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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66)화 (166/449)
  • 제166화

    논쟁 중이던 두 남자가 권서함을 발견했다. 6품 한림 시서(侍书, 관직명)가 순간 할 말을 잃고 아첨하는 웃음을 지으며 구석으로 물러났다. 그는 이미 자태가 고운 소녀를 권서함에게 넘긴 채 벌벌 떨고 있었다.

    평소의 그였다면 상대에게 적당히 훈계를 하고 끝냈을 것이다. 하지만 먼발치에서 장서열이 지켜보고 있자 그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에 평소보다 더욱 공포스럽게 엄포를 놓았다. 구구절절 주옥같은 논리를 늘어놓던 권서함은 마침내 두 사람을 감옥에서 영원히 썩게 하여 천하를 평온케 하리라는 결론까지 도달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장서열이 속으로 권서함에게 찬사를 보냈다. 과연 붓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던 외유내강의 대내각(大内阁, 관직명)다웠다. 그의 언변은 보통 사람이 따라갈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두 남자는 진작에 꽁무니를 빼고 달아난 채였다. 구석에는 사랑스럽게 생긴 소녀가 감격한 눈으로 권서함을 바라보고 있었다.

    권서함은 본래 여인에게 친절한 남자가 아니었다. 소녀는 자신을 구해 준 권서함을 따르고자 했지만 권서함에게 그것은 비현실적인 이야기였을 뿐더러 심지어 역으로 권 씨 가문을 모욕하여 은혜를 원수로 갚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장서열은 소녀가 권서함에게 절을 올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소녀는 눈물 맺힌 눈으로 여러 번 뒤를 돌아보았지만 결국 권서함에게 어떠한 대꾸도 듣지 못한 채 울면서 사라졌다.

    생각지 못한 상황에 권서함은 당혹스러웠다. 특히 장서열이 그를 향해 웃었을 때는 혹시라도 자신이 이러한 소녀들을 자주 울린 것처럼 보일까 봐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녀와 오랜 벗이라 생각한 권서함은 스스로 떳떳했기 때문에 딱히 감정을 숨길 생각 없이 소년답게 수줍어하며 말했다.

    “왜 웃으십니까? 서열 아가씨가 구해 줬더라도 아이는 똑같이 뒤를 돌아봤을 거예요.”

    그 말에 결국 장서열의 뒤에 서 있던 농교와 완정이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권서함처럼 완벽한 남자에게 이처럼 소심한 모습이 있을 거라 상상하지 못한 탓이었다. 앞으로 그가 어떤 여인을 부인으로 맞게 될지 궁금했다. 누구든 단정한 학자의 전형인 그의 옆에 서면 어울리기 쉽지 않을 것이다.

    더욱 난처해진 권서함이 마치 애원하듯 말했다.

    “서열 아가씨, 이렇게 벗을 놀리시는 건가요?”

    장서열이 살짝 얼굴을 붉히며 대답했다.

    “하하, 공자께서 조금만 더 부드럽게 대해 주셨다면 그 아이도 한을 품고 떠나지는 않았을 거예요.”

    권서함은 황당하다는 웃음을 지었다. 그녀는 대놓고 자신을 놀리고 있었다.

    이어 안부 인사 몇 마디를 더 주고받은 두 사람은 각자 자리를 떴다. 이제 둘 다 어리지 않았기 때문에 다시 만나자는 기약이 없는 작별이었다. 권서함은 마차에 올랐고 장서열은 상점에 들어갔다.

    이번에야말로 여러 차례 뒤를 돌아본 사람은 권서함이었다. 애석하게도 미인은 이미 떠나고 없었다. 앞으로 이런 우연은 없을 것이다. 넓디넓은 연경에서 두 사람이 우연히 마주치는 일은 기껏해야 일 년에 한 번 정도에 불과했다.

    * * *

    저녁 무렵, 남편과 현재 정세에 관하여 담소를 나누던 권 노부인은 하인에게 낮에 있었던 일을 전해 듣고 마치 적을 마주친 사람처럼 노심초사했다.

    권 노부인 역시 일전에 장서열을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예쁘고 조용했다. 누군가 전해준 바에 의하면 과거 초혜전에서 아들과도 사이가 꽤 좋았다고 했다. 권 노부인은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서함이 혹시라도…….’

    촛불 아래 자리한 남편을 바라보던 권 노부인은 순간 마음이 불안했다. 혹여라도 아들이 미인의 유혹에 넘어가지는 않을지, 만에 하나 장서열이 충왕부를 버리지는 않을지 심히 걱정스러웠다.

    “노야, 혹 서함이가 장 씨 가문 아가씨에게…….”

    권 노야가 개의치 않은 듯 말했다.

    “그만 하시오. 별일 아니잖소. 게다가 서함이는 서풍엽과 친분이 두텁소. 부인의 걱정은 서함이를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소.”

    권 노부인은 지나치게 태평한 남편의 모습에 화가 났다.

    “그럼 서함이가 왜 여태까지 혼처를 정하지 못했는지 이유를 말해 보시지요.”

    부인을 힐끗 쳐다본 권 노야가 정곡을 찔렀다.

    “그건 혼담이 들어올 때마다 당신이 번번이 퇴짜를 놓았기 때문이 아니오! 보시오, 부인. 아들 걱정은 이제 그만 하시구려. 매일 밤마다 아들의 일거수일투족을 보고 받는 것이 지겹지도 않소?”

    권 노부인은 반박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권 노야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는 수십 년을 함께한 부인이 진중하고 엄격한 모친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뒤에서는 남모르게 아들의 사생활에 간섭을 하려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권 노야는 우선 그 일에 대해서는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 * *

    국가의 폐단이 드러나기 시작하자 구염락은 여론을 강경하게 다스리고 현일에게 형부(刑部, 사법행정을 담당하는 곳)를 관장하도록 하는 한편, 나라의 기풍을 바로잡기 위해 새로운 시도를 시작했다.

    이 소식을 접한 장서열은 깜짝 놀랐다.

    ‘현 씨 가문이라니?’

    한 달 뒤, 장서열이 예상했던 바와 같이 현천기는 온갖 악랄한 수단을 동원하여 연경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는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혹독한 형벌과 엄중한 처벌로 사회의 기강을 새로이 했다.

    순식간에 살벌한 기운이 대주국을 휩쓸었다. 현천기는 강력한 법 집행으로 누구든 처벌에 예외가 없음을 만천하에 알렸다. 그는 왕손이며 귀족까지 가리지 않고 성범죄를 저지른 이들은 전부 군대에 보내거나 노역에 종사케 했다.

    현천기를 탄핵하는 상소가 줄을 이었다. 그는 가혹한 관리라는 꼬리표를 얻었다.

    적지 않은 백성들이 현천기를 옹호했으나 귀족들은 그를 죽이지 못해 안달이었다. 지난 한 달 사이 그가 실각시킨 자는 무려 육십여 명이 넘었으며, 그중 절반 이상은 사형에 처해졌다. 하루에 한 명은 죽고 한 명은 고문당한 셈이었다. 그에게 붙잡혀 감옥에 들어간 사람은 다시는 세상 빛을 보지 못했다.

    한 가지 특이한 건 형부(刑部)에 속한 감옥의 간수들이 최근 수시로 바뀌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들 대부분은 피비린내 나는 잔혹한 현장에 충격을 받아 시름시름 앓았다.

    많은 관원들이 현천기가 공무를 핑계로 사적인 이득을 취하려 한다고 고발했으나 현천기는 권서함을 찾아가 이에 반론할 상소문을 부탁했다. 격앙되고 간곡한 어조로 쓰여진 권서함의 상소 내용은 이러했다.

    「부정부패가 횡행하여 민심이 피폐해졌으니 어찌 엄중히 다스리지 않고 바른 모범을 보일 수 있겠는가. 현천기에 반박하는 이들은 모두 음흉한 마음을 품고 있는 자들이다!」

    권서함의 상소문에 연로한 대신들은 입을 떡 벌렸다.

    연경에서 현천기의 이름은 나날이 유명해졌다. 그는 마치 악귀처럼 발길 닿는 곳마다 반드시 피를 보았다. 그는 먼저 죄인의 목을 베고 나중에 상소를 올리는 등 상식적으로 생각하기 어려운 흉악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여름의 열기로 들끓던 대지는 보름 만에 마침내 폭우를 맞이했다. 캄캄한 하늘에 우레와 천둥이 몰아쳤다. 쏟아진 비는 하천을 이루며 흘러갔고 도로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 들어가 등잔에 불을 밝혔다.

    폭우가 몰아치는 가운데 오색찬란한 가마 한 대가 조용히 조 씨 가문의 저택 앞에 등장했다. 가마를 든 하인들의 행동은 제비처럼 날쌔고 가벼웠으며, 가마 주변은 쥐 죽은 듯이 조용했다.

    연경 사대부의 심장이나 다름없는 조 씨 가문의 대문이 쿵쿵 울렸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 오색찬란한 가마 옆으로 번개가 스쳐 지나갔다. ‘조부(赵府)’라 쓰인 편액 위로 음산한 기운이 어렸다.

    도롱이를 걸친 상 집사가 뛰어나왔다. 몇 걸음 사이 빗물에 흠뻑 젖은 그가 재빨리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았다. 그러나 바깥은 온통 어둠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망할!”

    욕을 뱉은 상 집사가 재빨리 문을 닫고 들어가려 할 때였다. 갑자기 오싹할 정도로 새하얀 팔뚝 하나가 불쑥 튀어나와 닫히려는 문을 붙잡았다.

    “이보게.”

    “으악! 귀… 귀신이다!”

    상 집사가 기겁해서 달아났다. 새카만 비를 뚫고 나온 새하얀 팔뚝은 익사하여 떠오른 시체처럼 으스스했다.

    현천기가 상 집사를 보며 음침하게 웃었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여윈 그의 피부는 석회에 표백된 것처럼 온통 새하얬다. 칠흑 같이 어두운 밤 기이할 정도로 눈에 띄는 자였다.

    “참으로 사람을 두렵게 만드는 저택이구나.”

    저택 안으로 발걸음을 옮기던 현천기가 상 집사가 떨어뜨린 열쇠를 밟았다. 그대로 몇 걸음을 더 걷던 그가 신발에 박힌 열쇠를 뽑아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역시 내 것이 아니라 그런지 불편하군.”

    웃음을 머금은 현천기가 한 발 한 발 앞으로 나아갔다. 마치 귀신을 이끌고 걷는 듯했다.

    그를 보고 놀란 하인들이 도처에서 소리를 질렀다. 마침 후원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조옥언과 장서열 역시 소란에 놀랐다. 담력이 센 조옥언이 큰 소리로 상 집사를 꾸짖었다.

    “무얼 허둥지둥하는 게야! 정말 귀신이라 해도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는 못할 것이다!”

    조옥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장서열이 수저를 내려놓고 밖으로 나갔다. 놀란 조옥언이 서둘러 딸을 붙잡으며 말했다.

    “나가지 말거라. 정말 귀신이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그러느냐.”

    현천기는 이미 내원의 정방 밖에 서 있었다. 번개가 번쩍 내리치자 장서열을 바라보며 미소 짓는 그의 음침한 얼굴이 드러났다. 조옥언이 헉 하고 신음소리를 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신 장서열은 곧 평정을 되찾았다. 오늘 현천기는 유달리 눈에 띄었다. 쏟아지는 폭우와 짙게 깔린 어둠도 그의 흉흉한 눈빛까지 감추진 못했다. 그의 외모는 그대로였지만 전신에서 풍기는 기운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조옥언은 빗물에 얼굴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황급히 앞으로 나가 딸을 감쌌다.

    “네… 네놈은 무엇이냐!”

    장서열이 어머니의 어깨를 다독이며 부드럽게 말했다.

    “어머니, 연경에서 이름난 현 시위(侍卫)를 몰라보시다니요. 그가 자신을 업신여긴 죄를 물어 어머니를 옥에 가두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요.”

    말을 마친 장서열이 두려움 없는 냉랭한 시선으로 제자리에 선 현천기를 응시했다. 현천기가 웃음을 터뜨렸다. 귀신이 흐느끼듯 탁하고 쉰 목소리였다.

    “서열 아가씨는 여전히 냉정하고 침착하군. 잠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까?”

    장서열이 비웃으며 현천기의 뒤에 선 자들을 바라보았다. 현천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걱정하지 마. 저들이 후원에 들어올 수 있었던 건 이미 남자가 아니라는 뜻이니까.”

    조금 전보다 나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의 목은 쉬어 있었다. 성대가 찢어져 다시는 회복할 수 없는 듯했다.

    “모두 물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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