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80)화 (180/449)
  • 제180화

    장서열은 일순간 머릿속에 먹구름이 끼는 걸 느꼈다.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이 막막한 상황에서 무엇보다 그녀를 무섭게 만든 건 정말로 구염락의 귓가가 붉게 물들었다는 사실이었다.

    그녀는 차갑게 얼어붙은 마음과 후들거리는 두 다리를 진정시키려 애썼다. 구염락이 자신에게 이런 마음을 품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입궁 후 장서열의 계획은 하나뿐이었다. 부디 과거의 정을 생각해 궁에서 편히 늙어 죽게 해 달라고 그에게 부탁하는 것. 그녀는 곁에 수많은 미인을 둔 구염락이 설마 자신에게 관심을 가질 거라 생각지 않았다. 그리고 자신은 구염락에게 특별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없었다.

    두려움에 온몸이 떨릴 지경이었다. 구염락이 쑥스러워할수록 장서열은 더욱 질겁했다. 손발이 차가워지고 있었다.

    ‘그럴 리가! 구염락이 그럴 리 없어!’

    심지어 전생에서 금용이 구염락에게 얼마나 지극했던가. 그런 금용에게조차 구염락은 마음을 주지 않았다.

    절대 그럴 리 없었다. 자신이 착각한 게 분명했다.

    “서열아. 앞으로 내가 잘 할 테니 혹시라도 궁을 나갈 생각은 하지 말아 줘.”

    애써 고개를 든 구염락이 조금도 숨기는 기색 없이 간절한 마음을 드러냈다. 반짝이는 그의 눈에 장서열은 그야말로 뚜껑이 열리는 기분이었다. 설마가 사실이었다.

    ‘구염락이 나를 좋아하고 있었어!’

    오랫동안 욕지거리를 해본 적이 없었지만 지금 이 순간 장서열은 할 수 있는 모든 욕을 쏟아내며 큰 소리로 깔깔 웃고 싶었다.

    ‘구염락, 드디어 네게도 이런 날이 오는 구나! 네 놈이 나를 원하는 날이 왔어! 전생에서는 네가 날 못살게 굴었으니 이제부터는 본궁이 널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그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소리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장서열은 이성을 잃지 않았다. 복수의 기쁨 같은 건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이미 서풍엽과 남모르는 추억을 가진 여인이었다.

    ‘과연 구염락이 자신의 여인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걸 용인할 수 있는 사람일까?’

    장서열은 구염락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라면 홧김에 자신을 죽여 짐승의 먹이로 준다 해도 놀랍지 않았다. 아니면 그녀의 가족과 서풍엽까지, 그의 심기를 거스른 사람을 모조리 박살 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녀는 전생에서 우연히 목격했던 장면을 떠올렸다. 그날 밤, 구염락은 차분한 얼굴로 그가 총애하던 후궁을 땅 속에 묻었다. 여인의 몸부림은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처음부터 끝까지 구염락에게서는 어떠한 표정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열은 서글프게 웃었다. 하늘이 다시 한번 자신을 죽이려는 듯했다. 전생의 고통을 다시 겪게 하고, 구염락에게 버림받은 자신을 냉궁에 가둔 채 어머니와 오라버니가 겪을 참상을 다시 보게 하도록…….

    “서열아.”

    장서열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구염락의 초조한 눈빛 아래 그녀는 당장이라도 그의 목을 조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렇다면 자신은 늙어 죽을 때까지 혼자 궁에서 지낼 수 있을 것이고, 아무도 자신의 운명을 갖고 장난칠 수 없으리라.

    그녀가 차갑게 손을 거두었다.

    “난 설련(雪莲)을 좋아하지 않아요!”

    ‘네가 지금 이런다고 내가 눈물이라도 흘리며 고마워할 줄 알아?’

    장서열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적어도 구염락에게만은 빚진 게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더욱 짜증나는 건 그녀가 전생에서 쌓은 원통함과 답답함을 지금 당장 해소할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순간 어안이 벙벙해진 구염락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다급히 말했다.

    “좋…아하지 않으면 어쩔 수 없지! 설련 따위는 잊어. 다시는 보지 말자.”

    ‘화내지 마. 착하게 굴게. 다시는 널 만지지 않을게.’

    구염락은 자신의 손을 베어 버리고 싶었다. 그녀를 화나게 한 몹쓸 손이었다.

    구염락은 점점 더 고개를 깊이 숙였다. 차라리 먼지가 되어 그녀가 조금 전 자신이 저지른 무례를 잊게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오히려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난 나머지 눈앞의 의자를 던져 그를 죽이고픈 심정이었다.

    ‘무고한 척 동정심이라도 얻겠다는 거야? 수작 부리지 마! 전생에서처럼 내 영혼이 조각나도록 오만하고 냉정하게 굴란 말이야!’

    그래야만 그를 가지고 놀며 복수할 수 있을 것이다. 장서열은 구염락이 사랑에 배신당한 채 다시는 애지중지하는 여인을 얻을 수 없도록, 그리하여 사무치게 절망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생각만 해도 짜릿했다.

    ‘네가 감히 다시 날 냉궁에 가둘 수 있는지, 내 딸을 또 한스럽게 죽일 수 있는지 똑똑히 지켜보겠어. 날 개미처럼 짓눌러 죽일 수 있는지, 감히 내 사랑을 독사의 맹독처럼 여길는지도!’

    문득 그녀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전생에서 태감과 보낸 하룻밤이었다.

    ‘구염락, 난 이번 생에서 네게 고통을 주고 배신까지 추가할 작정이야. 어때, 대단하지 않아? 너도 죽도록 아프겠지? 냉궁에 처박혀 있던 나처럼 말이야!’

    장서열은 황가의 모든 사람들에게 알게 해 주고 싶었다. 그들이 두 번의 생에 걸쳐 자신에게 씌운 멍에가 어떠한 것인지를.

    그녀의 바람은 그저 조용히 여생을 보내는 것뿐이었다. 어째서 자신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는 건지, 왜 다시 그들의 비위를 맞춰야 하는 건지 원망스러웠다.

    “뭐해요? 어서 가서 씻어요.”

    그 말이 구염락을 기쁘게 만든 듯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지체 없이 욕실을 향해 달려가던 그가 문득 두려운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떠…나지 않을 거지?”

    아기 고양이처럼 연약한 눈이었다. 가련한 말투에는 애원과 바람이 가득했다.

    장서열이 반쯤 기울였던 머리를 들었다. 반짝이는 촛불 아래 희고 보드라운 뺨이 부드럽게 빛났다. 그녀가 유달리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가세요. 전 떠나지 않아요.”

    긴장한 구염락의 얼굴에 즉시 미소가 떠올랐다. 안심한 모습은 흡사 먹이를 얻은 강아지 같았다. 웃으며 뒤돌아선 그가 더는 지체하지 않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욕실이 닫히는 소리가 들린 후 다리에 힘이 풀린 화 마마는 비로소 바닥에 풀썩 주저앉았다. 과거 두 사람이 어떤 사이였든 태자에게 그런 태도로 말하는 건 죽음을 자초하는 짓이었다. 남자란 자고로 부드럽게 달래어 손에 넣어야만 진정 내 것이 되는 존재가 아닌가.

    멀찌감치 떨어진 농교와 완정은 감히 아가씨에게 다가가지 못했다. 그들은 장서열을 마치 살짝만 건드려도 터질 화약처럼 여기고 있었다. 이 모습을 본 화 마마 역시 눈치껏 함부로 나서지 못했다. 태자에게까지 불호령을 내리는 양원을 교육시키려 들었다간 늙은 노비에게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이럴 때 태자 전하의 뒤를 따라가지 않고 뭐하는 것인가!’

    화 마마는 양원이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물론 소리자는 태자와 함께였다. 그는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그저 멍하니 넋을 놓은 구염락의 목욕 시중을 들고 있었다. 그는 마음이 불안해 견딜 수가 없었다.

    장서열은 맥이 빠진 모습으로 의자에 앉아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누구도 그녀의 심중을 헤아리지 못했다.

    그녀는 그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다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서풍엽에게 자신을 맡길 것이다. 단지 그녀는 자신을 무력하게 만드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오늘 구염락은 궁에서 안락한 노후를 보내고자 했던 그녀의 소박한 바람을 산산조각냈다. 그녀는 자신의 매력에 조소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거듭 감사한 마음으로 전생에서의 일은 과거로 묻어두고, 미래의 황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잘못을 인정해야 하지 않을까?

    장서열은 피로감을 느꼈다. 편안히 보낼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번 생조차 결국 또 같은 소용돌이에 빠져 버렸다. 그것도 최악의 모습으로.

    ‘정말 우습군.’

    갑자기 머리가 지끈거렸다. 너무 아파서 화가 났다. 차라리 전처럼 누군가를 불러다 발길질을 하고, 따귀라도 몇 대 후려치면서 원인 모를 화를 분출하고 싶었다.

    쨍그랑!

    가벼운 쟁반이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장서열의 정신이 돌아왔다. 망연한 얼굴로 밝은 대전을 바라보던 그녀는 잘못을 범한 후 바닥에 꿇어앉아 벌벌 떨고 있는 그림자를 쳐다보았다. 그녀의 시선이 바닥에 꿇어앉은 시녀에게 고정되자 겁을 먹은 시녀는 점점 더 심하게 떨었다.

    장서열은 시녀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몸부림치면서 살고 싶어하는…….

    계속해 시녀를 바라보던 장서열의 눈에 점점 활기가 돌기 시작했다. 순간 기력을 회복한 그녀가 별안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욕실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녀의 눈에는 굳은 결심이 들어 있었다.

    ‘날 타협하게 만들겠다? 이런다고 내가 뜻을 이루지 못할 것 같아? 어림없어!’

    그녀에게 사랑은 없지만 원수는 있었다. 또한 전생에서 많은 빚을 진, 반드시 보호해야 할 가족이 있었다.

    그녀의 겁 많은 딸은 또 어떠한가. 그녀는 딸 상아가 아름답게 성장하는 모습을 봐야 했다. 그리고 이를 망친 나쁜 놈들을 죽여야 할 책임이 있었다.

    계속해 장서열의 뒤를 따라가던 농교와 완정은 욕실 밖을 지키는 유령 같은 시위들에게 저지당했다. 당황한 화 마마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저 두 바보가 양원이 간다고 그대로 따라 들어가려 할 줄이야. 가서 뭘 하려고!’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고개를 든 소리자가 즉시 손을 멈추고 서둘러 절을 올렸다.

    “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그 말에 놀란 구염락은 감히 문 쪽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물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부끄러워하는 빛이 역력했다.

    그 모습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장서열이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그에게 다가간 장서열이 소리자에게 수건을 건네받으며 말했다.

    “사람들을 물려라. 전하는 내가 모실 것이다.”

    소리자는 구염락의 지시를 듣고자 했지만 이미 그는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결국 고개를 숙인 소리자가 사람들을 데리고 물러났다.

    그녀가 탕의 가장자리에 놓인 첫 번째 계단에 올랐다. 백옥으로 만들어진 탕은 뽀얗고 뜨거운 물 외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장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쓴웃음을 지었다. 운명에 농락당한 자의 씁쓸함이 깃든 웃음이었다.

    그녀가 그를 필요로 할 때 그는 곁에 있어주지 않았다. 시간이 흘러 이제는 그가 자신에게 애정을 주고 있었지만 그녀의 마음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굳이 그와의 관계를 전생처럼 악화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앞으로 그녀가 할 일들은 반드시 구염락의 지지가 필요했다. 게다가 구염락의 성격으로 미루어 볼 때 그녀는 많은 부분에서 그의 눈을 피할 수 없을 터였다.

    계단 위로 팔을 올린 장서열이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다 숨이 막혀 죽으면 어쩌려고요. 나중에 역사서에 뭐라고 남겠어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