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독후중생계 (171)화 (171/449)

제171화

“그렇단다.”

조옥언은 눈 하나 깜짝이지 않았다. 노련함만큼은 백전을 치른 노장과 같았다.

“문제는… 황후 자리가 아니란다. 하지만 폐하께서 입궁 후 삼 년 동안은 누구도 너보다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없을 거라고 약조하셨다.”

이는 방금 전 조옥언이 황제와 조율한 마지막 조건이었다.

삼 년 후 장서열은 열일곱이었다. 어차피 딸아이의 것이 될 거라면 삼 년 안에 모든 것이 판가름날 것이다. 이미 황귀비를 보장 받은 것만으로도 그녀는 평생을 호의호식하며 살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서풍엽과 함께하는 미래보다 훨씬 나았다. 만에 하나 최고 자리에 오를 수 없더라도 최소한 화를 당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장서열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눈에는 어떠한 감정도 없었다. 긴장한 조옥언이 그녀를 흔들었다. 갑자기 자신이 없어지는 기분이었다.

“서열아…….”

장서열의 가슴 속에 파도처럼 분노가 치솟았다. 황제에게 간청한 게 잘못이었을까. 그러나 그녀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고 황제 또한 그녀의 소원을 들어 주기 위해 거래를 제안했을 뿐이었다. 그렇다면 서풍엽을 구하기 위해 이렇듯 영광스러운 대가를 치르게 해준 것에 대하여 그녀는 마땅히 감격에 젖어 만세라도 외쳐야 하는 것이 아닌가.

조옥언이 급히 딸을 흔들었다.

“서열아… 서열아, 왜 그러니……. 어미를 놀라게 하지 말거라. 우선 함께 상의를 해 보자. 응?”

순간 장서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녀의 눈에 복잡한 감정이 비쳤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가치 있는 몸이라는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할지, 아니면 얄궂은 운명을 한탄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다행인 거야. 아무 것도 할 수 없을 때 최소한 그를 구할 수는 있으니까… 최소한 폐하께서 그를 살리고자 하시니까…….’

조옥언은 장서열의 표정이 심상치 않은 것을 발견했다. 그녀는 마치 넋이 나간 사람처럼 조금도 생기가 없었다.

“서열아, 어미를 보거라. 서열아…….”

그제야 억지로 싱긋 웃어 보인 장서열이 천천히 침착하게 답했다.

“괜찮아요. 전 이만 왕비마마를 뵈러 가 보겠습니다. 어제 저녁에 또 아무것도 안 드셨거든요…….”

말을 마친 장서열은 곧장 뒤돌아 방을 나갔다. 조옥언은 적막한 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끝내 딸을 붙잡지 못했다.

그녀는 마음을 더욱 굳게 먹었다. 저 침착한 여인이 바로 자신의 딸이었다. 어린 나이에 이별의 고통 앞에서도 냉정함을 유지할 수 있는 아이. 그런 딸아이가 태후가 되지 않는다면 대체 누가 그 자리에 앉을 수 있단 말인가.

평소 세상사에 무심하던 조옥언의 눈빛이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홍촉, 마차를 준비해라. 지금 당장 국공부로 갈 것이다.”

혹여나 실수가 없도록 조옥언은 반드시 모친과 상의해야 했다.

* * *

풍윤 40년 초여름, 황제는 온 힘을 다해 서풍엽을 보호했고, 그에게 죄를 묻지 않았다. 대신 그의 수행 무사들을 백국에 내주고 원하는 만큼의 은자를 배상했다. 아울러 변경의 일부분을 개방해 백국과의 무역을 허가했다. 백국으로선 거절할 수 없는 조건이었다. 반기를 들기에는 변경에 친히 버티고 있는 태자 구염락을 무시할 수 없었다. 사건은 비로소 수습되었다.

두 달 뒤, 황제는 장서열을 입궁시켜 연로한 태후의 시중을 들게 하는 한편, 태후의 곁에 있을 명분을 만들어 주기 위해 그녀를 태자의 후궁인 정4품 양원(良媛, 태자 첩실의 품계)에 봉했다.

이는 황제의 윤허 아래 조용히 진행되었지만 암암리에 많은 이들의 입방아에 올랐다. 사람들은 충왕부가 언제 조부(赵府)와 혼담을 파기했는지, 이 일의 배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매우 궁금히 여겼다.

‘장서열이 국법을 어긴 서풍엽을 버린 거야? 아니면 서풍엽이 장서열의 발목을 잡지 않으려고 자진해서 보내준 걸까?’

‘아니야, 폐하께서 이 틈을 타서 뭔가 협박한 것일 수도 있어.’

‘그것도 아니면 혹 장서열이 권세에 욕심이 생긴 걸까?’

물론 다른 가설도 있었다. 서풍엽이 먼저 파혼을 선언했다는 것이다. 이에 상심한 장서열은 몇 번이나 자결하려 했다. 그녀는 향을 피우러 절에 가던 중 존경하는 태후마마와 우연히 마주쳤고, 그녀를 가엾게 여긴 태후는 장서열을 곁에 두고 돌봐 주고자 했다. 입궁에는 명분이 필요했으므로 이를 위해 장서열은 태자의 후궁인 정4품 양원으로 봉해졌다. 수녀 선발도 거치지 않은 파격적인 조처였다.

그러나 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은 소문의 절반 정도만을 믿었다. 실제로 장서열을 만난 이들의 눈에 그녀가 확실히 살이 빠지고 어딘가 달라진 탓이었다.

장서열을 잘 아는 사람의 눈에 그녀는 과거보다 대인관계와 일처리에 더욱 명확해졌을 뿐만 아니라, 전보다 더욱 부드러운 미소를 지을 줄 아는 여인이 되어 있었다. 마치 그 무엇도 그녀의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는 듯 보였다.

조옥언은 조마조마했다. 그녀의 눈에 딸은 오히려 이전보다 더욱 가혹한 사람이 되어 있었다. 평소 딸아이는 좋아하는 비녀를 화장대 위에 늘어놓지 않으면 입술을 삐죽이곤 했다. 놀란 완정이 붉은 비녀를 몽땅 꺼내 놓아야 비로소 딸은 완정을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혀 달랐다. 장서열은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단장을 하지 않고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뿐 부족한 게 있어도 좀처럼 말을 하지 않았다. 너무 조용해서 두려울 정도였다.

완정과 농교가 일부러 장난을 칠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장서열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반찬이 입에 맞지 않으면 말없이 차만 음미했다. 달라진 딸아이의 모습은 조옥언을 매우 불안하게 만들었다.

조옥언이 장서열을 불러 앉혔다. 마음이 많이 답답한지, 황제의 처분을 받아들이지 못할 지경인지, 아니면 그만큼 서풍엽이 그리운 것인지 물어 보았지만 장서열은 모두 아니라고 답했다. 한술 더 떠 그녀는 황제를 원망하지 않으며, 자신에게 서풍엽을 구할 기회를 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고 했다. 물 샐 틈 없이 완벽한 대답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옥언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후에 태후가 사람을 보내 장서열을 데려 가자 그녀의 불안감은 더욱 커졌다. 혹 딸아이가 태후의 심기를 거스르지는 않을까 염려스러웠다. 효자태후는 결코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만약 서열이가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다면…….’

후회하기 시작한 조옥언의 초조함은 극에 달했다. 딸이 집에 있을 때는 무슨 짓을 해도 자신의 선에서 해결이 가능했다. 하지만 딸이 입궁한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조옥언은 행여나 딸이 고집을 부리다가 태후의 눈 밖에 나지는 않을지, 궁녀에게 미움을 사지는 않을지, 분별없이 굴다 황실의 법도를 어기지는 않을지 내내 걱정하다 결국 병이 났다.

병세로 인해 몸이 약해지자 그녀는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다시 황제에게 서신을 써 딸을 데려오고자 했다. 그녀는 결국 조 노부인에게 호된 꾸지람을 듣고, 위로 섞인 딸아이의 서신을 받은 후에야 겨우 나아질 수 있었다.

그해 여름, 충왕부는 유달리 조용했다. 장서열이 발길을 끊은 후 충왕비는 곧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기력을 회복했고 다시 웃는 낯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상냥했으나 전처럼 열정적이고 자유분방한 모습은 잃은 채 그저 서풍엽의 어머니로서 충왕부를 지켜 나갔다.

사람들은 궁금해 했다. 충왕비는 그녀의 아들을 포기한 장서열을 원망하고 있을까? 아들과의 죽음을 택하지 않고 오히려 그의 사랑을 저버린 장서열을 얼마나 미워할까?

그러나 충왕비는 명분에 집착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한가로이 대의명분을 따질 정신도 없었다. 그녀는 남편과 아들이 무사하게 돌아와 평온한 생활을 보낼 수만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다고 생각했다.

떠나는 장서열을 보며 충왕비는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만약 그 아이가 제 발로 떠나지 않았다면 충왕비는 아들의 목숨을 구하기 위하여 오히려 장서열에게 제발 궁에 들어가 달라고, 이기적인 자신을 용서해 달라고 빌었을 것이다. 이제 그녀가 바라는 건 부디 아들이 크게 고집을 부리지 않고 이 현실을 훌훌 털어버리는 것뿐이었다.

향을 피우고 절을 올린 충왕비가 불전을 향해 말했다.

“풍엽아. 넌 이제 네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지 못할 게야. 하지만 장담하마. 그건 네 삶에 어떠한 영향도 주지 못할 게다.”

* * *

화려하고 장엄한 내명부에는 최근 어두운 기류가 밀려들고 있었다. 오랫동안 조로전(朝露殿)에서 황후를 모시던 권여아의 처지가 무척 곤란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권여아는 본래 이틀에 한 번씩 저군전에 들러 부족한 부분을 살피고 태감과 궁녀가 청소하지 못한 곳을 정리하며 도왔다. 그러나 새로운 여인이 들어오며 그녀는 더 이상 저군전에 드나들지 못했다.

권여아가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랫동안 화를 내지 않았던 그녀는 억울하고 답답한 마음에 손안에 든 거울을 깨뜨려 버렸다. 그녀가 황궁에 들어온 지도 벌써 구 년째였다. 이제 그녀는 본가에 대한 기억조차 희미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녀가 미래의 황후이자 후궁을 다스릴 주인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녀는 아직 태자와 혼담이 오가지도, 그에 대해 어떠한 약속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데 그 사이 다른 여인이 태자의 후궁이 되어 당당하게 저군전에 들어간 것이다.

권여아는 제발 누구든 자신에게 진실을 알려 주길 바랐다. 자신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조로전에서 기르는 벌레? 실은 황실에서 가장 탐탁잖게 생각하는 며느리?

장서열은 궁에 들어오자마자 궁녀도 통방(通房, 시침 시중을 드는 시녀)도 아닌 정4품 양원에 봉해졌다. 권여아는 자신의 처지가 한탄스러웠다. 하다못해 개나 고양이도 이렇듯 주인에게 방치되지는 않을 것이다.

책상에 엎드린 권여아는 흐느껴 울었다. 수년 간 쌓였던 억울함이 폭발하는 기분이었다. 아무도 그녀의 마음을 생각해 주지 않았다. 일국의 황후인 고모는 그저 급하지 않으니 서두르지 말라고 당부할 뿐이었다.

하지만 권여아는 자신의 처지가 더욱 우습게 변하는 게 싫었다. 최근 궁 안은 온통 그녀를 조롱하는 말로 가득했다. 과거 장서열을 쫓는 구염단신을 보며 모든 이들이 달려와 그녀를 달랠 때처럼 사람들의 입가에는 명백한 조롱과 위선이 담겨 있었다.

인고의 시간이 흐른 후 최근 이 년 동안 드디어 변화가 일어났다고 생각했다. 태자는 상냥했고 황제 역시 그녀에게 많은 상을 내렸다. 그래서 그녀는 비로소 사람들의 마음속에 자신이 명실상부한 태자비가 되었다고 믿었다.

‘그런데 왜!’

권여아가 탁자 위에 있는 물건을 전부 쓸어 버렸다. 황제는 한 번도 그녀와 권 씨 가문을 존중한 적이 없었다.

‘장서열! 세상에 남자가 얼마나 많은데 왜 매번 내 남자를 가로채는 것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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