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67화
장서열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그럼 현천기 역시 이제 남자가 아니라는 건지 묻고 싶었지만 입 밖에 내지는 않았다.
“어머니, 하인들을 데리고 잠시 자리를 비켜 주세요. 다들 놀랐을 테니 압경탕을 달여 먹이면 좋을 거예요.”
조옥언은 먼발치에 선 현천기가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녀의 손을 꼭 잡고 싱긋 웃었다. 어둠 속에서도 빛나는 미소는 평온하고 아름다웠다.
“염려 마세요, 어머니. 저를 어쩌지는 못해요.”
“그러나 저자는 작년에…….”
조옥언은 현천기를 당장 베어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걱정 마세요. 그건 이미 지난 일이고 전 다 잊었어요. 그러니 저를 믿고 사람들을 데리고 가 주세요.”
장서열이 다시 한번 어머니의 손을 꼭 쥐었다가 놓았다. 결연한 딸의 표정에 조옥언은 밀랍 같은 소년을 향해 눈을 부라린 뒤 곧 하인들을 거느리고 자리를 떠났다.
비는 여전히 억수 같이 쏟아지고 있었다. 장서열이 우산을 쓰고 바깥으로 나왔다. 빗소리 외에 어떠한 잡음도 없는 사방은 고요했다. 칠흑 같은 어둠 속, 두 사람 사이에는 오직 빗소리만이 가득했다.
현천기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분홍색 주름치마를 입은 그녀의 귓볼에는 연잎 모양 귀걸이가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그가 오랫동안 그녀를 응시했다. 옥처럼 부드러운 광택에 마음이 설렜다.
장서열의 피부는 초봄에 처음으로 피어나는 새싹처럼 여전히 희고 보드라워 보였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도 갈수록 아름답게 피어나는 그녀의 매력을 감추지 못했다.
그녀를 바라보던 현천기가 돌연 입술을 핥으며 음침한 웃음을 터뜨렸다.
“언제 어디서나 사람을 설레게 하는군. 네 아름다움에 취할 것 같아.”
“너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예전만 못한걸.”
재미있다는 듯이 한동안 장서열을 응시하던 그가 마침내 입술을 들썩였다.
“안으로 들라고도 권하지 않는 건가?”
“귀한 분을 누추한 집에 모실 순 없지.”
장서열의 눈빛은 여전히 차분했다.
“그렇다면야…….”
현천기가 그녀의 고요한 얼굴을 바라보았다. 노여움을 찾아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그녀는 마치 그를 사람이 아닌, 쏟아지는 비의 일부로 여기는 것 같았다.
현천기는 그간 장서열이 자신에게 깊은 원한을 안고 지냈을 거라 확신해 왔다. 그런데 실제로 그녀는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현천기는 장서열의 반응에 호기심을 느꼈다.
“아직도 나를 원수라고 생각해?”
“뼈에 사무치도록.”
‘너만 아니었으면 전생에서 구염락은 후궁에 크게 신경 쓰지도, 날 폐위하지도 않았겠지. 그리고 내 딸 상아(裳儿)는 편히 살 수 있었어!’
현천기가 억울하고 이해할 수 없다는 투로 말했다.
“하지만 초혜전에서 네가 아무리 내 먹을 갖다 썼어도 난 한 번도 너를 탓하지 않았어.”
그는 실제로 일 년 전 성공하지 못한 그 사건 때문에 장서열이 이토록 자신을 꺼린다는 걸 믿을 수 없었다.
침묵하던 현천기가 별안간 즐거운 듯 웃음을 터뜨렸다. 퍼붓는 빗줄기가 그의 삿갓을 짓눌렀지만 그는 그조차도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네 부친은 이미 나의 부친에게 혼담을 건넸지.”
현천기가 악귀처럼 탐욕스럽게 말했다.
“나와 혼인할 건가? 넌 분명 그걸 원할 거야……. 그렇지?”
장서열이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이 자는 정신이 나간 게 아닐까?’
입술을 핥은 현천기는 실성한 사람처럼 여전히 탐욕스러운 눈길로 장서열을 응시했다. 하지만 장서열에게서 아무런 반응이 없자 흥미가 떨어진 그가 눈 속의 열망을 거두고 마음을 진정시킨 뒤 입을 열었다.
“우린 이미 한 번씩 서로를 공격했어. 그걸로 남은 빚은 없다고 생각하는데.”
장서열이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가 날 공격하지 않았으면 나도 널 그리 만들 일이 없었어. 남은 빚이 없다고? 네가 당한 건 인과응보지만 난 무고한 피해자인데, 그게 어떻게 같을 수가 있지?”
현천기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말을 잃을 정도로 아름다운 눈동자에 빠져 있던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
“네가 이번 생을 이미 살아봤었다는 이야기를 조금은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뭐?”
“얼마 전 헌원가를 찾아갔었어. 그날 일에 대해 언급하자 헌원가는 예상대로 거의 나를 죽이려고 하더군. 내가 치른 죗값으로도 그녀의 원한을 누그러뜨릴 수 없었어. 하지만 넌 달랐지.”
“…….”
“내가 조부에 처음 들어섰을 때부터 지금까지 너는 시종일관 무서울 정도로 차분했어. 마치 지난 일 같은 건 전혀 안중에도 없는 사람처럼 말이야. 그렇다면 정말로 네가 남들에게 말 못할 비밀을 간직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자, 이제 내게 말해 봐. 태자 전하께는 절대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할 테니까.”
장서열은 현천기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자신이 또 한 번의 생을 살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의연하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녀는 현천기가 어떻게 지금까지 버틸 수 있었는지 궁금했다. 그의 시련은 분명 지난 번 그녀가 황궁에서 목격한 수준에서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녀가 잘못 본 게 아니라면 지금 현천기의 오른쪽 다리는 가짜였다.
‘대체 현천기가 저렇게까지 처절하게 버틴 이유가 뭐지? 구염락이 그에게 기회를 준 이유가 도대체 뭘까…….’
장서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눈치챈 듯 갑자기 현천기가 오싹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니, 틀렸어. 그는 아직 나를 놓아준 게 아니야……. 만약 그가 나를 용서했다면 지금 내 손엔 혼서(婚书, 혼사를 맺기로 한 증서)가 있었겠지. 난 너와 혼례를 올리고 널 열심히 괴롭혔을 거야.”
말을 마친 현천기가 흥분한 듯 침을 꿀꺽 삼켰다. 피 냄새를 맡은 악귀 같았다.
“넌 정말 역겨워.”
“너뿐만이 아니야. 나도 내가 역겨워. 하지만 이 문제는 나중에 얘기하기로 하고, 넌 아직 내 말에 대답하지 않았어.”
“…….”
“넌 태자 전하에 대해 이상할 정도로 잘 알고 있어. 게다가 내가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는데도 전혀 놀라지 않았지……. 다른 사람들은 거의 기절할 정도인데 말이야. 심지어 나조차도 거울을 보는 게 두렵거든. 그런데 넌 그런 나를 한참 쳐다봤어. 온실 속 화초처럼 자란 귀족 아가씨라고 믿기 어려울 정도로… 넌 마치…….”
“…….”
“마치… 나같이 흉측한 사람처럼 굴고 있어.”
빗줄기는 점점 더 강해졌다. 우산을 들고 있던 장서열은 우산을 때리는 세찬 빗줄기에 팔이 저릴 지경이었다. 결국 뒤돌아서 회랑으로 걸어 들어간 그녀는 우산을 내려놓은 후 아픈 팔을 주무르며 스스로에게 조소했다. 얼마나 오래도록 편한 생활에 젖어 살았기에 우산이 다 버겁단 말인가.
그녀의 뒤를 쫓아 들어온 현천기가 그녀와 한 뼘 거리에 있는 기둥에 몸을 기댄 후 귀신처럼 창백한 얼굴을 들이 밀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팔을 주무를 뿐이었다.
흥미를 잃은 현천기가 다시 몇 걸음 떨어져 나와 그녀와 똑같이 난간에 걸터앉았다.
“장서열. 이제 이게 진짜 내 얼굴이야. 다시는 예전의 준수한 모습으로 돌아갈 수 없어.”
그가 음침한 목소리로 덧붙여 말했다.
“어차피 난 그 망할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으니 별로 아쉬울 것도 없지만…….”
말을 흐린 현천기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넌 태자 전하를 좋아하지 않아?”
팔을 주무르던 손을 내린 장서열이 현천기를 바라보았다.
“내게 사죄하러 왔겠지? 내가 널 용서하면 며칠이나마 더 살 수 있겠지만 아니라면 바로 죽을 테니까. 안 그래?”
계속해 무심한 태도로 장서열을 놀리던 현천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해졌다. 순간 엄습하는 한기에 장서열은 몸이 얼어붙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누그러뜨린 현천기는 다시 음침하게 웃어 보였다.
“예쁜데 똑똑하기까지 하군. 과연 남자들이 한시도 잊지 못할 만해. 너를 가졌었다니… 서풍엽이 복이 많군.”
말을 마친 현천기가 탐색하듯 위아래로 장서열을 훑어보았다. 순간 그녀가 얼굴을 붉혔다. 현천기의 노골적인 시선 때문이 아닌, 서풍엽을 떠올린 탓이었다. 그 모습에 오히려 더욱 놀란 건 현천기였다.
‘설마 사실이었어?’
“그게 너와 무슨 상관이지? 넌 네가 저지른 일을 세 치 혀로 다 갚을 수 있다고 생각해? 어차피 지금 네가 처한 상황은 다 네가 자초한 결과야.”
장서열은 아무 말이나 거리낌 없이 지껄이는 현천기의 태도에 분노와 부끄러움을 동시에 느꼈다. 말문이 막힌 현천기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장서열이 정말 서풍엽과…? 그럼 태자는?’
아무리 멍청한 사람이라도 구염락의 곁에 있는 한 그의 의중을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다른 남자와 몸을 섞은 여자가 어떻게 입궁을 하지? 아니, 중요한 건… 태자께서 이걸 용납할 리가?’
현천기가 놀라움과 감동이 섞인 불가사의한 눈빛으로 눈앞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살짝 상기된 얼굴로 날카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정작 비밀을 들켰다는 사실에는 별로 개의치 않는 듯했다.
잠시 멍한 상태를 유지하던 현천기는 별안간 크게 웃고 싶어졌다. 사랑하는 여인의 마음도 갖지 못했다고? 천하의 태자에게도 이런 날이 오다니!
장서열은 태자에게 마음이 없다는 걸 확인시켜 주었다. 오늘 그녀의 태도는 남자라고는 일편단심 서풍엽뿐이라는 걸 말해 주고 있었다. 심지어 그녀에게 권력을 거머쥘 마음도, 황후가 되고픈 욕심도 없다는 사실에 현천기는 깜짝 놀랐다.
결정적으로 그녀는 태자에게 마음을 주지 않았기에 자신을 향한 태자의 사랑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깨달은 현천기의 기분이 돌연 상쾌해졌다. 지난 일 년간의 수치와 굴욕, 그리하여 거의 붕괴되기 직전이었던 정신까지 순식간에 치유된 느낌이었다. 가장 강력한 적이 다른 이에게 뒤통수를 맞았다는 사실만큼 통쾌한 일이 어디 있겠는가.
태자가 아무리 대단한 인물이라 한들 여기 눈앞의 장서열에게는 그저 한낱 사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간 장서열에게 쌓였던 울분이 풀린 현천기는 이제 기꺼이 그녀에게 고개를 숙이고 진심 어린 사과를 전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사부’ 장서열에게 어떻게 반짝반짝 빛나는 태자를 버리고 보잘 것 없는 서풍엽을 선택했는지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장서열은 현천기의 시선이 불편했다. 돌연 현천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실로 정상적이고 온화한 웃음이었다. 창백한 안색 속에 음습한 기운이 남아 있었지만 분명 조금 전보다 훨씬 나은 웃음이었다.
문득 현천기가 궁금한 듯 물었다.
“혹시 전생에서 태자 전하와 혼인했었나? 그래서 이제 그에게 질린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