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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70)화 (170/449)
  • 제170화

    방 안에 다시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옥언은 소란에 얼굴을 붉혔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눈앞의 노인은 그녀의 인생을 망친 평생의 원수였다. 그런데 어째서 자신의 행복을 망가뜨린 원흉에게 화를 내고 돌아서지 못하는 걸까.

    ‘방에 들어선 순간 태후가 따뜻하게 반겨 줬기 때문에? 아니면 태후의 자애로운 말투가 과거 천하를 호령하던 기세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에?’

    조옥언은 이해할 수 없었다.

    노쇠한 태후의 시대는 진작에 끝났다. 하지만 그녀는 태후 앞에서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는 태후에 대한 존경심이 절로 우러나는 이 마음을 도저히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태후는 오랫동안 조옥언과 담소를 나누며 화기애애한 시간을 보냈다. 심지어 그녀는 조옥언이 떠나기 전 많은 상을 내리고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늙고 쇠약한 눈빛 속에는 온기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안타까움과 아쉬움이 가득했다.

    조옥언은 태후의 눈을 바라보다 하마터면 울음을 터뜨릴 뻔했지만 끝까지 참아냈다. 그녀는 그 정도로 나약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황제는 이 모든 광경을 지켜보며 처음부터 끝까지 조옥언의 곁에 서 있었다. 설령 제위를 잃는 한이 있더라도 반드시 조옥언과 혼인하겠다고 완강히 저항하던 그날처럼, 마치 과거로 돌아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그렇게 조옥언은 마지막까지 황제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은 채 홀연히 자리를 떠났다.

    집으로 돌아온 조옥언은 장서열을 만나지 않았다. 그리고 더는 서풍엽을 동정하지도, 충왕비를 불쌍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대신 그녀는 결심했다. 효자태후(孝慈太后, 태후의 이름)가 앉았던 그 자리에 딸을 앉히겠다고. 그리하여 딸아이에게 천하를 안겨 주고, 모든 이를 하찮은 개미처럼 내려다볼 수 있게 해 주겠다고!

    조옥언은 마침내 태후에게 자신이 한낱 개미에 불과했다는 걸 깨달았다. 불쌍히 여기고 싶으면 불쌍히 여기고, 눌러 죽이고 싶으면 눌러 죽이는 그런 존재.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상황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옥언은 도저히 태후를 미워할 수가 없었다.

    자존심이 깨진 그녀는 큰 충격과 함께 절망을 느꼈다. 일개 백성에게 권세가 주어진들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조국공부와 충왕부, 권 씨 가문은 모두 막강한 권력을 쥐고 모든 이들의 위에서 군림했다. 심지어 충왕비는 평소 황후와 같은 옷을 입어 황후의 속을 뒤집어 놓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하지만 절체절명의 상황에 도달했을 때 이들이 지닌 권세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이는 아들을 보호할 수도, 법을 바꿀 수도 없는 한낱 종잇조각에 불과했다.

    그러나 효자태후는 달랐다.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강력한 권력을 쥔 인물이었다. 그녀는 수많은 비빈들이 부침을 거듭하는 사이 아들과 딸을 낳아 명망을 얻었고, 결국 적들은 그녀와 싸워보기도 전에 자존심이 깨지는 수모를 겪었다.

    진실된 권력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효자태후는 제왕이었던 남편이 죽은 후에도 여전히 세상을 향해 웃을 수 있었으며, 모든 이를 자신의 손에서 쥐락펴락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조옥언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그런 영화를 안겨 줄 수 없었다.

    그리고 오늘, 태후는 조옥언에게 절대 권력에 대한 욕망을 일깨웠다. 조옥언은 딸아이가 마땅히 그 자리에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딸 서열이는 자신처럼 어리석고 무지하지 않았으며, 총명하며 침착할 뿐만 아니라 정도를 아는 아이였다.

    가장 중요한 건 그런 딸아이가 구염락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오히려 딸아이에게 마음이 있는 건 구염락 쪽이었다.

    ‘그렇다면 내 딸은 가능하다.’

    여인의 운명과 미래를 꼭 평탄한 삶에 맡겨야 한다는 법은 없었다. 인생은 알 수 없는 것이었고, 미래에도 지금처럼 안락한 생활을 유지하리란 보장은 없었다. 만에 하나 자손들이 억울한 일을 당하게 된다면 그들은 오늘날 그녀처럼 황권과 타협해 하찮은 상이나 받아 내는 걸 감지덕지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러기에 그녀의 딸은 너무나 고귀했다.

    조옥언은 자신을 찾아오는 장서열을 재차 외면한 채 황제에게 서신 한 통을 써서 보냈다. 편지에는 오직 두 글자뿐이었다.

    「황후(皇后)

    서신을 받고 놀란 황제는 한참동안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는 모후인 태후의 실력에 첫 번째로 탄복했으며, 전장으로 떠나기 전 구염락이 태후를 알현하여 효성을 다한 것에 두 번째로 탄복했다.

    이제 그는 입이 닳도록 누군가를 타이를 필요도, 조옥언에게 얻어맞을 각오를 할 필요도 없었다. 뜻밖에도 조옥언이 자진해서 승낙하다니, 그로서는 몹시 불가사의한 일이었다. 그는 조옥언이 이렇게 말이 잘 통하고 이해심이 많은 여인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황후 자리는…….’

    며칠 동안 곰곰이 생각한 끝에 황제가 조심스럽게 세 글자를 적었다.

    「황귀비(皇贵妃, 고대 황제의 비빈에게 내리던 등급 중 제일 높은 품계)

    이것은 그가 약속할 수 있는 최고의 자리였다. 그는 아들에게 상냥하고 순결한 황후를 얻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황제는 마음이 불안했다. 행여나 자신의 대답이 아들의 마지막 계획을 망치는 것은 아닌지 두려운 탓이었다. 장서열을 황후로 세우는 건 무엇보다도 구염락의 뜻이었다.

    하지만 그 아이가 뭘 알겠는가. 황제는 이번만큼은 과거 태후가 했던 것처럼 필사적으로 버틸 생각이었다.

    언제나 자식에게 최고의 것을 주고 싶은 게 부모의 마음이었다. 어쩌면 자녀가 염원한 게 아닐지라도 부모의 결정이라면 최악일 리 없었다. 과거 효자태후가 조옥언을 반대했던 것처럼, 혹은 조 노부인이 사위로 장신성을 선택했던 것처럼 그들은 자신의 자녀가 반드시 주도권을 갖길 바랐다.

    그리하여 한 명은 인생에 굴곡을 모르는 일국의 제왕이 되었고, 다른 한 명은 힘들이지 않고 손쉽게 남편을 쫓아낼 수 있는 부인이 되었다. 결국 부모의 선택이 최악인 적은 없는 셈이었다.

    황제는 자신이 괜한 고집을 부린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그저 아버지로서 아들을 위해 단정하고 예의 바른 아내를 얻어 주고 싶을 뿐이었다. 비록 아들이 가장 사랑하는 여인이 아닐지라도 대주국의 황후라면 응당 학식 있고 침착할 뿐만 아니라 황제를 위해 내명부를 통솔할 줄도, 뛰어난 황자를 길러내어 황실을 번영시킬 줄도 아는 여인이어야 했다.

    조옥언 역시 단순하게 생각했다. 서풍엽이 이미 곤경에 처한 이상 어떻게든 버텨낸다 하더라도 충왕부의 지위는 흔들릴 것이고, 최소 몇 년간은 이를 회복하기 힘들 터였다.

    게다가 그녀의 딸은 현재 승승장구하는 현 씨 가문과 척을 진 상태였다. 조옥언은 그날 밤 불쑥 찾아온 현천기의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는 확실히 위험하고 악독한 자였다. 만일 충왕부가 현천기를 제압하지 못한다면 향후 현천기가 그녀의 딸에게 무슨 짓을 저지를지 알 수 없었다.

    고민 끝에 조옥언은 구염락을 선택했다. 태후를 알현한 후 받은 충격 때문임을 부인할 순 없었다. 하지만 조옥언은 장서열을 믿었다. 훗날 구염락의 총애를 잃게 된다 하더라도 딸아이는 굳건히 자리를 지킬 것이다.

    감정이란 아이들이 성장할 때 반드시 필요한 아름다운 기억에 불과했다. 그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진정한 삶이 시작되는 것이다. 지금의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녀에게 이혼은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난무하는 유언비어만 제외하면 그녀는 연경의 모든 여인을 통틀어 가장 자유로운 여인이었다.

    ‘서열아, 다 널 위해서란다. 부디 이 어미가 모질다고 원망하지 말거라.’

    그때 난처한 얼굴의 홍촉이 들어왔다. 그 사이 부인이 또 사색에 잠겨 있자 홍촉이 쓴웃음을 지어 보였다.

    “부인, 아가씨께서 또 오셨습니다. 입궁하신 일은 어찌 되었는지, 어째서 아무 소식이 없는지 계속 궁금해 하세요.”

    서신을 집어넣은 조옥언이 곧바로 답했다.

    “들여보내라.”

    홍촉은 그제야 무거운 짐을 벗고 홀가분한 얼굴이 되었다. 그녀는 여태껏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반복되는 아가씨의 질문에 어찌할 바를 모르던 참이었다.

    긴장한 얼굴의 장서열이 방 안으로 뛰어들었다. 조옥언은 다정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딸아이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조옥언은 초조해 하는 그녀의 눈빛에 속으로 양심의 가책을 느꼈지만 애써 이를 외면했다.

    “어미가 물어보고 왔단다. 너…….”

    말을 하려다 멈춘 조옥언이 고개를 떨궜다. 장서열이 초조하게 말했다.

    “어머니, 어서 말씀해 주세요. 폐하께서 뭐라시던가요? 혹 승낙하지 않으셨다면… 안 된다고 하셨다면… 제가 직접 전장으로 가겠어요.”

    조옥언은 조급해 하는 장서열을 보며 순간 화를 냈다.

    “쓸데없는 소리! 처녀가 무슨 말을 그리 함부로 하는 게야. 풍엽이는 현재 변경에 있다. 태자가 보호하고 있으니 아무 일도 없을 게다.”

    말을 마친 그녀가 장서열의 시선을 살짝 피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폐하께서 입궁을 명한다면 어찌하겠니?”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어머니? 그냥 속 시원하게 말을 해 주세요. 설마 폐하께서 어머니께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던가요?”

    순간 불경한 생각에 화들짝 놀란 그녀가 어머니의 손을 잡아당기며 말했다.

    “어머니, 폐하께서 혹시 어머니께 입궁을…….”

    장서열은 차마 마지막 말을 입 밖에 낼 수 없었다. 딸이 무슨 말을 하는지 깨달은 조옥언이 화들짝 놀라서 얼굴을 붉혔다.

    “무슨 헛소리를 하는 게야! 갈수록 못하는 말이 없구나.”

    딸을 질책하려던 조옥언이 이내 한숨을 쉬며 말했다.

    “이상한 생각 말거라. 그래도 그는 일국의 군주다.”

    장서열은 그제야 마음을 놓았다.

    “그럼 폐하께서 뭐라고 하시던가요?”

    “폐하께서는 네가 입궁하기를 원하신다.”

    순간 머리를 맞은 듯 놀란 장서열의 시선이 조옥언을 향했다. 경악에 물든 장서열의 눈빛은 조금씩 침착해지다 끝내 다시 고요해졌다.

    조옥언은 도저히 딸을 속일 용기가 없었다. 그녀가 두려운 듯 딸아이를 바라보았다. 딸의 시선을 마주하자 그녀는 머리카락이 다 곤두설 지경이었다.

    그녀는 다른 무엇보다도 딸을 제대로 길러냈다는 자부심이 있었다. 장서열은 어떤 면에서는 무서울 정도로 냉정했다. 그녀는 딸이 어렸을 때만 해도 절대로 황궁에서 살 수 없을 거라 여겼다. 하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 딸아이는 누구보다도 황궁에 적합한 여인으로 자랐다.

    일단 한 마디를 내뱉고 나자 그 다음은 어렵지 않았다. 조옥언의 입에서 이야기가 술술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황제는 너를 협박하는 것이다. 네가 입궁해서 태자의 곁에 머물면 풍엽이의 일은 알아서 처리해 주겠다는 뜻이지.”

    “…….”

    “하지만 네가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황제는 풍엽이를 백국으로 보낼 게다. 네가 풍엽이를 따라가 죽을 생각이라면 굳이 말리지 않겠다고 하더구나. 다… 네 선택에 달려있다.”

    고개를 떨어뜨린 장서열이 차갑게 웃었다.

    “폐하께서는 아직도 단념하지 않으셨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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