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4화
화 마마는 조금 전 도무지 종잡을 수 없이 고요하던 장서열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는 속으로 알 수 없는 경외심을 느꼈다.
“걱정 말고 앞으로 주인님께서 꺼리는 게 있거든 미리 내게도 알려주거라. 궁은 사람들이 얘기하는 것처럼 그렇게 무서운 곳은 아니란다. 주인님께 충성을 다하는 것으로 마땅히 그 보답을 받을 수 있지. 이 점만 분명히 알고 있으면 된다.”
화 마마에게 언짢은 기색이 없자 농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용서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마님.”
그 모습에 결국 화 마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눈가에 맺힌 주름에 자애로움이 더해졌다.
“너희는 앞으로 주인님을 측근에서 모시는 일등 시녀가 될 터인데, 이래서야 어찌 아랫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겠느냐.”
농교가 장난스레 웃어 보였다. 평소 그리 눈에 띄지 않던 외모가 웃을 때만큼은 환히 빛났다.
순간 자신이 잘못 본 게 아닌가 싶어 막 다시 농교를 쳐다보려던 화 마마의 앞에 잔뜩 화가 난 어린 태감이 등장했다. 씩씩거리며 휘장을 걷은 그가 소리쳤다.
“화 마마, 주방에서 점심시간이 지나 밥이 없다며 저를 그냥 빈손으로 보냈어요!”
화 마마가 즉시 분노했다.
“이것들이 간이 부었구나!”
농교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순간 손에서 땀이 나는 걸 느꼈다. 입궁 전 조 부인은 궁의 노비들을 일컬어 권세에 빌붙어 사람을 업신여기는 자들이라고 했다. 지금까지는 아가씨가 다소 무기력한 상태이기에 신경 쓰지 않고 넘어갔을지 몰라도, 후에 아가씨께서 기력을 회복하는 날엔 반드시 이 빚을 배로 갚아줄 터였다.
휘장을 걷고 밖으로 나가던 화 마마가 몇 걸음 못 가 다시 돌아왔다.
“가서 주인님의 시중을 들거라. 우선 내가 주방에 가볼 테니 아직 주인님께는 고하지 말고.”
농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화 마마가 자리를 떠나자 그녀는 즉시 정전으로 뛰어가 장서열에게 이 상황을 낱낱이 고해 바쳤다.
책장을 넘기려던 장서열이 서책의 한 귀퉁이를 살짝 눌렀다. 옥처럼 희고 고운 손가락이 눈에 띄었다. 그녀가 미간을 살짝 찡그린 채 물었다.
“화 마마가 처리하러 갔다고?”
농교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장서열이 다시 책장을 넘겼다. 귀비탑 아래 놓인 얼음은 유독 서늘한 기운을 뿜고 있었다.
“차 한 잔을 마실 시간까지 식사가 도착하지 않으면 곧장 신형사(慎刑司)에 일러 주방 것들을 데려가라고 해라.”
“네?”
농교가 곧장 말했다.
“아가씨… 일을 너무 크게 벌이는 게 아닐까요? 그리고 신형사 사람들은 저희 말을 듣지 않을 거예요…….”
농교가 특히 작은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소곤거렸다. 그녀는 행여나 그 말이 아가씨의 자존심을 건드릴까 두려웠다. 때마침 병풍을 치우고 있던 완정도 신형사라는 말에 얼른 다가와 고개를 끄덕였다.
“아가씨, 심사숙고하세요.”
그러나 장서열은 이제껏 궁에서 억울했던 적이 없는 여인이었다. 특히 전생에서 그녀는 구염락에 기대어 타협을 몰랐고, 지금이라면 더더욱 그럴 필요가 없었다.
장서열이 허리춤에 매어 놓은 주머니를 끌렀다. 과거 황제가 내린 ‘여짐친림(如朕亲临, 짐을 대하듯 영패를 가진 사람을 대하라)’ 영패가 나타났다.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무슨 말들이 그리 많으냐.”
길어진 장서열의 말에 막 주머니를 받아든 농교가 순간 감격해 소리쳤다.
“아가씨, 떨쳐내셨군요!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으셨어요! 이제 죽지 않으실 거죠?”
이렇듯 아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매일 쌀쌀맞게 입을 열지 않던 아가씨가 마침내 정신을 차렸다.
감격한 농교는 방금 자신이 무슨 말을 했는지도 몰랐다. 고개를 돌린 장서열이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말했다.
“내가 언제 죽으려 했다더냐?”
“예? 앗!”
농교가 얼른 바보처럼 웃어 보였다.
“노비가 헛소리를 했습니다.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
고개를 숙인 농교가 불쌍한 얼굴로 옷자락을 꼭 쥐었다. 입궁 전, 조옥언은 농교와 완정에게 혹시라도 아가씨가 다른 마음을 먹지 않도록 반드시 잘 지켜볼 것을 몇 번이고 신신당부했었다.
장서열은 다시 서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이번 생에서 그녀가 절대로 할 수 없는 일이 하나 있다면 그건 바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었다. 최근에 기분이 저조했던 건 단지 잘못된 선택에 대하여 한 달 정도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계속 이대로 무력하게 살 생각은 없었다.
서책에 집중하는 여유로운 표정에서는 태생적으로 존귀한 이의 기품이 느껴졌다. 완정은 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아가씨가 저리도 열심인지 궁금했다.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서책을 힐끔 힐끔 쳐다보았다.
장서열이 정한 시간까지 끝내 식사는 당도하지 않았다. 눈꼬리를 살짝 치켜든 그녀의 입가에 교활한 미소가 떠올랐다.
농교가 지체 없이 신형사로 뛰어갔다. 못된 노비들이 울고불고 매달릴 모습을 생각하니 벌써부터 통쾌하기 그지없었다.
‘감히 우리 아가씨 앞에서 위세를 부리다니, 아가씨가 어떤 분인지 전혀 모르는군!’
서둘러 신난 기색을 지운 농교가 다시 완정처럼 얌전하고 어리숙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공포스러운 신형사 문 앞에 도착한 뒤 군말 없이 ‘여짐친림(如朕亲临)’ 영패를 꺼내들고 그녀를 내쫓으려던 이들을 순식간에 잠재웠다.
우람한 노태감과 늙은 궁녀 무리가 노끈과 몽둥이를 들고 저군전에 들이닥쳤다. 이들은 주방 문을 쾅 소리가 나도록 열어젖힌 후 주방에서 일하던 모든 노비들을 거칠게 끌고 갔다.
이를 목격한 화 마마는 어안이 벙벙했다. 그녀는 주방 총괄자에게 주인의 식사를 내어줄 것을 간곡히 요청하던 중이었다. 그는 황후의 지시로 조로전에서 나온 자였다. 태자를 위해 황후가 직접 사람을 선발해 보냈다는 건 여러 가지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자를 끌고 가다니…….
당황한 화 마마의 눈에 별안간 신형사 무리 뒤에 선 농교가 들어왔다. 화 마마는 거의 기절할 정도로 놀랐다.
‘지금 이들을… 저 아이가 불러온 것인가?’
농교는 어느 누구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그저 얌전하고 어리숙한 얼굴로 당당히 문간을 지키고 서 있었다. 가슴팍에 ‘여짐친림(如朕亲临)’ 영패를 받쳐 든 그녀는 최대한 신형사에서 죄인들을 매섭고 모질게 다루도록, 설령 아는 사이일지라도 결코 인정을 베푸는 일이 없도록 내내 그들을 채근했다.
화 마마는 농교가 든 영패를 보지 못한 채 평소 친분이 있는 신형사 태감을 몰래 끌고 간 뒤 은화 두 푼을 찔러주고 물었다.
“어찌 된 일이오? 신형사에서 어찌…….”
화 마마는 주방에서 까닭 없이 삐딱하게 굴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랜 세월 궁녀로 지낸 그녀는 누군가 양원(良媛)을 도발하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대체 누가 그런 장난을 쳤는지 캐묻고 있던 중이었다. 그런데 난데없이 신형사에서 들이닥친 것이다.
방망이를 든 잘생긴 태감이 은화를 받아들었다. 적은 액수였지만 화 마마의 질문에 답해주기에는 충분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문간에 선 궁녀가 든 영패 보셨소? ‘여짐친림(如朕亲临)’이오. 이번에야말로 누군가 단단히 재수 없게 됐소.”
말을 마친 태감은 한눈팔지 않은 척 얼른 다시 노비들을 호송하러 갔다.
화 마마가 경악한 얼굴로 농교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저 무지하고 어수룩한 아이가 우습게 보이지 않았다. 고함과 비명이 이어지는 가운데 농교는 동요하는 기색 없이 여전히 문간을 사수하고 서 있었다. 그런 그녀를 어떻게 세상 물정 모르는 어린 계집애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순간 화 마마의 머릿속에 떠오른 건 금용이었다. 이번 일의 배후를 추측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저군전에서 이런 짓을 저지를 수 있는 사람도 오직 금용뿐이었다. 그러나 뜻밖에도 장서열은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눈앞에서 벌어진 난리법석을 바라보던 화 마마는 문득 자신의 존재가 양원에게 별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결코 농교나 완정만큼 중요한 사람이 아니었다. 심지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사람이었다.
양원이라면 굳이 자신을 같은 편으로 끌어들이지 않아도 충분히 궁에서 입지를 다질 만한 인물이었다. 갑작스런 깨달음에 그녀는 왠지 적잖이 당황스러웠다.
한편, 소식은 곧장 정전의 하인들에게 전해졌다.
“금용 언니, 큰일 났어요! 신형사에서 주방에서 일하던 자들을 모두 잡아갔어요! 게으름을 피우고 주인을 업신여긴 죄로 다들 돼지죽을 끓이는 곳으로 쫓겨난대요!”
놀란 금용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뭐라고? 그 여자가 무슨 수로 신형사를 움직였다는 거야? 사소한 일이고, 주방 사람들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금수가 당황해서 말했다.
“금용 언니, 무슨 수라도 써 봐요.”
이번 일로 소란이 커진다면 일개 궁녀의 신분으로 수습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긴장으로 굳어진 금용이 짐짓 태연한 척 말했다.
“그게 우리랑 무슨 상관이야? 우린 그저 전하께서 안 계실 땐 음식을 절약해야 하니 식사 시간이 지나면 불을 피우지 말라고 했을 뿐이야. 우린 잘못이 없어. 아무 짓도 하지 않았으니까.”
금용의 말에 그제야 금수가 마음을 진정시키며 생각에 잠겼다.
‘맞아. 우리는 잘못한 게 없어. 그냥 절약하자고 말했을 뿐이잖아.’
“하지만… 자복궁이 이렇게 반격하면 우리 체면이…….”
금용이 차가운 시선을 던지며 대꾸했다.
“그건 나도 알아! 아직 자리도 못 잡은 주제에 우릴 위협하다니… 하지만 뜻대로 되진 않을걸? 넌 이번 일이 조로전에 들어가도록 소문을 내. 절약은 황후께서 태자 전하의 복을 기원하기 위해 정하신 규칙이니까!”
아무리 장서열이라도 감히 황후의 말을 거역할 수는 없을 것이다.
눈을 반짝인 금수는 속으로 금용이 참 똑똑하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이번 일을 권여아에게 흘릴 생각이었다. 그렇다면 권여아는 장서열이 황후에게 반기를 들었다고 여기게 될 것이다.
설령 실패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이 일은 권여아와 양원 사이에 갈등을 불러일으킬 만한 사건이었다. 그렇다면 궁녀들에게도 앞으로 일을 꾸미기가 한결 더 쉬워질 것이다.
두 궁녀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러나 장서열은 예상 밖의 움직임을 보였다. 그녀는 단순히 겁만 주고 끝낼 생각이 없었다. 그녀가 움직였다는 건 이미 상대를 가만두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모두 잡았느냐?”
농교가 흥분해서 말했다.
“네.”
앞으로는 누구도 감히 아가씨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다.
“한 명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자백은?”
태연하게 책을 내려놓은 장서열이 옆에 있던 찻잔을 들었다.
“자백도 받아야 할까요?”
눈썹을 치켜올린 장서열이 농교를 힐끗 쳐다보았다.
“가서 전해라. 조금이라도 덜 아프고 싶다면 똑똑하게 굴라고. 일찍 자백하는 자는 돌아갈 자리가 있을 것이다. 반대의 경우는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되겠지. 저군전 주방에는 자리가 많지 않다.”
농교가 눈을 반짝였다.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