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6화
잠시 뒤, 구염락의 눈앞에 푸른색 빙산설련(冰山雪莲, 꽃)이 나타났다. 청록색 이파리는 봄의 첫 새싹처럼 연약하고 작았다. 냉기가 감도는 꽃잎 위로 푸른 이파리가 겹겹이 쌓인 모습은 일순간 숨을 멈출 만큼 아름다웠다.
구염락은 마치 눈앞에서 장서열을 보는 것만 같았다. 하늘 가득 차가운 눈발이 춤을 추고 있었다. 그러나 아무리 추운 날씨도 그녀의 따스한 미소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다.
구염락은 얼음 상자에 빙산설련을 조심스럽게 집어넣었다. 서열 누님에게 추위 속에서 피는 아름다운 설련의 자태를 오롯이 보여 주고 싶었다.
“전하, 바람이 불기 시작했으니 어서 떠나야 합니다.”
손바닥만 한 얼음 상자를 챙겨 든 구염락이 일등공과 함께 발걸음을 옮겼다. 그들은 순식간에 빙산에서 모습을 감췄다. 차가운 바람이 불어와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지웠다.
황궁이 가까워질수록 구염락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옷을 걸친 그가 창문을 열고 바깥에 펼쳐진 은백색의 세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미친 듯이 기뻤다. 그러나 지금은 갈수록 마음이 심란했다. 그는 이상할 정도로 주눅이 들어 있었다.
두려움이었다. 그는 자신을 마주한 장서열이 당장이라도 서풍엽을 만나게 해달라고, 다시 서풍엽과 맺어달라고 빌까 봐 두려웠다.
‘나의 서열 누님.’
정말로 그녀가 그리 간청한다면 즉시 그의 심장은 부서질 것이다. 구염락은 차라리 이대로 장서열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은 채 그대로 시간이 멈추기를 바랐다.
장서열이 입궁할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이미 황제는 그녀를 저군전에 들인 후였다. 이를 안 구염락은 혼자 바보처럼 크게 웃었다. 한시라도 빨리 돌아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녀가 외면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이제 그녀는 자신의 손이 닿는 곳에 있었다.
그때만 해도 모든 게 완성된 기분이었다. 세상이 아름다워 보였고, 처음으로 하늘이 자신의 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바깥에서 수레와 말을 정비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일은 곧장 병영으로 돌아갈 것이다.
구염락이 창밖의 달빛을 초조하게 바라보았다.
‘서열 누님… 제발 날 무너뜨리지 않길 바라요…….’
* * *
연경 땅에도 밤의 장막이 드리웠다.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한풀 꺾인 더위를 물리치고 가을 저녁의 서늘함이 감돌았다.
이제 막 열이 내린 금용은 초금(楚锦, 비단의 종류) 이불 위에 엎드려 있었다. 갈라진 입술과 창백한 얼굴은 곧 숨이 끊어질 듯 쇠약해 보였다.
일주일간 고열에 시달린 금용은 어여쁜 모습은커녕 완연한 병자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무리 고운 미인이라 해도 하루에 두 번이나 형벌을 당했다면 견디기 어려운 게 당연했다.
장서열에게 받은 장형이 끝나기 무섭게 황제가 내린 장형이 떨어졌다. 누구도 황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신형사에서는 다시 금용에게 곤장 스무 대를 쳤다. 결국 근육과 뼈를 다친 금용은 적어도 백 일은 자리보전을 해야 일어날 수 있는 몸이 되었다.
금용이 힘겹게 눈을 떴다. 온몸이 축 늘어져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내가… 내가 왜 여기에…….”
이곳은 저군전이 아니었다. 심지어 목소리마저 자신의 것처럼 들리지 않자 깜짝 놀란 금용이 이불을 젖혔다.
“돌아가야 해… 돌아가야…….”
그러나 침대를 내려가려던 그녀의 머리는 다시 베개 위로 떨어졌다. 곁에 있던 송 마마가 얼른 금용을 진정시켰다.
“움직이지 말거라! 물을 갖다 주마.”
“마마님… 여기는 어디예요……?”
“우선 물부터 마시거라. 아무것도 묻지 말고. 깨어났으니 됐다. 지금은 상처를 치료하는 게 우선이야.”
금용은 곤장을 맞은 후 오후부터 열에 시달렸다. 장서열은 사람을 시켜 금용을 남소원으로 보내고 상처를 치료하게 했다. 혼절한 금용은 짐짝처럼 옮겨졌다. 그리고 누구도 감히 자복궁의 주인을 배신한 금용과 함께 쫓겨나려 하지 않았다.
다행히 소리자와 친분이 있는 몇몇 아첨꾼들은 그의 체면을 생각해서 금용을 박대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남소원을 그럴 듯하게 꾸며준 덕분에 금용은 오히려 저군전의 작은 단칸방보다 몇 배는 더 좋은 곳에 머물고 있었다.
금용은 물을 마시고 싶은 기분이 아니었다. 궁에서 밖으로 내보내지는 건 오직 아픈 사람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안… 마실래요…….”
움푹 들어간 눈언저리로 서글픈 눈물이 흘렀다. 빈말로라도 예쁘다 말할 수 없는 몰골이었다.
한숨을 쉰 송 마마가 그녀의 입가에 물그릇을 대어주며 거듭 타일렀다.
“울면 뭘 하느냐. 깨어난 것만 해도 천만다행이다. 듣자하니 내일 태자 전하께서 환궁길에 오르신다는구나. 전하께서 네가 겪은 고초를 알게 되면 분명 널 불쌍히 여기실 게다. 그러니 지금 네가 할 일은 서둘러 기력을 회복하고 다시 이전의 얼굴로 돌아가는 것뿐이다. 절대 자복궁의 뜻대로 되게 해선 안 돼!”
금용이 놀라서 말했다.
“전하께서 돌아오신다고요?”
송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앞으로 한 달 안에 돌아오실 게다. 그러니 오직 회복에 전념하거라. 장 양원은 참으로 겁이 없더구나. 그런 애매모호한 자백 하나로 너에게 장형을 내리다니! 하인 하나 포용하지 못하는 여인이 앞으로 어떻게 후궁들 틈에서 자리를 잡을 수 있겠느냐.”
금용이 이를 꽉 깨물었다. 그녀의 눈 속에는 한이 가득했다. 몸에 남은 상처는 명백한 치욕이었다. 게다가 황제까지 곤장 스무 대를 명했다. 매를 맞고 저군전 밖으로 유배까지 당한 이상 앞으로 그녀는 이전처럼 아랫사람들을 휘두를 수 없었다.
금용은 참을 수가 없었다. 전하는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자신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장서열의 진면목을 알아야 했다. 그가 좋아하는 여인은 어여쁜 외모 속에 독사처럼 악랄한 마음을 품은 자라는걸!
“자, 어서 물을 마시거라.”
송 마마는 혹시라도 금용이 분노한 얼굴로 태자를 맞이할까 걱정이었다. 그녀는 금용에게 적절히 연약한 모습을 보여 역으로 장서열의 잔인함을 더욱 강조하라고 귀띔해 주었다. 게다가 남소원은 태자와 금용이 같은 추억을 간직한 곳이니 여러 모로 태자의 동정심을 불러일으키기에 제격이었다.
“정말 그럴까요……?”
“당연하지. 하지만 계속 그렇게 몸을 돌보지 않으면 태자 전하께서도 널 가엾게 여기지 않으실 거다.”
말을 마친 송 마마가 거울을 꺼내 금용에게 건넸다. 거울에 비친 여인을 본 금용은 하마터면 기절할 뻔했다.
“이… 이게 무슨……!”
송 마마가 자신을 속이고 있는 게 분명했다. 이건 절대로 자신이 아니었다. 이를 본 송 마마가 탄식했다.
“금용, 몸을 잘 돌봐야 한다. 그런 모습으로는 장 양원에게 맞설 수 없다. 미인을 싫어하는 남자는 없단다. 태자 전하도 예외가 아니야.”
얼른 물로 입술을 축인 금용이 쇠약한 얼굴로 송 마마를 쳐다보았다.
“정말 나아질 수 있을까요? 정말로요?”
송 마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금용과 가까운 사이라는 건 이제 저군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었다. 송 마마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금용이 불현듯 무언가 떠오른 얼굴로 송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송 마마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황후도 장서열을 어쩌지 못했다는 뜻이었다.
금용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손톱이 손을 파고들었다. 송 마마가 서둘러 그녀를 진정시켰다.
“우리가 장 양원을 너무 얕보았다. 폐하께서 총애할 뿐만 아니라 황후마마도 그녀를 건드리지 못하니 이제는 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시길 기다리는 수밖에…….”
이럴 줄 알았다면 금용을 부추기지 않았을 것이다. 송 마마는 후회했다.
그러나 따지고 보면 금용은 잘못한 게 없었다. 그저 절약을 위해 식사 시간을 엄수하라고 한 마디 했을 뿐이다. 장 양원이 도리를 아는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 마찰을 피했어야 맞지 않은가. 겨우 제시간에 식사 한 끼 못한 걸 가지고 이리도 큰 소란을 일으키다니!
송 마마는 돌아올 태자가 과연 장 양원을 어떻게 다스릴지 기대를 품었다. 전하는 특히 교만하고 안하무인인 사람을 가장 싫어했다.
* * *
최근 장서열은 더할 나위 없이 편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은 모두 그녀를 조심스럽게 대했다.
그녀는 저군전의 유일한 주인이 되었다. 며칠 전, 장부를 관리하던 진 마마는 결국 장서열에게 열쇠를 내놓았다. 실질적인 권력을 쥔 진 마마가 장 양원에게 잘 보이기 위해 열쇠를 내놓았다는 건 사실상 사활을 건 도박이나 다름없었다.
사실 진 마마는 억울해 죽을 지경이었다. 그녀가 어찌 도박을 원했겠는가. 마음 같아서는 진짜 주인인 태자비라 해도 어림없었다. 그러나 폐하께서 친히 진 공공을 보내 분부한 일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그리하여 진 마마는 애써 속마음을 숨긴 채 마치 마음에서 우러나온 행동인 양 장부에 대한 권한을 태자의 후궁에게 넘겨주었다.
장서열은 궁녀들이 어떤 마음으로 머리를 조아리는지에 대해 전혀 관심이 없었다. 갖다 바치는 권한은 그저 받으면 그만이었다. 이런 건 싫어하는 자의 손에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장서열이 뜰 안을 한가로이 거닐었다. 궁에는 어화원을 제외하고도 정원이 넘쳐났다. 모든 궁에는 저마다 작은 정원들이 딸려 있었다.
장서열은 정자에 앉아 햇빛을 쬐며 창극을 들었다. 천고마비의 계절답게 바람이 시원했다. 여유로운 오후였다.
“남소원의 그 물건은 아직 살아 있느냐?”
농교가 민망한 얼굴로 화 마마를 바라보았다. 화 마마의 주름진 얼굴에 단호한 기색이 떠오르자 농교가 얼른 답했다.
“아가씨… 아니, 양원마마. 궁에서는 점잖게 말씀하셔야 합니다…….”
농교를 힐끗 바라본 장서열이 다시 의자에 몸을 기댄 채 반쯤 감은 눈으로 말했다.
“그 계집은 어찌 됐냐고 물었다.”
농교가 식은땀을 흘리며 화 마마를 바라보았다.
‘그것 보세요,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농교가 답했다.
“하인들이 좋은 약초와 약을 갖다 바치고 있습니다. 이틀 전에 깨어났다고 합니다…….”
장서열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을 감았다. 금용이 쉽게 죽는 건 그녀도 원치 않았다. 천천히 괴롭히다 죽일 것이다. 전생에서 금용이 그러했듯 이번에는 그녀가 금용을 자근자근 밟아줄 차례였다. 어차피 시간은 남아돌았고 할 일은 없었다.
* * *
장신성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이미 재상직을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감찰사는 여전히 그를 주시했고, 집안 관리에 소홀하다는 이유로 틈만 나면 그를 탄핵했다. 집안은 끼니를 잇지 못할 정도로 궁핍해져 있었다. 이제는 그의 5품 관직마저 위태로웠다.
장 씨 가문의 두 부인은 끊임없이 다툼을 일삼았다. 관부에서는 그의 모든 재산을 거두어 조옥언에게 돌려주었다. 그야말로 땡전 한 푼 없어진 장 씨 가문은 과거 풍족했던 날들을 잊을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장신성은 죽을 만큼 후회했다. 그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도대체 왜 기 씨에게 빚을 졌다고 생각했는지, 어째서 기 씨의 소생들만 내 자식이라 여긴 것인지!
조옥언과 이혼을 하다니. 심지어 그녀는 신분뿐만 아니라 어떤 여인들보다 뛰어난 외모를 갖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