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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79)화 (179/449)
  • 제179화

    그러나 이번 일은 태자 전하에게도 책임이 있었다. 거북이가 왔대도 이미 도착했을 정도로 늦은 시간이 아닌가. 그러나 완정은 곧 속으로 대역무도한 비유를 한 것을 부끄러워하며 고개를 더욱 낮게 떨구었다.

    어이가 없어 한숨을 쉬던 농교는 꾸벅꾸벅 졸고 있는 아가씨가 안쓰러웠던 탓에 약하게 장서열을 흔들었다. 그러나 무방비 상태였던 장서열은 쾅 소리를 내며 왼쪽 의자에 부딪쳤다.

    놀란 농교가 황급히 다가갔다. 화 마마 역시 놀랐지만 속으로 몰래 기뻐했다. 이제 양원마마는 확실히 잠에서 깼을 것이다.

    “마마, 괜찮으세요?”

    눈물이 핑 도는 걸 느끼며 장서열이 머리를 문질렀다. 너무 아파서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렇게 그를 무료하게 기다리고 있자니 전생에서의 기억이 떠올라 치가 떨릴 지경이었다. 당시 장서열의 거처였던 조로전은 이곳보다도 더욱 촛불이 밝았지만 그 촛불이 다 타버려도 간절히 기다리는 사람은 오지 않았다.

    장서열은 옛일이 다시 반복되고 있음에 탄식했다. 전생에서 그를 기다렸던 이유조차 기억이 나지 않았다. 심지어 그때 느꼈던 긴장과 기대, 버선발로 달려나가 그를 보고파 하던 마음까지 모두 잊었다.

    장서열은 마침내 정신이 들었다. 의자에 부딪쳐 생긴 혹은 정말 너무나 아팠다. 장서열은 농교가 앞으로 다시는 그러지 못하도록 손이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농교가 안절부절못하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 또한 안타까운 마음에 눈시울을 붉히고 있었다. 그 모습에 장서열은 어쩔 수 없이 심통이 난 어린아이처럼 눈을 부라리며 지시했다.

    “나가서 태자 전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 알아보거라. 늦으시는 이유가 있을 게 아니냐.”

    화 마마는 드디어 주인이 잠에서 깨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노비가 가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화 마마가 지체 없이 밖으로 나갔다. 분노한 농교의 시선이 화 마마의 등 뒤에 꽂혔다.

    ‘아가씨가 내게 분부한 일을 가로채다니!’

    화 마마는 이렇게 중요한 심부름을 다른 이의 손에 맡길 수 없었다. 어린 농교가 뭘 알겠는가. 양원을 위해서라도 이번 일은 자신이 직접 나서야 했다. 그녀는 책임을 다하기 위해 설령 태자 전하께서 전전(前殿)에 황제 폐하를 모시러 갔다 해도 그 앞에서 반드시 양원의 존재감을 드러내겠다고 결심했다.

    화 마마는 찬바람을 맞으며 조석궁 밖에 서 있을 준비를 끝냈다. 그러나 뜻밖에도 저군전을 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정원에서 물고기를 구경 중인 태자를 만나게 되었다.

    하늘이 그녀를 돕는 모양이었다. 화 마마는 등을 받쳐든 궁인을 데리고 급히 정원으로 다가갔다. 화 마마를 발견한 소리자 역시 몰래 한숨을 내쉬었다.

    ‘드디어 왔구나!’

    만약 자복궁에서 누군가 오지 않았더라면 오늘밤은 아예 저군전으로 돌아가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소리자가 일부러 모른 체하며 물었다.

    “어라? 전하, 자복궁의 화 마마 같습니다.”

    순간 당황한 구염락은 하마터면 호수에 빠질 뻔했다. 자기도 모르게 옷매무새를 정리하며 뒤를 돌아본 그는 예상과 달리 눈앞에 늙은 궁녀만 있자 오히려 안도했다. 짧은 순간 얼마나 긴장을 했는지 바람이 불자 땀이 식어 몸이 으스스 떨릴 지경이었다. 그는 그런 스스로가 우스웠다.

    화 마마는 눈이 사라질 정도로 환하게 웃으며 공손히 절을 올렸다.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구염락은 그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몸을 돌려 냉랭하게 말했다.

    “일어나라.”

    화 마마는 태자의 쌀쌀맞은 태도에도 아랑곳없이 자못 흥분한 말투로 말했다.

    “태자 전하, 바로 뵈어서 다행입니다. 양원께서 지금 전하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낮에 전하께 성주탕(醒酒汤, 술 깨는 약)을 데워 올린 이후부터 줄곧 전하를 기다리셨지요. 전하께서 오랜만에 궁에 돌아오시어 불편하실 수 있으니 노비에게 전하의 행방을 알아보라 하셨습니다. 이토록 빨리 전하를 찾았으니 양원께서 분명 노비에게 상을 내리실 겁니다.”

    구염락은 ‘전하를 기다린다’는 말을 듣자마자 이미 화 마마에게로 고개를 돌린 상태였다. 눈 속에 떠오른 놀라움이 미칠 듯한 기쁨으로 바뀌기 전, 그는 가까스로 화 마마의 말이 의례적인 인사일 거라 생각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그리고 그제야 용기가 생긴 사람처럼 마침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남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쉰 소리자는 속으로 장 양원에게 탄복했다. 화술 하나만큼은 자신 있는 화 마마는 장서열의 장점과 그를 향한 그녀의 희생적인 마음 등을 줄줄이 읊으며 장서열의 온화하고 어진 면모를 더욱 부각시켰다.

    “마마는 전하께서 돌아오신다는 소식을 들은 후부터 매일같이 저군전을 꾸미느라 근 한 달간 거의 쉬지도 못할 정도였습니다.”

    화 마마의 말에 마침내 기분이 좋아진 구염락이 하루 종일 딱딱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었다.

    “그래?”

    “예. 마마께서는 늘 전하를 생각하고 계시지요. 오늘 전하께서 연경에 도착하신다는 소식을 듣고 새벽부터 일어나 전하의 침전에 부족한 것은 없는지 계속해 살펴보라고 재촉하셨습니다.”

    화 마마의 이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구염락의 표정은 더욱 부드러워졌다. 그가 다시 안정적으로 걷기 시작했다. 화 마마의 말에 그는 새삼 자신의 지위를 상기했다. 그는 더 이상 장서열이 자신을 싫어할까 봐 두려워하거나 감히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지 못하던 예전의 구염락이 아니었다.

    이제 이곳은 자신의 처소였고 그 안에는 자신의 서열 누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구염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편안함과 만족감을 느꼈다. 자복궁으로 가는 길 내내 화 마마는 쉬지 않고 그를 만족시킬 만한 말들을 쏟아 냈다.

    걷다가 멈추기를 반복하던 소리자는 이제 빠른 걸음으로 전하의 뒤를 쫓았다. 전하가 움직이는 속도는 마치 전하의 긴장을 그대로 대변하는 것 같았다.

    잠시 후, 휘황찬란한 등불이 비친 대문 앞에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설레는 그림자가 보였다. 문설주에 몸을 기대고 선 그녀가 이쪽을 멀리 바라보고 있었다.

    밤의 장막 아래 그녀의 그림자는 유난히 뚜렷해 보였다.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연청색 치마는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물결을 일으켰다.

    어느 순간, 그림자가 매혹적인 자태로 절을 올렸다. 옅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이 보였다.

    소리자는 구염락에 맞추어 다시 발걸음을 우뚝 멈췄다. 잠시 침묵이 이어진 뒤, 갑자기 구염락이 쏜살같이 앞으로 달려 나갔다. 눈 깜짝할 사이 소리자의 눈앞은 텅 비어 있었다.

    구염락이 장서열 앞에 섰다. 아름답고 온화한 서열 누님 앞에 서자 그는 조금 전까지 찬란하고 냉담하던 모습을 유지하기가 힘들었다.

    “서…….”

    자기도 모르게 멈칫한 그가 고개를 숙였다. 옷자락을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꼭 과거 그녀의 뒤를 쫓아다니던 꼬마와 같았다.

    “서열아.”

    순간 ‘누님’이라는 두 글자를 과거 속으로 던져버린 구염락이 대담하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장서열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한동안 그 상태로 멍하니 서 있었다. 한참이 지난 후, 장서열은 어딘지 모르게 잔뜩 긴장한 구염락 앞에서 평소의 여유로운 태도를 되찾았다.

    “돌아오셨군요.”

    구염락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용이 수놓아진 옷자락을 손가락으로 부여잡으며 속으로 기뻐하고 또 기뻐했다.

    그러나 이내 그는 어색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자신은 지금 태자였고, 앞에 선 여인은 자신의 비()였다. 계속해 이런 모습을 보인다면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을 것이다.

    구염락은 소심한 스스로를 타박하면서도 자꾸만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는 자연스레 서열 누님의 뒤에 서서 온순하게 행동하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녀의 시중을 제대로 들지 못할까 걱정하고, 그녀에게 버림받을까 걱정하던 그날처럼.

    장서열은 구염락의 모습을 보며 딱딱하게 굳은 입꼬리를 위로 끌어당기기 위해 노력했다. 뜻밖에도 미소를 짓는 건 어렵지 않았다.

    “힘드셨죠?”

    구염락은 무의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이다가 얼른 다시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모습에 소리자가 휘둥그레진 두 눈으로 입을 떡 벌렸다.

    화 마마는 생전 처음 보는 태자의 모습에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저 분이 정말 용맹하게 전장을 누비고 돌아온 그 태자 전하가 맞는 걸까?’

    장서열은 마음을 다잡으며 재빠르게 구염락의 현재에 적응했다. 전장에서 돌아온 그가 이렇듯 온화한 태도를 보일 수 있다는 데 놀란 건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낯선 모습이 주는 이질적인 느낌에서 서둘러 빠져 나오고자 했다.

    그녀에게 익숙한 건 언제나 자신을 멸시하던 구염락이었다. 전생에서 그는 미움과 불쾌함, 그리고 귀찮은 기색을 역력히 드러내며 그녀를 찾아왔다가, 다시 잔인하고 냉정하게 떠나 버렸다. 그리고 아무리 애원해도 절대 뒤돌아보지 않았다.

    장서열은 이번 생에서 기울인 노력 덕분에 그가 과거처럼 자신을 미워하지는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구염락은 과거 자신이 베푼 은혜를 생각해 궁에 놀고먹는 한량 한 명쯤 키우는 건 괜찮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순간 자기가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던 장서열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가세요.”

    장서열이 돌아서자 구염락이 그 뒤를 따랐다. 구염락의 시선은 옆으로 늘어뜨린 장서열의 손을 향해 있었다. 희고 투명한 손가락은 가끔씩 연청색 옷깃에 닿을 때마다 더욱 고운 빛을 발했다. 단정한 손톱마저 아름다웠다.

    이를 뚫어져라 바라보던 구염락이 홀린 듯 손을 내밀었을 때였다. 돌연 손을 거둔 장서열이 다시 뒤를 돌아 손에 든 손수건을 어루만지며 그를 보고 웃었다.

    “연회가 열리긴 했지만 배불리 드시지는 못하셨겠지요. 제가 주방에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러 놓았으니 우선 목욕부터 하세요. 나올 때쯤이면 다 준비되어 있을 거예요.”

    장서열이 앞으로 가지런히 손을 모았다. 구염락은 실망한 눈빛으로 이를 바라보았다. 오래도록 바라온 것을 향한 애틋한 미련이 어린 눈이었다.

    “네… 네게 보여주려고 서북 지방에서 설련(雪莲, 꽃)을 가져왔어……. 그러니까 내가 너무 늦게 돌아왔다고… 원망하지 않았으면 해.”

    말을 마친 구염락이 결국 대담하게 용기를 냈다. 고개를 숙인 그가 장서열의 손을 끌어당겼다. 그토록 간절히 원해 온 손이었다. 그는 서풍엽이 독점했던 자리를 빼앗고 싶었다.

    ‘서열이는 내 것이다!’

    장서열의 손을 잡은 그가 마침내 먹이를 발견한 새끼 늑대처럼 기쁘게 웃었다. 사나운 얼굴과 대비되는 부드러운 손길이었다. 붉게 뺨을 물들인 구염락은 아이처럼 그녀의 손을 잡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장서열은 놀라서 얼어붙었다. 순간 그녀가 느낀 감정은 공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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