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8화
태자의 환궁 소식을 들은 금용은 며칠 전부터 저군전을 청소하는 이들에게 태자의 물건을 꺼내 놓고 태자가 좋아하는 음식을 준비하라고 지시했다. 전에는 알아서 상황을 보고하던 하인들은 이제 한 명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를 대신해 저군전 총괄을 맡게 된 금서조차 태자의 환궁을 앞두고 그녀에게 조언을 구하러 오지 않았다.
송 마마는 장 양원이 저군전을 장악했으며, 하인들이 모르는 것을 전부 그녀가 알려주고 있다고 전했다. 대체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알 수 없었으나 이미 장 양원의 충실한 개가 된 노비들은 과거 태자가 그녀와 몹시 가까운 사이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장 양원은 태자의 취향을 꿰고 있으므로 이제는 누구도 금용을 찾을 필요가 없었다.
금용의 마음에는 새로운 원한이 쌓였다. 정말이지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태자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로 했다. 그가 아주 교활하고 독선적인 여인을 후궁으로 맞이했다는걸!
조로전의 권여아 또한 미리 단장을 마쳤다. 넓은 소매의 가을 옷을 걸친 그녀는 선녀처럼 낭만적인 분위기를 자아냈다. 방 마마는 무척 기뻐했다.
“아가씨, 정오에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면 곧바로 황후마마께 문안인사를 드리러 올 겁니다. 황후마마께서는 특별히 아가씨께 차를 내오라 하셨지요. 아가씨는 환궁한 태자 전하께서 가장 처음 만나는 여인입니다. 황후마마의 뜻을 아시겠지요?”
권여아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다. 볼이 온통 새빨갰다.
방 마마는 매우 잘 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근 일 년 동안 변경에 머물며 여인을 보지 못한 태자가 환궁하자마자 어여쁜 권여아와 마주친다면, 비록 그녀를 좋아하지 않더라도 반드시 그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권여아 역시 진심으로 기뻐했다. 그녀는 언제나 상냥한 모습을 보여주던 태자가 전장에 나가 용맹하게 싸우고 돌아오는 모습을 상상했다. 그럴 때면 안개로 자욱하던 마음이 떨리곤 했다. 모든 소녀들은 영웅을 꿈꾸는 법이다. 하물며 그 영웅이 당대의 태자라면 권여아의 가슴인들 뛰지 않을 이유가 없었다.
연경으로 대군이 도착했다. 그들의 갑옷은 떠날 때처럼 예리하게 번쩍이지 않았다. 하지만 승리를 안고 돌아온 그들의 패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 선두에 구염락이 있었다.
연경으로 돌아온 구염락의 머릿속은 뭇 신하들처럼 복잡하지 않았다. 문치(文治, 문덕을 위주로 하는 정치)와 무치(武治, 군사력을 위주로 하는 정치)에 대한 고민도 없었다. 그의 가슴을 채운 건 오로지 두려움과 기대감뿐이었다.
몰려든 수많은 인파 속에서 구염락은 자기도 모르게 그리운 얼굴을 찾다가 문득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녀는 마음대로 바깥출입을 할 수 없었다.
용포를 걸친 황제는 가을 햇빛 아래 천자의 위엄을 떨치고 있었다. 평소 안일할 정도로 평온하던 눈빛은 지금 이 순간 자부심과 긍지로 가득했다. 그의 아들은 동남 지역부터 서쪽 변경까지 주변국 절반의 변경을 정복하고 돌아왔다. 자랑스럽고 또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구염락은 수많은 군대 앞에서도 결코 흐트러짐 없이 태자의 위엄을 드러냈다. 그는 마땅히 원하는 것을 가질 자격이 있었다.
황제는 아직 나이 어린 태자에게 첫 번째로 소유욕을 일깨운 사람이 바로 장서열이라는 것을 알았다. 허나 그는 나중에 깨닫게 될 것이다. 천하의 모든 것을 손에 쥔 천자에게 오직 한 여인을 바라볼 만한 시간은 없을 거라는걸. 구염락이 추구해야 할 것은 눈부신 업적과 역사에 길이 남을 족적이었다.
무릎을 꿇은 신하들은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을 지경이었다. 언제나 은은한 미소를 보여 주던 온화한 태자는 전쟁터에서 아수라(阿修罗, 불교에서 제석천과 싸우기를 좋아하는 귀신)가 되어 돌아왔다.
각양각색의 깃발이 바람에 휘날렸다. 술잔이 전해졌고, 문무백관의 찬사와 제왕의 호방한 축사가 이어졌다. 아름다운 무희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얼굴로 아래에 앉아 있었다. 덕분에 평소 그와 친분이 있다고 자부하던 관원들조차 감히 그에게 다가가 술을 권하지 못했다.
현천기는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 앉아 오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웃었다. 그 모습은 상당히 괴기스러웠기에 주변에 있던 사람들은 자연스레 그에게서 멀찌감치 떨어졌다. 물론 현천기에게는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현천기가 믿는 건 오로지 자기 자신뿐이었다.
현천기가 과실주로 입술을 축였다. 석회를 발라놓은 듯 창백한 얼굴이 씨익 웃자 당장이라도 석회 가루가 후두둑 떨어질 듯했다. 결국 그나마 그와 가까운 자리에 있던 관원까지 자리를 옮겨 버렸다.
현천기의 눈에 태자가 들어왔다. 문무백관에 둘러싸인 구염락은 겉보기에는 침착하고 위엄이 넘쳐흘렀지만 현천기만은 알 수 있었다. 태자는 분명 심기가 불편했다.
그의 심란함을 간파한 현천기가 편안한 마음으로 몰래 웃음 지었다. 이 얼마나 아름답고 공평한 세상인가. 역시 하늘은 그의 편이었다.
현천기는 태자가 좀 더 패기 있게 굴기를 바랐다. 당장이라도 저군전에 달려가 장서열을 안는다면 그는 곧 사랑하는 여인이 이미 다른 남자의 여인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현천기는 충격에 휩싸인 태자의 얼굴이 미치도록 보고 싶었다. 이는 분명 아름다울 것이고, 하늘이 내린 영웅 구염락에게 큰 타격이 될 터였다.
현천기는 생각만 해도 통쾌했다. 장서열은 여러모로 참 사랑스러운 아가씨였다. 오늘 대주국 관원들이 전부 숨 한번 제대로 쉬지 못하는 건 전적으로 그녀 덕분이었다.
충왕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어 보였다. 한쪽 팔이 반쯤 사라진 것을 제외하면 모든 게 여전했다. 결과적으로 무사히 돌아왔기 때문인지 아들의 일도 그에게는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 듯했다. 그는 여전히 시원시원하게 술을 마셨고, 황제에게 술을 올리는 평이한 모습으로 색다른 구경거리를 기대하던 관원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었다.
축하연은 하루 종일 이어졌다. 사람들은 저녁이 되면 피곤에 못 이긴 태자가 곧장 쓰러져 잠이 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평상복으로 갈아입은 후, 조로전에 들러 황후에게 문안인사를 드리고 나온 구염락의 머리는 오히려 더욱 맑아져 있었다. 훤칠한 키에 단정히 머리를 묶은 그는 낮에 보여준 차갑고 딱딱한 모습을 덜어내고 누구든 그를 사모하게 만들 만큼 상냥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소리자는 어두워지는 하늘을 보며 천천히 구염락의 뒤를 따랐다. 구염락의 발걸음이 늦어질수록 소리자 역시 발걸음을 늦췄다. 감히 재촉할 수도, 소리를 낼 수도 없었다. 소리자는 심란한 태자 앞에서 더욱 자중하고자 했다. 그는 장서열이 저군전에 들어왔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의 주인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조금 전 조로전에서 권여아가 무슨 짓을 해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던 구염락은 오로지 장서열로 인해 안절부절못하고 있었다. 전하는 아마도 도망가고 싶은 심정일 것이다.
“소리자. 폐하께서 나를 부르시진 않았느냐?”
“예, 전하. 말씀 없으셨습니다.”
“그래…….”
구염락의 발걸음은 점점 더 느려졌다. 이제껏 그의 시선을 끌지 못하던 풍경이 오늘따라 유난히 아름다워 보였다. 봐도 봐도 질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소리자는 행여나 주인보다 앞서 걷는 실수를 저지를까 두려워 신경을 바짝 곤두세웠다.
궁에 걸린 화려한 등불이 휘황찬란한 빛을 발했다. 어린 태감들은 등을 일렬로 배치한 후 다시 빠르게 물러갔다. 순식간에 길 전체가 등불로 가득 찼지만 구염락은 채 몇 걸음도 움직이지 않았다.
소리자의 이마는 땀범벅이 되었다. 차라리 아예 걷지 않다가 필요할 때 걸음을 옮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장서열을 향한 태자의 마음에 소리자는 오늘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만사에 무심할 뿐만 아니라 그 살벌한 전쟁터에서 눈 한 번 깜짝하지 않던 전하께서 이렇게 어쩔 줄 몰라 하다니…….
등불로 빛나는 호수의 수면을 바라보던 소리자가 살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금용은 초혜전 시절 장서열이 남자들과 함께 노닥거리며 전(前) 태자와 세자까지 꼬신 질이 나쁜 여인이라고 했다.
소리자는 머릿속이 어지러워 태자에게 무어라 운을 떼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는 태자가 심란해 하자 결국 금용이 말하라고 시킨 장서열에 대한 소문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저군전에 걸린 양초는 밝은 빛을 내며 타오르고 있었다. 저군전 대청 전체를 밝히는 데 필요한 양초는 한 개로 족했으나 현재 저군전에는 무려 스무 개가 넘는 양초가 켜져 있었다. 덕분에 대청은 대낮처럼 환했다. 바닥에 기어 다니는 개미까지 볼 수 있을 정도였다.
고개를 숙인 장서열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피곤한 얼굴로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슴에 드리워진 머리카락이 그녀의 얼굴에 비치는 불빛을 막아주었다. 그녀는 연청색 치마와 허리에 큰 나비매듭이 지어진 비단을 두르고 있었다. 허리 뒤로 늘어진 매듭은 그녀의 발치까지 떨어졌다. 백합이 수놓아진 하늘색 겉옷은 소매에 걸려 오묘한 광택을 발산했다.
장서열은 몹시 졸린 채로 구염락을 기다렸다. 낮부터 이상하게 피곤했다. 그대로 자고 싶었지만 태자가 조로전을 나왔다는 전갈을 받은 이후에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다. 그녀는 농교에게 자신을 꼬집게 하면서까지 최대한 정신을 차리려고 애썼다.
농교에게 꼬집힌 장서열이 몽롱한 눈을 깜박였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그녀가 턱 아래 받친 손을 내리고 다시 단정하게 자세를 바로잡았다. 그리고 조금 뒤, 장서열은 다시 졸기 시작했다.
이쯤 되자 농교는 완정의 멱살을 쥐고픈 심정이었다. 대체 얼마나 많은 양을 넣었기에 벌써 두 시진 전에 목욕도 하고 옷도 갈아입은 아가씨가 아직까지 잠에 허덕인단 말인가. 물론 완정에게 알아서 향의 양을 조절하라고 한 건 농교 자신이었지만 예쁘게 단장을 마치고 앉아 있는 아가씨가 태자를 보고도 졸게 된다면 그때는 정말 큰일이었다.
화 마마 역시 초조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는 직접 장서열을 꼬집어 당장 정신을 들게 하지 못하는 게 한이었다. 만일 다른 궁의 주인이었다면 마마들은 절로 눈이 번쩍 뜨이도록 주인을 깨워 놓았을 것이다.
하지만 화 마마는 장 양원이 하인들을 다스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에 감히 직접 나설 수 없었다. 게다가 이곳은 태자의 처소였고, 그의 하인들이 지켜보고 있는 자리였다.
‘농교 이 망할 계집은 더 세게 꼬집지 않고 뭘 하는 게야! 후궁이 이렇게 졸고 있다는 걸 혹여나 태자 전하께서 보게 된다면 어찌한단 말인가!’
이는 태자를 기다리는 게 지루하다고 소리치는 꼴이었다.
완정은 자책하며 고개를 숙였다. 이마가 거의 가슴팍에 닿을 것 같았다. 그녀는 당장 쥐구멍이라도 찾아서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완정은 혹시라도 아가씨가 도망갈 것을 염려해 조 부인이 준 안신향을 모두 향로에 쏟아 부었다. 하지만 약효가 이렇게 강할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