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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68)화 (168/449)
  • 제168화

    현천기는 자신의 추측이 그럴 듯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야만 그녀가 두 번째 생을 살고 있다는 것도, 황후 자리를 내팽개치고 서풍엽을 선택한 이유도 전부 설명이 가능했다.

    세상에 어느 여인인들 황후를 꿈꾸지 않겠는가. 4품 이상 고관의 적출 여식은 일정 나이가 되면 모두 황실의 여인이 되기를 소망했다. 그들은 4품 이상의 비빈이 되기 위해 노력한 후 정 안 되면 그제야 물러나 다른 가문과 혼인하는 것을 택했다.

    입궁을 기피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이미 궁녀가 된 여인이거나 신분이 낮아 입궁할 기회조차 없는 여인들뿐이었다. 그러나 장서열처럼 높은 신분을 타고난 여인이 입궁을 피하는 이유는 둘 중 하나였다. 바보이거나, 이미 마음에 다른 사람이 있거나.

    현천기는 진심으로 크게 웃고 싶었다. 그는 하루빨리 울상이 된 태자의 얼굴을 보고 싶었다. 온갖 공을 들여 입궁시킨 여인이 이미 다른 남자를 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는 아마도 피를 토할 것이다.

    현천기가 마치 숭배하는 시선으로 어두운 빗속에 선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언제 보아도 아름다운 용모였다. 외모뿐만이 아니라 천성적으로 품위 있고 우아한 자태는 그 누구와도 비교가 되지 않았다.

    번개가 사정없이 내리쳤다. 빛나는 장서열의 뺨을 보던 현천기가 돌연 입맛을 다셨다. 참으로 끌리는 소녀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서풍엽의 여자가 되다니.

    ‘내가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그녀를 가져서는 안 돼!’

    순간 주먹을 꽉 움켜쥔 현천기가 속으로 분개했다. 대체 서풍엽이 무슨 자격으로 장서열을 가진단 말인가. 이건 불공평했다.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장서열은 모두가 갖지 못해 모두가 함께 절망해야 마땅했다.

    현천기가 다시 한번 기분 나쁜 웃음을 지었다. 그는 자신처럼 다른 이들 또한 어둠에 휩싸여 절망하고 또 절망하기를 바랐다. 그 누구도 그녀를 얻지 못해 분노해야 마땅했다. 이 얼마나 공평한 결론이란 말인가.

    게다가 장서열이라면 마땅히 태자의 기분을 역겹게 만들 수 있었다.

    현천기의 눈을 가득 채운 원망이 순식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는 사탕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기뻐서 어쩔 줄을 몰랐다.

    “넌 아직도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현천기의 말에 장서열이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답했다.

    “더 할 말이 없으면 가도 좋아. 과거의 일은 더 이상 따질 생각 없어.”

    장서열은 알고 있었다. 현천기는 구염락에게 상당한 가치가 있는 인물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후대에 이름만으로 간담을 서늘케 하는 이 남자를 제거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최근 연경의 기강을 바로잡은 그의 공로는 앞으로 나라에 큰 족적을 남길 것이다.

    물론 그녀로서는 구염락이 자신을 위해 현천기를 죽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지만, 무엇보다 지금은 반드시 그를 죽여야 할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그는 살아있는 송장이자 걸어 다니는 고깃덩어리에 불과했다.

    현천기가 부드럽게 웃었다. 이렇게 쉽게 용서하다니, 역시 여자는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얼굴을 망치고 다리를 잃은 게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실감했다. 아니었다면 그는 지금 감히 그녀의 앞에 서 있을 수조차 없었을 것이다.

    현천기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왠지 또 다른 자신을 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가라고 했을 텐데.”

    현천기가 또 한 번 입꼬리를 씰룩거렸다. 더는 그의 음침한 웃음을 보고 싶지 않았던 장서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웃지 마.”

    현천기가 잠시 멈칫했다. 이제 자신에게 봐 줄 만한 얼굴이 남아있지 않다는 걸 떠올린 탓이었다. 그는 문득 예전 얼굴이 그리워졌다. 잠깐이라도 그녀에게 보여 줄 수 있다면…….

    그러나 즉시 따분한 생각을 지운 그가 다시 엄숙한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녀의 평온한 표정이 무너지는 걸 보고 싶었다.

    “날 죽이지 않은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 한 가지 소식을 알려 주지. 충왕이 부상을 입었어. 서풍엽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일주일 전 직접 군대를 이끌고 동남 지역의 반란 무리를 토벌하러 나섰지. 그리고 지금까지 서풍엽에 대한 급보는 없어.”

    놀란 장서열이 번쩍 고개를 들고 현천기를 쳐다보았다.

    “심각한 부상이야?”

    현천기는 장서열이 흔들리자 알 수 없는 만족감을 느꼈다.

    ‘드디어 나를 쳐다봐 주는군.’

    현천기가 음침하게 입술을 핥았다. 그는 장서열이 추한 자신의 얼굴을 차마 쳐다보지 못하는 거라 생각했다.

    “심각하진 않아. 팔뚝 절반이 잘려 나간 정도?”

    순간 장서열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어떻게 그런 일이…….”

    전생에서 충왕이 부상을 입은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이내 단언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과거 그녀는 매년 문안인사를 하러 입궁한 충왕비만 보았을 뿐 충왕을 만난 적은 없었기에 정확한 사정을 알 수 없었다.

    ‘지금 풍엽은 기분이 몹시 좋지 않겠지.’

    장서열은 눈앞에 서풍엽이 상심한 모습이 그려지는 듯해 마음이 아팠다. 비록 한 번도 내색한 적 없었지만 그녀는 서풍엽이 아버지 충왕을 매우 존경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 충왕에게 변고가 생겼다면…….

    장서열이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을 본 현천기는 다시 불쾌한 듯 고개를 돌렸다. 그는 세찬 비가 들이치는 회랑을 바라보았다.

    ‘그리 쉽게 마음이 흔들리는 건 좋지 않아. 어떤 감정도, 욕구도 느끼지 않도록 내가 좀 도와줘야겠군. 그래야 안락한 인생을 보낼 수 있을 테니까!’

    현천기의 얼굴은 세차게 내리는 비보다도 훨씬 으스스했다. 번개가 칠 때마다 그의 얼굴 위로 빛이 번쩍였다.

    “안심해. 소식을 듣고 태자 전하께서 이미 직접 출정하기로 결정했으니 말이야. 전하는 너와의 정을 생각해서라도 어떻게든 충왕과 서풍엽을 무사히 데리고 돌아올 거야.”

    장서열은 다시 한번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구염락의 출정 시기가 전생에서보다 훨씬 빨랐다. 어차피 별일이 없을 거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그녀는 서풍엽의 안위는 걱정하지 않았다. 다만 충왕의 부상은 안타까운 일이었고 그로 인해 서풍엽이 염려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장서열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았으니까 그만 가 봐.”

    현천기는 왠지 얼떨떨했다. 그녀에게서 태자를 걱정하는 기색이 전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구태여 태자가 출정하는 이유는 이후 벌어질 일에 대한 혐의를 벗고 전쟁의 승기를 잡기 위함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장서열의 태도는 너무 무정했다.

    심지어 현천기가 전한 말은 태자가 그녀를 위해 서풍엽을 구해 줄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마땅히 감격하여 머리를 조아린 후, 감사해 마지않지만 응당 안절부절못하며 혹시 태자가 자신에게 다른 마음을 품고 있는 건 아닌지 의심과 기대에 부풀어야 했다. 그게 아니라면 왜 굳이 태자가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그녀를 도와 줬겠는가.

    현천기에게 여인은 모두 혼례를 올리기 전까지 자신이 황후가 될지도 모른다는 헛된 망상에 사로잡히는 족속들이었다. 그런데 장서열에게는 그런 기대가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그녀는 태자가 자신을 좋아하는 건 아예 일어날 수 없는 일이라고 단정 짓고 있었다.

    칠흑 같은 밤의 어둠이 그의 웃는 낯을 가려 주었다. 모두가 함께 상실감을 느낄 수 있게 됐다. 그는 기뻤다. 이제 누구도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없으리라. 태자는 장서열의 사랑을, 장서열은 서풍엽을 얻지 못할 것이다.

    세상은 이토록 아름다웠다. 누구도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도록 방해하며 그가 받은 상처를 하나하나 메워 주고 있었다.

    * * *

    풍윤제 39년 가을, 태자 구염락이 군대를 이끌고 출정했다. 황제가 몸소 천 리 길을 배웅하는 모습은 군주의 위상을 드높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이날, 준수한 태자의 자태는 산처럼 우직하고 듬직했다.

    연경에는 온통 태자의 외모와 영웅적인 면모, 그리고 그의 뒤를 따르던 일등공과 제1군에 대한 찬양으로 가득했다. 태자의 위용은 황색 도포를 입은 제왕과 군대의 기세를 압도할 정도였다.

    대군 앞에 서기 전, 군복을 차려 입은 채 침묵을 지키던 소년이 바로 대주국의 태자이며 미래의 군왕이라는 사실은 모든 사람의 뇌리에 각인되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생사를 걸고 백성을 위해 친히 싸우러 나갔다.

    구염락의 출정 장면은 수많은 소녀들의 마음에 불을 질렀다. 수녀 선발을 기다리는 여인들은 어쩌면 훗날 저 남자에게 총애 받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에 한없이 설레는 마음을 달랬다.

    마차에 오른 권여아는 출정하는 군대가 더는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녀는 구염락이 무사히 승리를 쟁취하기를 바라며 직접 기도를 올려 받은 평안부(平安符, 안전을 비는 부적)를 이미 그의 안장에 매달아 주었다.

    만정은 너무 운 탓에 눈이 빨개지고 목소리도 쉰 채였다. 그녀가 장서열의 어깨에 기대 흐느꼈다.

    “아직 어린 나이인데 그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전장에 보내는 거예요. 정말 다른 사람들이 그를 잘 지켜 줄까요?”

    장서열은 만정의 긴 머리카락을 어루만지며 부드럽게 그녀를 달래 주었다. 그러나 마음은 씁쓸하기 그지없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걱정할 필요가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구염락이었다. 조만간 그는 세상 사람들에게 그를 염려하는 게 얼마나 쓸데없는 일인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는 이미 누구의 염려도 필요치 않을 만큼 위엄과 능력을 갖추었을뿐더러, 무엇이든 못하는 게 없는 인물이었다. 게다가 일평생 학문에 매달렸으니 날이 갈수록 강해지는 것도 당연했다.

    그러나 근시안적인 사고를 가진 관원들은 태자가 출정하자마자 이황자를 태자로 옹립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구염락을 너무 얕본 것이거나, 아니면 지나치게 순진한 탓일 터였다.

    심지어 이황자가 일부러 몸을 사리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관원들은 여전히 이황자를 위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장서열의 눈에는 참으로 생각이 없는 자들이었다.

    만정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조 부인께서는 서전 오라버니에게 뭘 보내신 거예요? 그리고 조 부인께서 폐하께 편지를 썼다고 들었어요. 서전 오라버니를 돌아오게 하시려는 건가요?”

    “어머니는 그저 오라버니를 걱정하는 것뿐이야.”

    만정이 다시 장서열의 품에 몸을 기댔다. 만정 역시 걱정스러웠다. 하지만 이를 밖으로 드러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아직 입궁한 몸이 아니기 때문이었다.

    “저… 조 부인께서 서 씨 가문 여식을 첩실로 들이는 걸 고려하고 있다고 들었어요.”

    이는 장서열 역시 골머리를 앓고 있는 문제였다. 서 씨 가문의 적녀는 지난번 사기 정혼 소동으로 인해 만족할 만한 혼처를 구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서 부인은 딸아이를 장서전의 둘째 부인으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조옥언을 찾아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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