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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75)화 (175/449)
  • 제175화

    잠시 뒤, 입을 다물고 있던 자들이 울부짖으며 금용의 이름을 외쳤다. 그들이 얼버무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그들이 자백을 했다는 사실이었다. 위기가 닥쳤을 때 노비들이 이기적으로 제 살길을 찾으려는 건 당연했다. 게다가 새로 자복궁의 주인이 된 양원은 아직 용상에 오르지 않은 태자를 거의 이길 기세였다.

    장서열은 드디어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뭘 멍하니 서 있느냐? 주인을 업신여긴 그 천한 것을 데려다 저군전의 모든 하인들이 보는 앞에서 곤장 사십 대를 쳐라. 누구든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도록 본보기로 삼아야 할 것이다!”

    화 마마는 하마터면 그 자리에서 기절할 뻔했다.

    “양원! 안 됩니다! 금용은 다른 궁녀와 다릅니다. 그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태자 전하의 시중을 든 전하의 측근입니다. 괜히 원한을 샀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태자께서 죄를 물으실 겁니다…….”

    화 마마의 말에 장서열이 빤히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천천히 말꼬리를 흐렸다. 그러나 그대로 주인이 잘못된 선택을 하는 걸 두고 볼 수는 없었다. 그녀가 다시 빠른 속도로 덧붙였다.

    “문제는 금용의 말에 허점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마음 같아선 구염락이 없는 틈을 타 즉시 금용을 죽이고 싶었다. 심지어 장서열은 그럴 생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겨우 곤장 몇 대로 끝내는 건 가벼운 처벌이었다. 어차피 명분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내 눈에 거슬리는 자를 끝장내겠다는데 누가 감히 막는단 말인가.’

    신형사의 태감을 향해 장서열이 나직하게 말했다.

    “끌고 가서 쳐라. 치다가 죽으면 이 영패가 책임질 것이다.”

    새로 부임한 이등 대태감이 난처한 눈길로 화 마마를 쳐다보았다. 그러나 그는 곧 ‘여짐친림(如朕亲临)’을 떠올리며 이를 악물고 자리를 떠났다.

    농교와 완정은 더할 나위 없이 태평했다. 하찮은 금용 따위가 뭐가 대수인가. 예전에도 태자전하는 아가씨를 위해 금용을 엄히 벌한 적이 있었다.

    초조한 화 마마의 속만 타들어갔다. 시침도 들기 전에 궁녀를 때렸다는 오점을 남기면 이후 전장에서 돌아온 태자에게 무슨 날벼락을 맞을지 알 수 없었다.

    ‘평소엔 얌전하기 이를 데 없더니, 오늘은 대체 왜 이러는 거지?’

    장서열은 마음을 다잡았다. 여기까지 온 이상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었다. 하늘이 자꾸만 금용을 제멋대로 설치게 놔두니 이제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그녀는 천천히, 그러나 곤죽이 되도록 금용을 짓눌러 다시는 기어오르지 못하게 손을 봐 줄 생각이었다. 안 그러면 금용의 아름다운 인생을 헛되게 하는 일이 될 것이다.

    * * *

    “이거 놔! 놓으란 말이야!”

    공포에 질린 금용이 소리쳤다.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알 수 없었다.

    “난 아무 짓도 안 했어! 대체 왜 날 잡아가는 거야? 황후마마를 뵙게 해 줘! 황후마마!”

    신형사는 결코 죄인을 만만히 다루는 곳이 아니었다. 이들은 황제의 눈 밖에 난 자라면 귀비라도 때려 죽였고, 황제의 심중을 헤아리기 어려운 경우에는 호되게 때려서 상처를 입혔다.

    그러나 이번 일은 그들도 난감했다. 양원은 그들의 주인이었고 심지어 호신부까지 갖고 있었다. 하지만 잡혀온 금용 역시 예전부터 태자에게 많은 총애를 받아 온 시녀이기에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게다가 소리자가 금용을 많이 아꼈으므로 그들로선 상황이 여간 난처한 게 아니었다. 그러나 양원의 명령을 받은 이상 금용을 곱게 보낼 순 없었다.

    무자비한 기세로 금용을 잡아온 신형사의 태감들은 널찍한 뜰에 저군전의 하인들을 불러 모았다. 아무리 봐준다 해도 곤장 사십 대를 맞으면 살이 터지고 피가 낭자한 게 당연했다. 하인들은 그렇게 금용이 대가를 치르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금용은 몇 번이나 혼절해 정신을 잃었지만 이를 그대로 두고 볼 농교가 아니었다. 그녀는 주방에서 소금을 탄 얼음물을 가져와 금용에게 끼얹어 정신을 차리게 한 뒤 계속해 형을 집행하게 했다.

    ‘감히 아가씨에게 수작을 부려? 네까짓 게 뭔데!’

    형벌은 재빠르게 진행되었다. 장서열이 식사를 거른 시점부터 금용이 곤장을 맞을 때까지의 시간은 채 한 시진이 걸리지 않았다.

    이를 지켜보던 하인들은 모두 두려움에 떨었다. 자복궁에 들어온 후 줄곧 미동도 없던 주인은 존재를 드러내자마자 막강한 권력을 행사했다. 사람들은 비로소 새로운 안주인이 얼마나 독하고 잔인한 사람인지, 그에 비해 금용은 얼마나 하찮은 존재인지를 깨달았다.

    물론 그들 중에는 장서열이 현명하지 못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그들은 태자가 돌아오면 다시 분위기가 달라질 거라고 기대했지만 새로 등장한 주인이 아랫사람을 처단할 권력을 지녔다는 걸 부인할 수는 없었다.

    알게 모르게 자복궁을 무시하던 하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고분고분해졌다. 그들은 자복궁의 수발을 드는 데 정성을 다하리라 다짐했다. 이는 금용과 친하게 지내던 어린 궁녀들도 마찬가지였다.

    송 마마는 이를 악물었다. 새로 들어온 주인은 상상 이상으로 잔인했다. 이렇게 많은 사람 앞에서 망신을 준 이상 앞으로 하인들이 금용의 말을 순순히 따를 리 없었다. 그녀는 태자에게 후원에 새로 들어온 여인이 그가 아끼는 일등 시녀를 어떻게 괴롭혔는지 낱낱이 고해바칠 날만을 기다렸다.

    장형을 내린 후, 장서열은 황제가 내린 음식으로 배를 채웠다. 그녀가 식사를 방해한 노비에게 벌을 줬다는 소식을 들은 황제가 많은 음식을 하사하는 것으로 장서열을 위로한 것이다. 음식들은 혹시라도 도로 돌려보낼까 염려라도 한 듯 하나같이 정성이 가득했다.

    황제의 행동은 저군전의 하인들에게 장서열을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를 일깨워 주었다. 송 마마 또한 감히 분노를 드러내지 못했다.

    화 마마는 속으로 감탄했다. 역시 주인이 첫 번째로 후궁의 첩지를 받은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장서열이 탁월한 수완을 갖고 있음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황제는 다시는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오랫동안 쉬고 있던 그의 유모 진 마마를 장서열에게 보냈다.

    저군전의 분위기는 점점 바뀌어 갔다. 하인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장서열에게 공손히 굴었고, 어려운 일이 생기면 황후나 금용을 찾아가는 대신 장서열을 찾아가 의견을 구했다.

    한 번은 황후가 장서열을 부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녀는 감기에 들었다며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장서열은 바보가 아니었다. 황후는 전() 태자였던 구염단신과의 일로, 전부터 그녀를 좋아하지 않았다. 게다가 황후에게는 태자의 후궁이 본인이 직접 지시한 절약의 미덕을 해쳤다는 명분이 있었다. 그러니 황후가 좋은 마음으로 그녀를 불렀을 리 없었다. 대접한다는 핑계로 경고하려는 속셈이었다.

    장서열은 남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 없었다. 어차피 이 재수 없는 곳에 들어온 건 그녀의 의지가 아니었다. 그렇다면 누구도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강요할 수 없지 않은가. 내키지 않는 건 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다. 그리고 굳이 기력을 소모해 가며 총애를 다투고 싶지도 않았다.

    황후는 장서열이 병을 핑계로 오지 않자 벌컥 화를 냈다.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나!”

    다채로운 빛깔의 긴 호갑(护甲, 손가락 끝에 씌우는 고깔 모양의 장신구)이 손가락에서 후두둑 떨어졌다. 화가 난 황후가 씩씩대며 말했다.

    “본궁의 말을 거역하다니!”

    바닥에 떨어진 호갑을 줍던 권여아는 겉면의 칠이 벗겨진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궁녀가 가져온 쟁반 위에 호갑을 내려놓았다.

    “황후마마, 화내지 마세요. 어쩌면 장 양원이 정말 감기에 걸린 건지도 모르잖아요.”

    그러나 권여아의 말은 황후를 더욱 화나게 만들었다.

    “웃기는 소리! 정말로 병이 났다면 이미 호 태의가 밤낮으로 자복궁을 지키고 있었을 게다. 폐하라고 가만히 계셨겠느냐? 주구장창 며느리를 찾아가셨겠지!”

    눈치 빠른 방 마마와 조로전의 일등 궁녀는 황후가 다시 불경한 말을 뱉기 전에 얼른 하인들을 데리고 물러갔다.

    권여아는 고개를 숙인 채 대답하지 않았지만 눈에는 회심의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황제가 아무리 장서열을 두둔한들 그녀의 고모가 대주국의 태후가 되어 황제보다 오래 살기만 한다면 장서열의 시대도 끝날 것이다.

    황후는 권여아를 보며 더욱 화를 냈다.

    “며느리라고 할 수도 없지. 기껏해야 첩이 아니냐. 본궁에게 가르침을 받을 자격조차 없는 물건이다. 걱정 마라. 본궁이 내일 널 태자비로 봉해 달라고 폐하께 주청 드리마. 그러고도 장서열이 지금처럼 기고만장할 수 있는지 두고 보자!”

    권여아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고개를 들어 간절하게 황후를 바라보았다.

    “마마, 절대 안 됩니다. 폐하께서 한 번도 언급한 적 없다는 걸 잘 아시잖아요. 만일… 만일 폐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면 제 체면은…….”

    황후가 안쓰러워하며 조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어리석기는. 걱정 말거라. 이 고모는 네게 빚이 있다. 본궁이 있는 한 네가 억울할 일은 없을 것이다. 하물며 파혼을 당한 아이도 후궁 첩지를 받은 마당에 네가 안 될 이유가 무엇이냐? 본궁은 권 씨 가문의 명예를 걸고 너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울 것이다.”

    권여아가 수줍게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매사 조카를 위해 애써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이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할지…….”

    “일어나거라. 어서 일어나래도. 우린 가족이잖니. 그간 널 고생시켰다고 날 너무 원망하지만 말거라.”

    권여아가 그렁그렁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잠겨있었다.

    “다 저를 위해 그러셨다는 거 알고 있어요. 제가 박복한 것뿐이에요…….”

    황후는 자책감에 가슴이 아팠다. 그동안 그녀는 오로지 자신만을 생각했을 뿐 조카인 권여아의 입장까지는 미처 헤아리지 못했다. 가문과 올케에게 그저 미안할 따름이었다.

    * * *

    풍윤 40년 늦은 여름, 육세지란은 빠른 속도로 평정되었다. 동남과 정남, 서남부 세력을 쳐부수자 서북 세력은 황실로 편입되어, 서쪽에서 남쪽으로 연일 승전보를 울리고 있는 서북 전선의 태자와 합류했다.

    장장 이 년간 나라를 떠들썩하게 만든 전란이었다. 육세지란의 종료를 선포한 후, 남은 일을 서북 장군에게 맡긴 태자는 군대를 철수시키는 동시에 환궁을 명했다.

    적막한 변경의 들판은 온통 얼음과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서북 지역의 매서운 추위는 대호국을 막아내는 장벽이었다. 이곳의 서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붉은 여우 가죽을 걸친 구염락이 친위대를 이끌고 서북의 가장 높은 봉우리에 나타났다. 그와 친위대는 가파른 절벽을 마치 평지처럼 오가는 이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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