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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62)화 (162/449)
  • 제162화

    원 씨의 명령이 왠지 내키지 않았던 장신성은 흉포하게 날뛰는 기 씨와 품안의 어여쁜 미인을 번갈아 바라보다가 결국 군말 없이 원 씨의 처분을 받아들였다.

    아버지의 태도에 일단 혼란스러운 마음을 밀어둔 장서양이 얼른 앞으로 나섰다.

    “그만하십시오! 사소한 일로 아침부터 소란 떨 것 없지 않습니까. 아버지, 대 이랑께서 이제 막 돌아오셨으니 우선 돌아가 쉬게 해 주십시오. 나머지 일은 나중에 다시 얘기해도 늦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녀들이 장서양의 말을 귓등으로라도 들을 리 없었다. 건장한 하녀들은 모두 원 씨가 사 온 이들이었다. 장서양이 누군지도 모르는 하인들은 그대로 기 씨를 잡아다 땔나무를 쌓아 놓는 창고로 향했다.

    장서양은 피가 거꾸로 솟았다. 생전 이런 수모는 처음이었다.

    장서목은 어머니와 형님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자 앞으로 돌진하여 하녀들을 발로 걷어차려 했다. 그러나 소처럼 건장한 하녀들은 오히려 그를 밀어 바닥에 쓰러뜨린 후 세차게 발길질을 했다. 원 씨는 이를 못 본 척했다.

    결국 울음을 터뜨린 장서영이 어머니와 두 오라버니를 부르며 울부짖었다. 핏기가 사라진 그녀의 얼굴에는 억울함이 가득했다.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갖다 주기 위해 막 뜰을 지나 주방에 가려던 소 씨가 이들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시 무표정한 얼굴로 자리를 떠나며 속으로 탄식했다.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것이 세상일이었다.

    과거 기 씨의 세 남매는 서출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감히 아무도 건드릴 수 없는 좌상부의 자제들이었다. 조옥언 역시 그들을 홀대하지 않았다. 그러나 원 씨가 집안을 장악하게 된 이상 세 남매의 고생은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소 씨는 말없이 걸음을 옮기며 원 씨가 딱히 잘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했다. 원 씨에게는 조 부인만큼의 능력과 위엄이 없으므로 식솔들을 강하게 억압하고 싸우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결국 각자 타고난 운명에 따라 살아갈 뿐, 어차피 기 씨의 세 남매도 태생적으로 존귀한 운명이 아니었다.

    난장판이 된 집안을 보며 울컥 짜증이 올라온 장신성이 다시 벌컥 화를 내려 했다. 그러나 원 씨가 그를 바라보며 차분하게 말했다.

    “노야, 시장하실 텐데 이곳은 소첩에게 맡기시고 우선 식사부터 하시지요.”

    기 씨가 입구 앞의 작은 나무를 꽉 끌어안고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소첩? 네년이 뭔데 감히 소첩이냐! 조옥언이 없으니 이제 내가 바로 장신성의 부인이다! 내가 부인이야! 노야! 저만을 아내로 맞이하겠다고 하셨잖아요! 노야, 약속을 지키세요!”

    뜰에 서 있던 원 씨가 자상하면서도 엄하게 입을 열었다.

    “노야, 먼저 식사하러 가시지요. 이곳은 소첩에게 맡기시고요. 네?”

    원 씨의 마지막 말은 많은 뜻을 내포하고 있었다. 장신성은 어젯밤 원 씨의 입에서 나온 ‘모두 노야를 위해서’라는 말을 떠올렸다.

    장신성은 출신이 비천한 데다 이제는 막돼먹은 여자가 된 기 씨, 그리고 단정하고 예의 바른 관리 집안 출신의 원 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이어 그의 머릿속엔 어젯밤 원 씨가 그에게 보낸 아리따운 첩이 떠올랐다.

    장신성은 마음을 굳혔다. 정실부인은 기 씨보다 원 씨가 제격이었다.

    그는 슬프게 울부짖는 딸의 외침과 도움을 청하는 두 아들의 눈빛을 무시한 채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기 씨가 목청이 터져라 고래고래 소리쳤다.

    “장신성! 국암사에서 내가 누구를 만났는지 잊었어요? 서영이를 생각하세요! 정말 일평생 그렇게 기 한번 못 편 채로 살 거예요? 장신성!”

    기 씨가 미친 듯이 발길질을 해댔지만 그녀를 옭아맨 하녀들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기 씨의 악다구니에 장신성의 발길이 잠시 멈칫했으나 이어 원 씨가 얼른 말했다.

    “그래 봐야 뭐 얼마나 대단한 우정을 쌓았겠습니까. 노야의 앞길은 노야 스스로 개척하실 수 있습니다. 소첩은 조 부인과 교분이 얕지 않으니 오늘이라도 조부(赵府)에 찾아가 노야께 도움이 될 만한 일이 있는지 묻고 오겠습니다.”

    원 씨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목소리로 조옥언과의 친분을 마지막 패로 꺼내들었다. 그녀는 장신성이 자신과 기 씨와의 사이에서 이해득실을 제대로 따지기를 바랐다.

    잠시 머뭇거리던 장신성은 이내 소매를 떨치고 자리를 떠났다. 기 씨가 미친 듯이 비명을 질렀다. 이에 원 씨가 소리 없이 손짓으로 기 씨를 단단히 혼내 주라고 명한 뒤, 어린 첩실을 향해 말했다.

    “의원을 부르고 싶으면 스스로 은자를 내서 치료를 받거라. 참을 수 있으면 참든지!”

    어린 첩실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다시 휙 고개를 돌린 원 씨가 구석에서 분노하며 훌쩍이는 기 씨의 세 남매를 향해 말했다.

    “뭘 멀쩡히 서 있는 게야! 잘못을 저질렀으면 응당 벌을 받아야지. 똑똑히 기억하거라. 여긴 더 이상 너희가 대접 받던 그 좌상부가 아니다. 주제에 감히 아가씨, 도련님으로 대우 받으려는 생각은 버리거라. 너희 아버지의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이제 너희도 짐작이 가겠지?”

    “…….”

    “정 그리 주인 행세가 하고 싶거든 가서 조 부인께 용서를 빌고 조부(赵府)로 돌아가거라. 부인께서 기 씨와 장신성 사이의 비천한 것들을 얼마나 기쁘게 거둬줄지 나도 참 궁금하구나!”

    말을 마친 원 씨는 반발하여 눈을 부릅뜨고 있는 세 남매를 힐끗 바라본 후 똑같이 소매를 떨치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가 떠나자 구경하던 첩실들 역시 이어서 자리를 떠났다. 과거 그들 남매에게 친절했던 첩실 역시 이 순간에는 모르는 사람처럼 그들을 외면했다.

    원 씨의 말처럼 이곳은 조부(赵府)가 아니었다. 이제 장 씨 가문의 자원은 한정되어 있었고, 이를 얻기 위해서는 싸움이 필요했다. 과거 장신성의 총애를 독차지했던 기 씨의 자녀들은 원 씨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이번 싸움은 명백히 원 씨의 승리였다. 첩실들로서는 원 씨가 대체 무슨 방법으로 노야의 신임을 얻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원 씨에게 힘을 실어준 이상 모두가 원 씨의 뜻을 따라야 했다.

    잠시 후, 손바닥만 한 뜰 안에는 기 씨의 세 남매만이 남았다.

    장서목이 바닥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 하녀가 온 힘을 다해 걷어찬 갈비뼈가 무척 아팠다. 그는 이제껏 다른 사람을 때린 적만 있을 뿐, 누군가에게 맞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조옥언 밑에서라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던 일이었다. 만약 당시에 하인이 이런 짓을 저질렀다면 조 부인은 주인에게 대든 노비를 엄히 다스렸을 것이다.

    그러나 장서목은 서둘러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지웠다. 어찌 뱀처럼 악독한 조 부인을 좋게 평가할 수 있단 말인가.

    옆구리를 감싸 안은 장서목이 눈물을 꾹 참으며 장서양을 불렀다.

    “형님…….”

    찬바람이 불어와 장서목의 목소리와 장서영의 흐느낌을 흩트렸다. 장서양은 엄청난 무력감을 느꼈다. 평온하기 이를 데 없던 생활은 완벽히 무너졌다. 조부(赵府)를 나온 그는 더 이상 도련님이 아니었고, 새로 정실부인이 된 첩실의 눈치를 봐야 했다. 평소 그의 비위를 맞추던 사람들은 남김없이 사라졌다.

    게다가 백계상학은 선심이라도 쓰듯 자신의 누이동생을 정실부인으로 맞이해 주겠다고 떠들고 있었다.

    하룻밤 사이에 모든 것이 변했다. 그의 앞에 높여있던 탄탄대로가 무너졌다. 그가 가장 경멸하던 조 부인이 사라진 후, 그는 모든 것을 잃었다. 심지어 그가 존경하던 어머니는 난봉꾼이 되어 나타났다.

    대체 고결하던 어머니가 어찌 저렇게 변한 것일까. 그녀에게서 과거 자애롭고 단아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조금 전 흉포하게 날뛰던 기 씨의 모습을 생각하면 장서양은 도저히 그 여인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마음이 무거워진 장서양은 제자리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과거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는 이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처지였다.

    ‘왜 이렇게 된 거지? 이래서는 안 되는데!’

    조옥언이 없다면, 그리하여 장 씨 가문의 적자와 적녀만 없어진다면 마땅히 자신과 동생들이 좌상의 적출이 되어 못다 한 도련님과 아가씨의 영광을 누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모든 건 그들의 생각과 달랐다. 심지어 장서양은 국자감에서 공부할 기회조차 잃은 상태였다. 그는 두렵고 당황스러웠다. 원 씨를 말려 달라 찾아간 그에게 어젯밤 장신성은 이미 자퇴 처리가 끝났으니 더는 국자감에 갈 수 없다고 잘라 말했다.

    장서양이 주먹을 쥐었다. 비바람이 몰아치려 하고 있었다. 장서목은 형님이 자신의 목소리를 못 들은 줄 알고 다시 소매를 잡아끌었다.

    “형님, 계속 여기 서 있을 거예요? 수업 들으러 안 가세요?”

    순간 장서목을 바라본 장서양은 아직 동생이 병영에 나갈 수 있다는 사실에 뛸 듯이 기뻐했다. 장서목은 예비병이었다. 어쩌면 그들 세 남매에게 아직 희망이 남아 있는지도 모른다. 장서양의 시선은 이제 꽃처럼 아리따운 누이동생에게로 향했다.

    장서양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했다. 꿩 대신 닭이라고, 원 씨를 구슬려 자신들을 그 밑에 넣어달라고 한 후 어머니 기 씨가 말한 지인에게 도움을 받는다면 그들에게도 아직 승산이 있었다.

    서둘러 정신을 차린 장서양이 누이동생의 눈물을 닦아주었다.

    “가서 어머니를 뵌 뒤 밥을 먹으러 가자. 오늘은 내가 직접 수업에 데려다 주마.”

    기 씨는 땔나무 창고에 갇혀 있었다. 사정없이 따귀를 맞은 그녀의 한 쪽 뺨은 퉁퉁 부어 있었고 몸에는 어린 첩실이 어지러운 틈을 타 마구 때린 상처가 있었다. 그녀는 거의 정신이 나간 채로 핏발이 가득 선 눈을 번뜩였다.

    땔나무 창고는 사방이 모두 벽이었다. 정남향에 달린 큰 창문과 문은 이미 잠겨 있었다. 나무틀로 만들어진 창문 위에는 창호지가 없어 그대로 햇빛이 비쳐 들어왔다.

    창 밖에 세 아이가 온 것을 본 기 씨가 창문에 뛰어든 채 쉴 새 없이 눈물을 흘렸다.

    “내 새끼들…….”

    한바탕 울고 난 기 씨가 갑자기 악을 쓰며 말했다.

    “조금만 기다려라. 이곳에서 나가면 어미가 국암사의 그 분을 찾아가마. 조만간 이 어미가 승상 부인이 되어 너희의 앞날을 바꿔 줄 것이다!”

    장서양은 좌절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만약 어머니의 말이 사실이라 해도 세 남매에게 보답할 능력이 없다면 그 분이 자신들을 도와줄 리 만무했다. 그럼 대체 누이동생이 무슨 빛을 보겠는가.

    장서양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걸 느꼈다.

    뒤이어 발생한 일은 더욱 암담했다. 장서목이 관학(官学, 나라에서 세운 학교)에서 쫓겨난 것이다. 그의 빈자리는 원 씨의 아들 장서해가 차지했다. 그야말로 마른하늘에 날벼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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