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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72)화 (172/449)

제172화

방 마마는 방 안에 있던 모든 궁녀를 내보낸 뒤 권여아가 마음껏 화풀이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누구라도 그녀의 입장이 되면 분노할 것이다. 어렵사리 발견한 희망이 또 무너지지 않았는가.

이제는 궁의 이치에 밝은 방 마마조차 황실의 태도를 가늠할 수가 없었다. 분명한 건 황제가 권여아를 태자비로 여기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랬다면 황제는 먼저 권여아를 태자비로 세운 후, 그 다음 장서열을 양원으로 봉했을 것이다.

‘이러니 어찌 아가씨가 낙담하지 않겠는가.’

방 마마가 안쓰러운 손길로 권여아의 등을 토닥였다.

“아가씨, 울지 마십시오. 어차피 그녀는 다른 사람과 정혼을 했던 몸입니다. 게다가 저군전에 있어 봐야 고작 첩실일 뿐이에요. 하찮은 첩실 하나 때문에 이렇게 몸이 상할 정도로 우시다니요.”

권여아가 흐느끼며 방 마마의 품에 와락 뛰어들었다.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어요. 정말로요…….”

방 마마라고 권여아의 마음을 모를 리 없었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권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나 방 마마는 권여아보다 멀리 내다볼 줄 알았다.

장서열은 비록 다른 이와 정혼을 했다는 약점이 있었으나 무척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었다. 방 마마는 이미 다른 마마들을 통해 장서열이 나날이 아름다워지는 데다 성격까지 좋아 남자들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그 말에 방 마마의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혹여나 태자께서 옛정을 잊지 못하고 양원에게 매달린다면?’

만일 태자의 총애를 받는 첫 여인이 장서열이 된다면 권여아의 앞날도 장담할 수 없었다.

권여아는 한바탕 울고 나자 기분이 조금씩 나아졌지만 여전히 방 마마를 껴안은 채 애처롭게 물었다.

“방 마마, 저는… 저는 대체 뭘까요?”

방 마마가 엄숙한 목소리로 답했다.

“아가씨는 예비 태자비이자 장래 대주국의 황후입니다. 최고의 자리에 앉게 될 존귀한 분이시지요. 그런데 어찌 하찮은 여인 하나 때문에 스스로를 비하하시는 겁니까?”

권여아가 멍한 눈으로 자조하듯 웃었다.

“하찮은 여인…….”

그게 장서열을 일컫는 것이라면 그녀는 동의하기 어려웠다. 태자가 끔찍이 싸고도는 여인, 별것도 아닌 찻물 한 방울로 태자가 안쓰러워 어쩔 줄 몰라 하던 여자!

권여아는 뱃놀이를 갔던 날을 떠올렸다. 평소 어떠한 일에도 평정심을 잃지 않던 태자는 장서열의 일이라면 물불 가리지 않고 무조건 옹호했다. 그녀는 그저 멍하니 그 광경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억울한 눈동자에 한기가 비쳤다. 그녀는 질 수 없었고 절대로 지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태자를 빼앗길 수 없었다.

돌연 방 마마를 끌어당긴 권여아가 물었다.

“혹시… 그녀를 영원히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방 마마가 즉시 권여아를 밀친 후 사방을 둘러보았다. 아예 밖에 나가 담벼락 밑에 사람이 없는 것까지 확인한 그녀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가씨, 그런 말은 절대로 저 이외의 사람 앞에서 하시면 안 됩니다. 며칠만 시간을 주시면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궁에서 오래 산 방 마마는 권여아에게 필요한 각종 수단과 방법을 알고 있었다. 방 마마는 그간 권여아가 펄쩍 뛸 거라 생각해 말하지 못했던 것을 이제 그녀 쪽에서 먼저 원하게 되었으니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장서열은 다른 여인과는 달랐다. 그녀는 태자에게 은혜를 입었고 황제의 비호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나치게 아름다운 용모를 갖고 있어 절대로 그냥 놔둘 수 없었다.

그렇다고 성급하게 처리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들의 계략은 반드시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여 누가 보아도 문제가 없어야 했다.

방 마마가 꾸짖지 않자 권여아는 쿵쿵 뛰던 마음이 가라앉는 걸 느꼈다. 방금 전 그 말을 뱉은 후 권여아는 약간의 자괴감을 느꼈다. 못된 마음이었고, 욕심이라고는 모르던 그녀답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녀는 그런 자신이 싫었기에 방 마마가 꾸짖으면 반드시 잘못을 인정하고 다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리라 마음먹고 있었다.

하지만 방 마마는 그녀를 꾸짖지 않았다. 심지어 예전부터 계략을 꾸미려고 준비한 듯했다. 이는 권여아로 하여금 역시 자신에겐 아무런 잘못이 없다고 느끼게 했다. 궁에서의 생활은 쉽지 않았지만 특히 권여아에게는 더욱 힘들었다. 이제 더는 누군가의 도움을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권여아는 점점 생각을 굳혔다. 황제와 황후 모두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없다면 이제 그녀는 스스로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 * *

어둠이 짙게 깔린 밤, 하늘에는 차가운 초승달이 걸려 있었다. 달빛이 비치는 저군전 호숫가로 장서열이 무거운 발걸음을 이끌고 나타났다. 그녀의 곁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지만 모두들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백옥으로 쌓아 올린 계단의 난간은 달빛을 받아 수면 위로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가끔씩 청개구리가 뛰어올라 고요한 수면 위에 파문을 일으켰다. 멀지 않은 곳에서 궁정 악사가 조용히 연주를 이어갔다.

장서열은 호숫가에 놓인 정자에 앉아 있었다. 허리 위로 높게 묶인 살구색 치마 아래로 긴 머리카락을 늘어뜨린 모습은 그야말로 그림처럼 눈부셨다. 밤바람에 비단 끈이 나풀거리자 고혹적인 아름다움이 느껴졌다.

그녀가 수면을 응시했다. 얼마 전까지 다정하고 따스하던 눈동자는 어떠한 감정도 없이 싸늘했다. 그녀에게 황궁은 낯선 곳이 아니었지만 결코 좋은 기억이 없었기에 아무리 잠을 청해도 도통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익숙한 풍경을 매개로 그간 잊으려 안간힘을 쓰던 기억이 쏟아져 나오자 그녀는 몹시 불안했다.

만약 전생에서 이런 기분이 들었다면 그녀는 괜한 트집을 잡아 누구든 색출해 낸 후 긴 손톱으로 얼굴을 할퀴어 화를 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렇게 가만히 선 채 두 달 남짓 남은 서풍엽의 귀환 날짜를 헤아리고 있으면 그나마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어차피 태후가 장서열을 곁에 두고자 황궁으로 데려왔다는 말은 단지 대외적인 명목일 뿐이었다. 이것이 현실이 된다면 황실로선 그녀의 가치만 높여 주는 꼴이었다. 이는 황후의 번민을 가중시키고 권 씨 가문으로 하여금 황실에 등을 돌리게 하여 수습 불가능한 상황을 초래할 것이다.

전생이 바로 그러했다. 장서열은 조목조목 이치를 따지며 조금도 양보하지 않았고 권여아는 꾹 참았다. 이에 격분한 권 씨 가문이 들고 일어났지만 장서열은 끝내 타협하지 않았다. 그녀는 외가인 조국공부의 힘을 빌어 끝내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생각해 보면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일이었다. 결국 비참한 말로를 맞이한 건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장서열이 문득 손을 들어올렸다. 어깨에 걸친 살구색 겉옷이 흐르며 새하얀 손목을 살짝 드러났다. 하지만 그녀는 무슨 생각인지 이내 손을 거두고 손 안에 든 물고기 밥을 꽉 움켜쥐었다.

고개를 조아린 농교가 슬그머니 완정을 바라보았다. 그녀와 눈이 마주친 완정은 순간 머리를 더 깊이 숙였다. 달빛이 비친 완정의 하얀 뺨은 몹시 아름다웠다.

완정은 어찌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지난달 임시로 궁중의례를 배운 그녀는 평소 궁에서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러니 농교 언니가 바라본들 그녀라고 뾰족한 수가 나올 리 없었다. 완정은 태자의 후궁에게 어떤 식으로 거처로 돌아가자고 권유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농교가 한숨을 쉬었다. 완정은 모든 걸 갖추었으나 배짱이 없는 게 탈이었다.

“아가씨, 시간이 늦었습니다.”

농교의 말에 완정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가씨가 등지고 서 있는 탓에 자신을 볼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완정이 얼른 입을 열었다.

“날이 어두워져서 추워요…….”

두 사람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장서열은 절로 웃음이 나왔다. 그들은 무엇인가 두려워하고 있었다. 아마도 기분이 저조한 자신이 궁에서 화풀이라도 할까 겁을 먹은 것이리라.

‘그럴 리가.’

황제는 자신에게 서풍엽을 살릴 기회를 주었고 이미 그가 돌아올 날짜는 정해졌다. 서풍엽은 공적을 세운 데다 죄목을 없앨 기회까지 얻어 이미 지난달에 한 차례 승전보를 울린 상태였다. 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 이로써 서풍엽은 당당한 충왕부의 세자로 남게 되었다.

자신과 같은 짐덩이를 덜게 된 것 또한 서풍엽의 복이었다. 그는 앞으로 어떠한 장애물도 없이 대주국의 내란을 평정하고 백국을 함락시켜 모든 과오를 지울 것이다. 어쩌면 백국을 공격할 때는 선두에 서서 혁혁한 전공을 세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는 그렇게 전생에서처럼 눈부신 일생을 보내며 역사에 남을 연경의 유명인사가 될 것이다.

본래 자신의 몫이 아니었던 것을 잠시 훔쳤던 것뿐이었다. 그녀는 아름답고 눈부신 꿈을 꾸었다. 꿈에서 깨자 그녀는 여전히 황궁 안에 서 있었다. 유일하게 축하할 만한 일은 그녀가 더 이상 냉궁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장서열은 자조하며 웃었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스스로가 우스웠다. 그토록 몸부림치며 피했는데 결국 또 이런 결과라니. 원망스런 마음이 들지 않을 리 없었다.

하지만 이제는 원망해야 할 대상조차 불분명했다. 그녀는 하찮은 자신이 운명에 맞서다 기어코 서풍엽에게 화를 입힌 걸 원망해야 할지, 아니면 새로 주어진 생에 들뜬 나머지 감히 평온한 삶을 넘본 것을 원망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제 보니 가장 웃긴 사람은 그녀 자신이었다.

‘진작에 이럴 줄 알았더라면…….’

장서열은 씁쓸한 눈으로 달빛이 비치는 수면을 바라보았다. 구태여 이렇게 돌아올 필요가 있었을까.

그녀가 몸을 돌리자 부드럽고 유연한 그림자가 달빛 아래 길게 늘어졌다. 여위어 더욱 가늘어진 자태가 그리는 풍경은 절로 한 폭의 그림이 되었다. 가볍게 스치는 바람에 머리카락이 날렸다. 거문고 소리가 잦아들었다.

장서열의 뒤를 따르던 어린 궁녀는 새삼 주인의 아름다움에 도취되었다. 그녀를 모신 지 벌써 한 달이 다 되었지만 새 주인은 언제나 새롭게 아름다웠다. 궁녀는 이런 주인을 따른다면 훗날 반드시 빛을 보게 될 날이 올 거라고 속으로 기뻐했다.

붉은 촛불이 돌아오는 길을 밝히고 있었다. 저군전에 새로 마련된 자복궁(紫福宫)은 주인이 돌아오자 한바탕 부산을 떨며 주인을 모신 후 그제야 등불을 껐다.

같은 시간, 평소 태자의 시중을 드는 궁녀들이 머무는 저군전 편방(偏房)에는 여전히 불이 켜져 있었다.

분홍색의 일등 대궁녀 복장을 한 금용이 불쾌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향로를 헤집었다. 올해로 열두 살이 된 금용은 한층 더 어여뻐진 용모를 자랑했다.

현재 그녀는 저군전 궁인들이 서로 앞다투어 아부하는 대고고(大姑姑)였다.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일처리가 야무지고 처세술이 좋았던 덕분에 일전에 금용에게 은혜를 베풀었던 송 마마조차 그녀에게 기대를 걸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태자와 남소원(南小院)에서 동고동락한 최측근이었다.

하인의 보고를 들은 금용이 손을 저어 그를 물러가게 했다. 편방에는 금용과 송 마마 두 사람만이 남아 있었다. 금용의 예쁘장한 눈꼬리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드디어 잠들었네요. 정말 돼먹지 못한 사람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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