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9화
백계상학은 진심이었다. 장서양은 이렇게 허무맹랑한 말은 처음이라는 듯 정색하며 백계상학을 바라보았다.
“무슨 말을 그렇게 함부로 하느냐? 내 아버지께서는 풍윤 19년에 당당히 과거에서 장원급제 하셨다. 학식이 넘치는데도 이미 최고 자리에 오른 터라 오히려 가진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고 계신 분이시다.”
백계상학이 경악했다.
“장원급제가 다 뭐라고요?”
그는 아직도 장원급제를 대단하게 여기는 사람이 존재한다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장원급제한 이들 대다수가 평생 6품 관직을 넘지 못하고 생을 마감해요. 한림원 편수(编修, 문서의 기록 및 관리를 맡은 관리)도 감지덕지죠. 만일 좋은 기회를 만나지 못하거나 조정 대신이 따로 추천해 주지 않는다면 기껏해야 문학서 저작에나 영향을 미칠 뿐이에요.”
장서양은 돌연 일이 심상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도 그는 꽤 총명한 축에 속했다. 그는 아버지가 지난 몇 년 동안 어떠한 성과도 없이 그저 국공부에 의지하고 있었다는 걸 알았다. 그런데 아버지가 그 국공부의 딸과 이혼을 했으니 앞으로 관직을 보장 받을 수 없다는 건 불을 보듯 자명했다.
“내 아버지와 모친께서는 아직 정식으로 이혼한 게 아니다. 두 분은 잠시 다투셨을 뿐이야!”
장서양은 반사적으로 부인했다. 백계상학이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 형님도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때가 있군요. 어젯밤 이혼 문서에 이미 인장이 찍혔대요. 황제께서 직접 승인하셨다고 하니 되돌릴 수도 없고요. 이제 조 부인과 형님 아버님은 남남입니다. 그러니 형님도 더는 조 부인을 모친이라고 부를 필요 없어요.”
당황한 장서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백계상학까지 전부 알 정도로 소문이 퍼졌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안 돼! 아버지와 조옥언이 이대로 이혼하게 둘 수 없어!’
장서양은 다음 수업도 내팽개친 채 황급히 국자감을 나와 조례를 마친 아버지가 지나는 길목으로 향했다.
* * *
조정의 정세는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나날이 급변했다. 전쟁은 매일같이 긴장을 고조시켰다. 처음에는 상대를 떠보기 위해 거짓 공격을 하는 것이라 가벼이 넘기던 온건파는 눈앞에 닥친 전쟁의 잔혹함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사망자의 피가 강물을 이루었다. 전쟁터는 그야말로 참혹했다.
결국 황제는 충왕부에 사흘 내로 전장에 출정할 것을 명했다. 충왕과 장군들은 전장에 적응하기 위해 즉시 세자와 함께 군영 생활을 시작했다.
태평성대 아래 조정 대신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 여겼던 황제는 결국 관직을 정리하기로 결심하고 이부(吏部)와 내각에 감축 명단을 제출하도록 지시했다. 눈치 빠른 관원들은 이미 누가 관직에서 물러날지 알고 있었다.
장신성 역시 자신의 지위가 위태롭다는 걸 알고 있었다. 내각은 국가에서 가장 큰 권력을 쥐고 있었으나 승상인 그는 기껏해야 6부를 총괄하며 그곳에서 오가는 말을 전달하는 역할을 수행할 뿐이었다.
심지어 지금 그의 뒤에는 국공부가 없었다. 그는 관직을 박탈당하는 것은 물론, 향후 다시는 좋은 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이라는 걸 알았다.
장신성에게 지금처럼 간절하게 조옥언이 필요한 적은 없었다. 그는 관직이라도 보전할 수 있다면 조옥언이 무슨 짓을 하든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전부 받아들이겠다고 생각했다. 결국 그는 조례가 끝나자마자 조옥언에게 용서를 구하기 위해 지체 없이 조 씨 가문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자는 정신이 좀 나간 것 같지 않아? 분수도 모르고 조옥언과 이혼을 하다니, 제 손으로 관직을 버리는 게 아니고 뭔가?”
“자기가 잘난 줄 아는 게지.”
“나였다면 납작 엎드려 폐하의 여인을 지켰을 거야. 그저 한가하게 취미나 즐기면서 말이야. 위에서 돌봐 주는데 무슨 걱정이야? 아무 생각 없이 홀가분하게 살면 얼마나 좋아. 그런데 그자는 자기가 정말 대단한 인물이라도 되는 줄 알고 조옥언과 싸워댔지. 하여튼 요즘 젊은이들은 세상물정 모르고 그저 참지 못해서 탈이야.”
“억울하다잖아. 우스운 일이지. 솔직히 어느 것 하나 출중하지 않은 주제에 사람이 분수를 알아야지.”
“하지만 꼭 그렇게만 말할 수도 없네. 당시 누가 감히 조옥언과 혼인할 수 있었겠는가. 모두가 폐하의 보복을 두려워하지 않았는가. 폐하께서는 조옥언 때문에 거의 식음을 전폐할 지경에 이르렀는데, 장신성은 아무 것도 모르고 조 씨 가문의 선녀를 아내로 맞이했지. 폐하께 미운 털도 안 박힌 건 정말 운이 좋았어. 얼마나 많은 호걸들의 부러움을 샀나.”
“과거지사 말해 뭐하나. 지금도 폐하께서는 조옥언에게 끔찍이도 잘해 주신다네. 그 이야기 들었나? 납치 사건 이후에도 황제께서는 여전히 조옥언의 딸을 며느리로 맞고 싶어 하신다지.”
“폐하께서는 마음이 약하신 게 탈이라니까.”
“누가 아니래나. 과거 폐하와 서북 장군, 그리고 충왕. 세 사내가 조옥언 때문에 피 터지게 싸웠던 건 기억하는가?”
“무슨 소리! 충왕 그 녀석은 당시 볼 것도 없었어. 기껏해야 조옥언 뒤를 졸졸 쫓아다녔지 댈 것도 아니었네. 속으로 끙끙 앓았겠지.”
“하하, 서북에 있는 그 녀석이 조옥언이 이혼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어찌할 것 같은가? 집이고 아이고 다 버리고 달려오지 않겠어?”
사내가 속내를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수염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럴지도.”
“충왕이 제일 안 됐군. 왕비가 조옥언의 오랜 벗이라 당장 이혼하지는 못할 테니 말이야.”
나이 지긋한 원로들은 애석한 말투로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비꼬거나 경멸하는 기색 없이 오로지 그리움이 가득한 말투였다. 당시 두려움을 모르던 청춘들로 인해 얼마나 많은 어른들이 근심으로 애가 탔던가. 백옥으로 쌓아 만든 계단을 내려간 그들은 서서히 멀어져갔다.
얼이 빠진 장신성이 도무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거대한 사자 석상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무의식적으로 높게 솟은 황궁을 바라보았다.
‘황궁에 사는 군주께서 조옥언 그… 그 요녀를 좋아한다고?’
장신성의 사고가 일순간 정지됐다. 심지어 황제뿐만이 아니라 서북 장군과 충왕까지 조옥언을 좋아했다고 하지 않는가. 변방을 수비하는 커다란 서북 장군은 고사하고 언제 만나도 말 붙이기 어려운 충왕 같은 거물에게도 조옥언을 상대할 자격이 없었다니.
장신성은 갑자기 마음이 복잡해졌다. 모두 자신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높은 사람들이었다. 만약 과거 그녀를 포기해야 했던 남자들이 정말로 이혼 소식을 듣고 다시 그녀를 찾아온다면 아무리 자신이 반성하고 참회한다 한들 조옥언의 마음을 돌리는 건 불가능했다.
장신성이 고개를 흔들었다. 그렇지 않을 것이다. 어차피 그건 과거이고 지난일일 뿐이다. 한 여인을 한평생 잊지 못하는 남자가 어디 있겠는가. 어차피 조옥언은 이제 외모 말고는 볼 것 없는, 그저 성질 고약한 여인일 뿐이었다.
생각을 굳힌 장신성은 스스로를 열심히 설득했다. 아직 기회가 있었다. 그가 먼저 잘못을 인정하기만 한다면 모든 걸 제자리로 돌릴 수 있을 것이다. 조 노부인이 있는 한 조옥언은 감히 남편을 무시할 수 없었다.
장신성은 과거 국공부에서 어째서 자신을 선택한 것인지 의문을 풀게 되었으나 차라리 지금은 그 이유를 몰랐으면 싶었다. 어쩐지 황제는 그의 공적에도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고 원로들이 그를 대하는 태도는 애매모호했다. 돌이켜보니 모든 건 그가 그토록 대단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했기 때문이었다.
‘제아무리 대단해도 옛일일 뿐이다. 아이를 낳고 이혼까지 한 여인을 누가 좋아하겠는가!’
생각과 달리 발걸음은 오히려 빨라졌다. 만약 조옥언이 끝까지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조옥언이 혼전에 이미 순결한 몸이 아니었다는 걸 발설할 작정이었다.
* * *
조 씨 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대문 바깥에는 두 남자가 서 있었다. 한 명은 현왕(贤王), 나머지 한 명은 비왕(痞王)이었다. 둘 모두 황제의 동생으로 연경에서 명망 높은 인사였으나 평소 외출이 뜸해 얼굴을 보기 어려웠다.
중년에 이른 두 왕 중 한 명은 준수하지만 다소 험악한 인상을 가지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따스한 봄 햇살 같은 외모를 지니고 있었다. 양측 군대는 저택 밖에서 대치 중이었으며 서로 조금도 양보하려 하지 않았다.
예전이라면 벌써 집사가 나와 손님을 맞이했을 조 씨 가문은 지금은 파리 한 마리 들어가지 못하게 문을 닫고 있었다.
연경에서 두 왕의 전설은 이미 과거가 된 지 오래였다. 오랫동안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인물들이 오늘 조 씨 가문에 동시에 나타난 건 굉장히 뜻밖이었다. 성장 차림을 한 두 왕이 수레와 마차, 시위까지 거느리고 온 모습은 대단히 웅장하고 기세등등했다.
이들의 행렬에 인파가 몰리지 않은 건 우연이 아니었다. 태후가 가장 아끼는 막내 비왕은 한번 기분이 상하면 5척 거리까지 피를 보는 사람이었다. 그는 눈부시게 아름다운 장포를 입고 있었는데 오색찬란한 비단은 그의 몸을 빌어 왠지 모르게 사악한 분위기를 풍겼다.
“우애해 마지않는 둘째 형님, 일단 돌아가셔서 시나 몇 수 짓고 다시 오시지요.”
현왕이 우아하게 싱긋 웃었다. 그가 몰고 온 행렬의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그 패기만큼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아우야말로 먼저 돌아가서 어젯밤 함께한 미인을 찾아가는 게 어때? 집안의 평화를 위해서 말이야.”
눈을 부릅뜨고 상대를 노려보던 두 사람은 이내 홱 고개를 돌렸다.
그들은 과거 연경을 주름잡던 거물들로 한 명은 황제의 혈육, 다른 한 명은 태후가 아끼는 아들이었다. 황위를 탐했다는 오점을 제외하면 모든 게 완벽한 그들은 어디서든 사람들에게 대접을 받으며 거만하게 연경을 누비고 다녔다.
과거 현왕과 비왕이 유일하게 쥐락펴락 하지 못한 여인이 바로 조옥언이었다. 어렸을 때 그들은 그녀를 괴롭혀 울리는 게 취미였으나, 먼저 철이 든 황제가 조옥언의 곁에 머물자 더는 나설 엄두를 내지 못한 채 옛일을 후회하며 오늘에까지 이르렀다.
그리고 지금, 드디어 조옥언이 꼴 보기도 싫은 장신성을 내팽개쳤다. 그러니 곧장 달려와 그녀의 안부를 묻고 새로 기회를 엿보는 건 당연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조 씨 가문에 도착한 장신성은 눈앞에 펼쳐진 행렬에 놀라 펄쩍 뛰었다. 이렇듯 호화스러운 의장 행렬은 처음이었다. 마차의 네 귀퉁이에 조각된 용의 머리는 마치 살아 움직이듯 화려하기 짝이 없었다.
“무엄하다! 감히 왕야의 마차 앞에 서려 하다니!”
호위병들이 행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오는 장신성을 밀어냈다. 마치 전염병에 걸린 악귀를 쫓아내듯 무자비한 몸짓이었다.
‘친왕? 게다가 둘씩이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