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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69)화 (169/449)

제169화

조옥언은 당연히 마음이 흔들렸다. 때마침 그녀는 주 씨 가문이 장서전의 체면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있던 차였다.

장서열은 극구 반대했다. 전생에서 올케였던 주 씨 가문의 여식은 오라버니에게 충분히 대접받을 만한 자격이 있었다. 그런데 올케가 시집을 오기도 전에 그보다 신분이 뛰어난 첩실을 들여 놓는 법이 어디 있단 말인가. 이는 올케를 난처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하지만 아무리 설득해도 조옥언과 조 노부인은 장서열의 말을 들은 체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손주에게 높은 신분의 첩실을 안겨 주려고 마음을 굳힌 게 분명했다.

혼담이 빠르게 진행되며 결국 장서열은 어떠한 훼방도 놓을 수 없었다. 그뿐만 아니라 그녀는 올케의 편을 들 수도 없었다. 섣불리 나섰다가는 시누이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인 올케가 못났다는 말만 듣기 십상이었다. 잘못하면 올케의 위엄은 땅에 떨어지고 서 씨 가문의 여식이 득세하게 될 수도 있었다.

결국 주 씨 가문 적녀의 체면을 세워줄 수 있는 건 오직 장서전뿐이었다. 그가 부인에게 관심을 기울여야만 훗날 올케가 굳건히 정실부인의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장서열이 머리가 아픈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간 서풍엽이 그녀를 너무 떠받들어 준 덕분에 그녀는 오라버니가 첩실을 들이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심지어 장서전이 향후 그녀를 용서해 줄 것이라는 전제 하에, 차라리 그녀는 집안에 자손이 적을지언정 오라버니가 첩실을 두지 않기를 바랐다.

* * *

그해 겨울, 구염락은 소수의 정예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진군하여 정남군을 함락시켰다. 연일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허를 찌르는 작전으로 거둔 승리였다.

한 사냥꾼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얼음으로 뒤덮인 길을 지나는 병사들이 검을 다루는 기술은 불가사의했으며, 그들이 무장한 채 행군하는 모습은 마치 신과 같았다고 했다.

풍윤제 40년, 봄이 왔지만 전쟁은 격화되었다. 태자 구염락은 온화하고 점잖던 모습을 뛰어넘어 강철 같은 의지와 드높은 기세로 새로운 패왕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적군은 제1군의 발이 닿는 곳마다 패하여 달아났다. 매 차례 대전을 치르며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제1군의 병사들은 하나같이 뛰어나고 용맹하기 그지없었다.

창병(槍兵, 창을 쓰는 병사)은 전력이 뛰어나기로 유명한 동남의 철기병을 무력화시켰다. 대규모 결전 중 구염락은 친히 창병을 이끌고 전진을 공격해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며, 지난 이 년간 대치 중이던 동남부의 적진을 일거에 무너뜨리는 쾌거를 이루었다. 이후 태자의 진면목을 보여준 그에게 감히 대항하는 사람은 없었다.

봄이 되자 구염락과 서풍엽은 각자 십만 명의 병사를 이끌고 서남 대군을 공격했다. 두 사람의 이름은 이미 싸움을 시작하기 전부터 적군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효과를 가져왔다. 태자와 충왕 부자가 연합 공격을 시작한 뒤로 전장에는 승전보가 쏟아졌고 대주국은 환호했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늦은 봄이 되자 새로운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서남 지역을 진압한 후, 구염락은 군을 이끌고 서쪽으로 이동했다. 서풍엽은 전장에 남아 잔여 세력을 토벌하며 전란을 마무리하려 했다. 잔여 세력을 숙청하기 위해 그는 한 달 남짓 백국(白国)에 침투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백국이 대대적으로 대주국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이에 서풍엽의 군대는 그대로 서남 지역에 묶인 채 백국을 꺾기 위해 전력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한편 구염락은 황급히 남쪽으로 향했다.

대주국의 내전은 순식간에 국가 간 전쟁으로 뒤바뀌었다. 전쟁의 양상이 완전히 다른 판도로 진행되기 시작했다.

물론 이는 오래 전부터 설계된 구염락의 치밀한 계획이었다. 구염락과 그를 지지하는 거대 세력은 세찬 기세로 동남 세력을 제압하는 한편, 서남 세력을 급습하는 데 성공했다. 이어 그들은 백국에 대주국의 위력을 과시한 후, 차근차근 나머지 4대 세력을 제압해 갔다.

백국은 이번 대주국 내전을 틈 타 이익을 꾀하려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하지만 구염락이 직접 변경에 압력을 가하고 있었기에 대주국을 침입하는 것은 불가능해졌다.

더 이상 얻을 이익이 없다고 판단한 백국은 약정에 따라 대주국에 국서(国书, 외교문서)를 보냈다. 백국은 자신들이 입은 손실을 은자 백만 냥으로 보상하라고 요구하는 한편, 자신들의 어린 황자를 죽인 서풍엽을 넘겨주지 않으면 군대를 물리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그 소식은 순식간에 조정을 뒤흔들었다. 이미 내란으로 민심이 흉흉한 시기에 다른 나라와 대대적인 전쟁을 치를 순 없었다. 내전부터 해결하는 게 급선무였다.

게다가 대주국에는 호전파(好战派, 전쟁을 지지하는 세력)가 없었다. 오래도록 유지되어 온 황제의 신념에 따라 신하들은 중용과 온화, 포용을 주장하는 이가 대부분이었다. 또한 대주국과 백국은 그간 뚜렷한 원한 관계가 없었으므로 대세는 자연히 화친을 유지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그러나 서풍엽의 군대가 서남의 잔여 세력을 소탕하려다 백국에 침입하여 손해를 입힌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게다가 변경에서 어린 황자가 변을 당한 일은 백국의 큰 노여움을 샀다. 사람들은 잘난 체하던 충왕부의 세자도 결국 별수 없다며 수군거렸다.

조정 대신들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서풍엽을 내주는 게 마땅하다는 여론을 형성했다. 원로대신들에게는 지금이야말로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설치던 젊은이에게 본때를 보여줄 절호의 기회였다.

장서열은 정신을 바짝 차리고 무너지기 일보 직전인 충왕비의 곁을 지켰다. 남편의 부상에 연이은 아들의 변고까지, 충왕비는 충격을 금할 수 없었다. 게다가 다수의 조정 대신들이 백국의 요구대로 서풍엽을 넘겨주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그녀는 수차례 기절했고, 지금은 약에 의지한 채 겨우 정신을 붙들고 있었다.

자애롭고 생기 넘치던 충왕비의 얼굴은 어느새 창백하고 무력하게 변해 있었다. 침대에 기댄 그녀가 장서열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녀에게는 더 이상 세상을 비탄하거나 욕할 힘조차 없었다. 수척해진 그녀의 눈은 공허했다.

“서열아,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우리 풍엽이가 얼마나 신중한 아이인데…….”

장서열이 눈시울을 붉히며 충왕비의 손을 꽉 마주 잡았다. 수척해진 건 충왕비뿐만이 아니었다. 장서열은 무엇인가 쓰려다 그만 둔 장서전의 서신을 통해 서풍엽에게 불미스런 일이 생겼다는 걸 눈치챘다. 조정에 서풍엽을 지키려는 사람은 턱없이 부족했다.

장서열은 충왕비의 손을 놓을 줄 몰랐다. 언제나 그녀를 어여뻐하고 기쁜 소식을 전하려 애쓰던 충왕 부부를 그저 두고만 볼 수는 없었다.

“왕비마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어머니께서 입궁하셨으니 어쩌면… 어쩌면 희망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면목이 없어진 충왕비의 눈이 오래도록 장서열을 응시했다. 그녀는 조옥언이 어떠한 마음으로 황궁에 발길조차 하지 않는지 알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자신의 아들을 위해 옥언 언니가 발 벗고 나선 것이다.

“언니의 은혜는 죽어서도 잊지 못하겠구나.”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저희는 가족이잖아요. 제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왕비마마께서도 저를 위해 기꺼이 나서 주셨을 거라는 거 잘 알고 있어요.”

두 눈에 눈물을 머금은 충왕비가 다시 한번 장서열의 손을 꼭 잡았다. 마주 보는 시선 속에는 고맙다는 말로 다할 수 없는 감정이 담겨 있었다.

* * *

조옥언은 줄곧 자신이 황제를 미워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지난번처럼 여전히 긴장하고 있었고, 여전히 황제를 만나는 게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를 만나러 궁으로 향했다.

그러나 황궁에 도착한 조옥언은 돌연 가슴 속 깊숙이 숨어 있던 무언가를 깨닫지 않을 수 없었다. 과거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조석궁과 그 옛날 그녀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황궁의 장식들은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그녀를 매혹시켰다.

정교한 옥조각과 화려한 탁자, 얇고 부드러운 비단이 눈에 들어왔다. 평범한 이들이라면 보배처럼 간직해야 할 진주 구슬도 황궁에서는 그저 실에 꿰어진 주렴일 뿐이었다.

누구나 진귀한 것을 좋아하듯 조옥언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녀는 권세를 사랑했고, 자신에게 그 영광을 안겨줄 수 있는 남자는 더욱 사랑했다.

어린 시절의 꿈과 마음 한편에 숨어 있던 욕망이 한데 합쳐져 한 남자가 되었다. 사랑은 점점 강렬해져 모든 것을 불사하게 만들었으나 끝끝내 그녀를 가장 비참한 길로 몰아넣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잊고 지낸 기억을 떠올린 조옥언은 황권의 위용에 감화되어 어떠한 원망도 느낄 수가 없었다.

한편, 황제는 한 시진 전 조옥언이 도착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했다. 그는 다투느라 여념이 없는 조정 대신들을 뒤로한 채 황급히 조석궁으로 향했다. 승건전(升乾殿) 뒤편의 연못을 지날 때쯤 돌연 멈춰선 그가 옷매무새를 가다듬고 다시 황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뒤따르던 소태감은 평소 느리기 그지없던 황제를 따라잡기 위해 거의 뛰듯이 걸어야 했다.

여전히 그녀를 사랑하기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누구도 이를 확신할 수 없었다.

조옥언은 어린 시절 황제의 마지막 꿈이었다. 하지만 모후에 의해 그의 꿈은 산산조각 났다. 결국 황제는 조옥언에게 빚을 졌고, 일평생 무엇으로도 갚지 못했다.

잠시 뒤, 조석궁 밖에 당도한 황제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용과 봉황이 조각된 조석궁의 문을 열던 그는 순간 깜짝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방 안에는 절대로 함께 담소를 나눌 수 없는 두 여인이 나란히 앉아 웃고 있었다. 이들 곁에 선 늙은 궁녀와 대태감 또한 추억에 젖어 미소 지었다. 과거의 이야기를 나누는 두 여인은 마치 헤어진 가족이 다시 상봉한 것처럼 친밀해 보였다.

“소자, 태후마마께 인사 올립니다.”

중앙에 앉은 태후는 지긋하게 나이를 먹은 백발에 귀티가 흐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는 비록 많은 이들에게 잊혀졌으나 과거 어린 황제를 보필하며 장장 십칠 년간 정권을 잡았던 백절불굴(百折不屈, 어떠한 난관에도 결코 굽히지 않음)의 노태후였다. 그리고 아들이 정권을 잡은 뒤엔 깨끗하게 물러나 단 한 번도 조정 일에 관여하지 않았다.

물론 태후의 과욕을 막은 건 다시는 조옥언을 만나지 않겠다는 황제의 약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어머니에 대한 존경심을 부인할 수 없었다. 정권을 잡았을 당시 태후는 탄복할 만큼 뛰어난 능력을 보였으며, 물러설 때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권좌를 넘겨주었다.

마침 아들을 발견한 태후가 더욱 자애롭게 웃어 보였다. 나이 든 얼굴은 장난기 넘치는 풍성한 주름으로 가득했다. 여전히 제후의 품위를 잃지 않은 그녀는 모든 면을 통틀어 연경에서 가장 위엄 있는 어른의 표본이었다.

“풍윤이는 여전하단다. 그는 널 발견하면 언제나 저 멀리 피해 있다가 네가 눈을 맞추고 미소를 보여야만 그제야 새끼 고양이처럼 네게 달려들었지.”

태후 곁에 있는 늙은 궁녀가 입을 가리고 웃으며 말했다.

“역시 마마께서는 기억력이 비상하십니다. 그때 폐하께서는 겨우 일곱 살이셨죠. 옥언 아가씨의 뒤를 따라다니느라 한창 바쁜 나이셨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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