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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77)화 (177/449)

제177화

그뿐만이 아니었다. 심지어 조옥언의 소생들은 현재 모두 큰 영광을 누리는 중이었다. 장서열은 입궁을 했고, 장서전은 전쟁에서 공을 세웠다. 과거 장서전에게 딸을 주지 않으려 꽁무니를 빼던 가문들은 지금쯤 후회로 땅을 치고 있을 터였다. 마치 지금 그의 모습처럼.

기뻐하던 장신성은 자신의 비루한 처지를 떠올리자 다시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장서열은 이제 쉽게 만날 수 없었고, 장서전은 아직 전장에서 돌아오지 않았으니 두 아이에게 효도를 바라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는 이 시기를 견뎌내고 태자가 돌아오면 금세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믿었다. 태자가 자신을 모른 척할 리 없지 않은가. 그는 명실공히 태자의 장인이었다. 이 생각만 하면 장신성은 절로 힘이 솟았다.

장신성은 청산지주 관 노야와 나눈 혼담을 떠올렸다. 관 노야는 아들의 첩실로 장서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장신성은 솔깃했다. 그는 무엇보다도 관 노야와 함께 혼수를 논의하고 싶었다.

장 씨 가문은 현재 첩실을 팔아 생계를 유지하는 형편이었다. 이는 입 밖으로 낼 수 없을 만큼 떳떳하지 못한 일이었지만 딸을 시집보내며 혼수를 받는 문제는 달랐다. 연경에서 제일가는 부호인 관 씨 가문에 딸을 시집보낸다면 최소한 십만 냥은 혼수로 받을 수 있을 터였다.

지금 장신성에게 십만 냥은 어마어마한 금액이었다. 그 돈이면 더는 집안 여인들의 눈치를 보는 일도, 조옥언에게 용서를 구할 필요도 없었다. 어쩌면 그 돈으로 지금의 관직을 지키고 몰락한 인생을 조금이나마 끌어올릴 수 있으리라.

장신성은 흔들렸다. 진위여부를 알 수 없는 기 씨의 귀인을 기다리며 차일피일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장서영을 빨리 관 씨 가문의 첩으로 보내는 편이 나았다. 애초에 서녀가 정실부인 자리를 원하는 것부터가 말이 안 됐다.

게다가 장신성에게는 이미 입궁한 딸이 있었다. 이것이 그나마 조정에서 그의 체면을 봐주고 있는 이유였다. 그러므로 장신성은 더 이상 장서영에게 희망을 걸 필요가 없었다. 그 아이는 분수에 맞게 얌전히 관 씨 가문에 시집을 가는 것으로 본분을 다해야 했다.

사실 관 노야의 아들이 반한 사람은 문회에서 깜짝 놀랄 만한 춤을 선보인 장서열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나 넘볼 수 있는 여인이 아니었다.

별다른 방법이 없자 관 노야는 꿩 대신 닭으로 장서열의 이복동생이자 외모가 예쁘장한 장서영을 첩으로 들이고자 했다. 장신성과 혼수 이야기를 마친 관 노야는 추후 길일을 택하여 장서영을 맞이할 가마를 보내겠다고 약조했다.

소식을 들은 장서영은 오후 내내 울었다.

“전 관 씨 가문의 첩이 되기 싫어요. 싫다고요… 어머니, 제발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네?”

고개를 떨군 기 씨는 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녀는 다시 한번 국암사에 있는 약연(若然, 구염락의 친모)을 찾아가 자신의 딸을 거두어 주겠다는 확답을 받았지만, 약연은 여전히 산에 갇혀 있는 신세였다.

게다가 기 씨는 사실 관 씨 가문이 꽤 마음에 들었다. 관 노야의 아들은 그녀도 본 적이 있었다. 괜찮은 사람이었고 재물도 넉넉하니, 딸이 그 집에 들어가면 적어도 고생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생활고에 짓눌린 기 씨는 과거의 여유로운 모습을 모두 잃은 채였다. 그녀는 하루빨리 딸을 출가시켜 혼수로 좋은 음식을 먹고 두 아들의 학비를 대고 싶었다.

장서양과 장서목도 입을 다물었다. 할 말이 없었다. 그들은 누이동생이 받아온 혼수로 중단한 학업을 잇고자 했다. 현재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사실 첩으로 시집가는 건 그리 나쁜 일도 아니었다. 물론 누이동생이 집안을 장악할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게 아닌가.

장서영이 어머니와 두 오라버니를 바라보았다. 모두들 침묵으로 혼인을 종용하는 모습을 보자 순간 울컥한 그녀가 자신도 모르게 소리쳤다.

“어머니, 정말 너무하세요! 조옥언조차도 제 혼처가 상인 집안이면 설령 정실부인 자리라도 거절을 했는데, 심지어 어머니는 저를 상인 집안의 첩으로 시집보내려 하세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요!”

기 씨에게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바로 자신과 조옥언을 비교하는 일이었다. 화가 치민 기 씨가 소리를 질렀다.

“조옥언? 그렇게 좋으면 널 첩실로 만들지 않을 그 고상한 여자에게 가거라! 아예 그 계집의 딸로 태어나지 그랬니?”

말을 마친 기 씨는 화가 나서 씩씩대며 자리를 떠났다. 장서양이 불쾌한 시선으로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너야말로 너무하는구나.”

말을 마친 장서양은 기 씨의 뒤를 쫓아갔다. 장서목은 난처한 얼굴로 서글프게 우는 누이동생을 바라보았다. 위로해 주고 싶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우… 우리가 잘못했어, 서영아…….”

장서영은 더욱 서럽게 흐느꼈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조옥언은 자신을 달가워하지 않았지만 최소한 첩이 되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친어머니는 자신을 팔아먹은 은자로 배를 채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체 난 뭐지? 어머니는 날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장서영은 애초에 조옥언의 권유대로 헌원상과 혼인하지 않은 것을, 조옥언에게 잘 보이지 않았던 과거가 후회스러웠다. 이제는 더 이상 조옥언의 비호 아래 살 수 없었다.

“서영아…….”

장서영은 장서목을 무시했다. 그녀는 이제야 알 것 같았다. 만약 자신이 먹을 수 있는 음식이었다면 오라버니들은 망설이지 않고 자신을 먹어치웠을 것이다.

조옥언의 보살핌을 받은 소 이랑의 딸은 좋은 혼처를 약속 받았다. 심지어 그녀가 가져갈 혼수까지 조옥언이 책임질 예정이었다.

‘만약 지금이라도 조옥언에게 가서 사정한다면… 시키는 대로 말을 잘 듣는다면…….’

순간 장서영은 결정을 내렸다. 딸을 이리도 함부로 대하는 친어머니라면 그 딸이 의리를 저버리는 걸 탓할 수 없으리라. 장서영은 정정당당한 정부인이 되고 싶었다. 어머니처럼 남에게 무시당하는 첩실이 되어 그녀와 두 오라버니처럼 고개 숙이는 자식을 낳고 싶지 않았다.

“서영아…….”

장서목의 손을 뿌리친 장서영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달려 나갔다. 그녀는 조부(赵府)에 가서 빌 생각이었다. 그녀에게도 희망이 필요했다.

* * *

현재 궁에 태자가 없다는 이유로 황제는 황후의 요청을 단칼에 거절했다. 황후가 무슨 말을 해도 소용이 없었다. 그는 황후를 마치 존재하지 않는 사람처럼 대했다.

황제를 설득하기 위해 황후는 권 노야를 입궁시켰다. 그러나 황제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결국 화병을 얻은 황후는 거의 보름 가까이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했다. 그녀는 황제가 보낸 좋은 약도 받지 않았다.

병상에 누운 황후가 원망스럽게 물었다.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대체 저는 폐하께 뭐였습니까?”

황제가 답했다.

“당신이 눈을 감는 날 효인황후(孝仁皇后)로 추서해 주리다.”

기가 찬 황후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눈을 감을 뻔했다.

* * *

높게 말아 올린 주렴 밖, 아침의 엷은 구름이 몰고 온 가을비가 멈췄다. 비에 씻긴 푸른 하늘 아래 연무가 자욱한 경치가 펼쳐졌다. 백옥으로 쌓은 계단 위에는 소나무와 관목이 울창했다.

화 마마는 오늘 아침 몹시 흥분한 상태였다. 그녀는 쉬지 않고 장서열에게 예닐곱 개나 되는 머리 모양을 해 주었다. 하지만 아무리 옷과 대조를 해 보아도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았다. 모든 것이 다 예뻐 보였지만 또 어딘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오늘은 태자가 대군을 이끌고 연경으로 돌아오는 날이었다. 황제와 문무백관이 친히 나아가 그를 맞이할 것이며, 오후에는 축하연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드디어 태자와 양원이 만나게 될 것이다. 화 마마는 도저히 흥분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녀는 기운 없는 얼굴로 노래도 몇 곡 듣지 않은 채 악사를 물렸다. 창가의 귀비탑에 누운 그녀가 멍하니 상념에 빠졌다. 녹색 융단 위에 늘어뜨린 긴 머리카락은 흑진주처럼 새까만 윤기가 흘렀다.

기뻐하는 화 마마, 진 마마와 달리 농교와 완정은 사뭇 긴장했다. 오늘은 태자뿐 아니라 서풍엽도 함께 돌아오는 날이었다. 그녀들은 혹시라도 아가씨가 성질대로 물불 안 가리고 뛰쳐나가면 어쩌나 염려하고 있었다.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했다.

장서열이 창밖을 바라보았다. 흙의 향기를 품은 바람이 불었다. 가을바람은 여름과 달리 사람을 나른하게 만들었지만 잠이 오지는 않았다.

전해 들은 바에 의하면 이번 전쟁에서 서풍엽이 세운 공은 결코 적지 않았다. 노장의 몸으로 용맹하게 싸운 충왕 역시 마찬가지였다. 충왕 부자는 그간 충왕부를 업신여기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사람들을 다시 두려움에 떨게 했다.

공작새 한 마리가 잠시 버드나무 위에 앉았다가 날아갔다. 동시에 장서열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번졌다. 궁에서는 창밖을 나는 평범한 새 한 마리조차 길조로 취급 받았다. 참으로 따분하기 짝이 없었지만 사람들은 하나같이 맞장구를 쳤다.

그녀는 두 시녀의 걱정처럼 돌발 행동을 벌일 마음이 없었다. 이제 그녀는 서풍엽의 안부를 물을 수 없었다. 이는 황권을 욕보이는 짓이었고, 제아무리 마음 넓은 구염락이라도 용납하지 못할 행위였다.

장서열은 자신에게서 계속해 눈을 떼지 못하는 농교에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서풍엽과 함께하기 위해 열렬히 뛰쳐나갈 이유가 없었다. 그래 봐야 그에게 헛된 희망이나 안겨 줄 뿐이었다.

창밖을 바라보던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그대로 잠이 들었다. 아마도 상심이 과도했던 탓이리라. 농교는 아가씨가 잠들자 향로를 만지작대던 완정에게 몰래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완정은 왠지 쑥스러웠다. 사실 그녀는 시키는 대로 한 것뿐이었다. 혹시라도 장서열이 나쁜 마음을 먹을까 염려한 황제와 조옥언은 미리 완정에게 각자 안신향(安神香, 마음을 안정시키는 향)을 주었다. 완정은 황제의 말은 흘려들을 수 있었지만 딸을 걱정하는 조 부인의 말만큼은 듣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기회를 보다 향을 피웠다.

자복궁은 무척 조용했다. 화 마마는 장서열에게 여러 벌의 옷을 새로 입혀보고 싶었지만 평온하게 잠든 그녀의 얼굴을 보며 그만두었다. 화 마마는 당사자보다 차분하지 못한 자신의 모습에 실소를 터뜨렸다.

저군전은 이미 태자의 환궁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황제의 조석궁과 황후의 조로전에서 미리 사람을 보내어 정리를 도왔고, 금서(锦书)는 금용을 대신하여 모든 일을 총괄했다.

남소원도 일찍부터 단장을 하기 시작했다. 금용은 아직 병상에 누워 있었지만 한 달 동안 요양에 힘쓴 덕분에 다행히 예전의 미모를 어느 정도 회복한 상태였다. 연민을 불러오는 작은 얼굴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애처로웠으며 핼쑥하게 여윈 볼은 누가 보아도 괴롭힘을 당한 기색이 역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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