말을 찾지 못해 가만히 있었다. 의자에 기대어 차를 마시는 장서열의 모습을 보며 그는 그녀가 기대어 앉은 모습만으로도 자신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사람인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장서열은 그런 구염락의 모습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순간 그녀의 입에서 예상치 못한 말이 툭 튀어나왔다.

    “금용을 남소원으로 보냈습니다.”

    일순간 고개를 번쩍 든 소리자가 다시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그는 발끝을 쳐다보며 꼼짝도 하지 못했다. 소리자의 동요를 느낀 완정은 의아했지만 다시 그릇을 들고 한편에서 시중을 들었다.

    구염락의 얼굴에서 문득 미소가 사라졌다.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

    “그 아이가 널 화나게 했나 보군.”

    장서열은 구염락의 반응이 놀랍지 않았다. 그는 즉시 노발대발하지 않은 것으로 자신이 금용보다 우위에 있음을 증명했다.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제가 식사를 하지 못하도록 그 아이가 주방에 말을 넣었더군요. 화가 나서 곤장을 때렸어요. 그 사실을 안 폐하께서 또 추가로 장형을 명하셨고요. 아마 아직 침대에서 내려오지 못했을 거예요.”

    소리자는 ‘또’ 라는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자존심 강한 금용이 곤장을 맞으면서 느꼈을 억울함은 보지 않아도 짐작이 가능했다.

    소리자는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어쩐지 환궁한 후 사람들이 차례로 그에게 안부를 물었었다. 영문도 모른 채 무엇인가 허전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제 보니 금용이 보이지 않았던 탓이었다.

    장서열은 소리자를 못 본 척했다. 그는 독한 사람이었다. 전생에서 소리자를 따랐던 완정은 그가 다른 여인을 취하는 걸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했다. 비록 자신이 죽은 뒤 완정의 최후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는 눈에 선했다. 금용의 머리에서 나온 계책을 소리자는 철저히 묵인했을 것이다.

    장서열은 문득 마음이 답답해졌다. 소리자의 마음이 돌덩이로 만들어진 게 아니라면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금용만 있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 완정의 희생과 사랑은 안중에도 없었을 것이다.

    심지어 장서열은 완정의 외모가 금용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전생에서 소리자는 금용을 위해 그와 무려 이십 년을 함께한 여인을 배신했다.

    뜻밖의 상황에 화 마마는 긴장했다. 저군전에서 금용의 위치가 독보적이었을 뿐더러 많은 이들이 그녀가 미래의 상전이 될 것이라 확신했던 탓이었다.

    구염락이 미간을 찡그리며 말했다.

    “잘했어. 감히 네게 무례를 저지르다니, 곤장에 그친 걸 감사히 여겨야 해.”

    같은 상황이었다면 그는 진작에 머리를 베어버렸을 것이다. 장서열이 가볍게 맞장구를 치며 말했다.

    “네. 전부터 전하를 모셨던 아이이기에 저도 심하게 때리진 않았어요.”

    죽지는 않았으니까.

    그 말에 구염락이 감동에 찬 눈빛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역시 그녀는 자신을 가장 좋아했다. 금용이 자신의 목숨을 구한 아이라는 건 옛날에 무심결에 뱉었던 말이었다. 그런데 그녀는 이것까지 다 기억하고 있었다.

    구염락은 장서열이 금용에게 너무 관대했다고 생각했다. 금용이 어떻게 자신의 서열이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장서열은 매번 금용을 생각하여 살뜰히 챙겨 주었다. 생각할수록 배은망덕한 아이였다. 구염락은 속으로 금용을 가차 없이 꾸짖었다.

    시선을 내리깐 장서열은 차를 마시며 전생에서 금용이 구염락과 나눈 대화도 이와 다르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금용이 황후였던 자신을 모함하고 원망할 때 구염락은 지금처럼 금용의 중상모략을 묵인해 주었을 것이다.

    지쳐 버린 장서열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피로가 몰려와 쉬고 싶었다.

    소리자는 구염락에게서 별다른 움직임이 보이지 않자 기분이 가라앉았다. 장서열이 있는 한 전하께 더 이상 금용은 필요치 않았다. 소리자는 멍청하게 장서열을 건드린 금용을 탓해야 할지, 아니면 속 좁게 구는 장서열을 욕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일개 태감인 그는 감히 상전을 거스를 수 없었다. 그리하여 소리자는 그대로 조용히 상전의 시중을 들었다.

    구염락이 장서열을 살짝 잡으며 말했다.

    “서열아.”

    순간 장서열이 비몽사몽한 얼굴로 구염락을 쳐다보다가 촛불에 시선을 돌리며 일어섰다.

    “시간이 많이 늦었으니 이만 쉬세요. 내일도 일찍 조회에 드셔야 하니까요.”

    구염락이 본능적으로 장서열의 옷깃을 잡았다.

    “난 괜찮아.”

    하지만 장서열은 너무나 피곤했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럼 책이라도 좀 보세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다시 움직이려 했지만 마음을 굳게 먹은 구염락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서열아, 여기서 자고 가도 돼. 아니면… 내가 네 처소에서 함께 자도 되고.”

    말을 마친 구염락이 다시 고개를 떨궜다. 그의 얼굴은 푸른 핏줄이 붉게 변할 만큼 홍조로 물들어 있었다.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는 내일도 아침 일찍 조회에 참석해야 했다. 태자와 정전에서 밤을 보내는 건 2품 이상의 비빈이어야 가능하다는 법도를 떠올린 장서열이 구염락의 손을 잡고 말했다.

    “그럼 제 처소로 가세요.”

    구염락의 눈이 이루 말할 수 없이 반짝 빛났다.

    장서열의 처소인 자복궁은 곳곳이 그녀의 취향으로 가득했다. 구염락은 절로 자복궁이 좋아졌다. 그리고 그녀가 자신의 거처도 이렇게 꾸며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무척 피곤했던 그녀는 거처로 돌아오자마자 씻고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구염락은 오랫동안 씻었다. 어딘가 할 말이 가득해 보이는 소리자는 안중에도 없이 그는 곧바로 장서열의 향기를 머금은 이불 속으로 들어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그는 잠이 든 장서열을 바라본 후, 그녀의 향기가 배어 있는 이불로는 성에 차지 않는 듯 조금씩 장서열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와 주먹 하나가 들어갈 정도로 가까운 거리가 되었을 때, 그는 살며시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품에 안긴 채 눈을 감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소리자는 한참을 기다려도 주인이 뒤척이지도, 일어나 약을 먹으려는 기미도 없자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그는 곧 주인이 정말로 잠에 빠진 것을 확인한 후 경악했다.

    한숨을 내쉰 소리자는 보초를 선 명 공공에게 자리를 맡긴 후 재빨리 남소원을 향해 달려갔다.

    남소원은 진작에 엉망이 되어 있었다. 밤새도록 눈물을 흘린 흰색 촛농은 정교한 촛대에 말라붙은 채였다.

    금용의 침실 또한 엉망진창이었다. 구염락이 장서열을 따라 자복궁으로 갔다는 소식을 들은 그녀는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방 안에 있는 모든 물건들을 집어 던졌다.

    “그럴 리 없어! 내가 얼마나 심한 모욕을 당했는지 네놈들이 제대로 전하지 않은 게 분명해! 그 계집이 나를 때렸다고!”

    송 마마는 고개 숙인 금수를 한 번 쳐다본 후, 서둘러 주변에 듣는 귀가 있는지 확인하고 곧장 금용을 다그치기 시작했다.

    “금용!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게냐! 언행을 삼가거라. 그렇지 않으면 또 곤장을 맞게 될 것이다!”

    금용이야말로 정말 돼먹지 못한 계집이었다. 태자의 후궁을 욕하고 있을 시간에 한시라도 빨리 태자께 통방(通房)으로 인정받을 궁리를 하는 게 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줄곧 화만 내고 있으니, 벌써 자신이 상전이라도 된 줄 아는 모양이었다.

    송 마마는 금용이 어리석다는 걸 실감했다. 비천한 출신을 숨길 수 없을 정도로 눈치가 없는 자였다. 그나마 봐 줄 만한 외모가 아니었다면 누구도 그녀를 거들떠보지 않았을 것이다. 심지어 금수는 말로 다 할 수 없을 만큼 호되게 욕을 먹었다.

    화장이 전부 번진 얼굴로 금용은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머리에 꽂았던 장식은 이미 바닥에 던진 후였다. 억울해서 미칠 것 같았다.

    ‘전하께서 어떻게 날 신경 쓰지 않는단 말인가!’

    태자 전하는 분명 그녀를 아껴 주었다. 예전에는 조금만 서러운 일이 생겨도 기꺼이 그녀의 편이 되어 준 전하였다. 금용이 저군전을 제집 드나들 듯해도 막는 이가 없었던 건 다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금용이 인생 최고의 설움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녀를 보러 오지 않았다. 그동안 전하가 자신과 소리자에게 해 준 모든 것이 다 거짓으로 느껴졌다. 전하는 분명 앞으로 아무도 두 사람을 괴롭힐 수 없을 것이고, 고생할 일이 없을 거라 말했었다.

    ‘내가 지금 이렇게 억울한 일을 당했는데! 전하, 어째서 절 보러 오지도 챙겨 주지도 않으시는 건가요? 왜 장서열을 벌하지 않는 거예요!’

    금용은 서럽게 울었다. 전부 다 내던지고 부숴 버리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제일 먼저 던져 버리고 싶은 건 바로 그녀 자신이었다. 그녀는 전하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불쌍한 시녀를 장서열이 얼마나 악랄하게 괴롭혔는지 전하께서 확실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금용은 자신의 기구한 팔자를 한탄했다. 이제는 볕을 볼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두들겨 맞다니. 울면 울수록 세상으로부터 버림받은 기분이었다.

    당황한 건 송 마마도 마찬가지였다.

    ‘전하께서 어째서 금용을 보러 오지 않는 걸까?’

    그간 태자가 금용에게 잘해 준 것은 결코 거짓이 아니었다. 송 마마는 태자가 언제나 소리자와 금용에게만큼은 관대했던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금용이 이토록 억울한 일을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태자는 얼굴 한 번 비추질 않았다. 송 마마가 아는 한 적어도 태자는 여인에 휘둘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일전에 금용이 귀비가 보낸 여인을 이보다 더욱 심하게 괴롭힌 일이 있었다. 그 일이 알려졌을 때에도 태자는 금용을 두둔하며 오히려 그 여인을 저군전에서 내쫓았다. 그 사건으로 인해 송 마마는 태자와 금용, 그리고 소리자의 관계가 매우 돈독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그런데 이번 일은 어째서…….’

    송 마마는 다시 한번 금수에게 정말로 이야기를 제대로 전한 것이 맞는지 물어보고 싶었다. 똑바로 전달을 했다면 대체 태자가 왜 금용을 보러 오지 않는 건지 궁금했다.

    그러나 송 마마는 금용이 혹시 더한 충격을 받지는 않을까 염려되어 굳이 금수에게 자세히 묻지 않았다.

    갑자기 방문이 벌컥 열렸다. 다급한 얼굴의 소리자가 뛰어들었다. 먼지를 몰고 들어온 그의 이마에는 땀이 송글송글 맺혀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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