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7화
“왜 우리가 은자를 내놓아야 합니까?”
“맞아요. 예전에는 조 부인이 다 알아서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노야의 돈을 혼자 차지하려는 게 아니고요? 노야께서는 오랫동안 최고 관직에 계셨는데 어찌 수중에 은자가 없겠습니까? 괜한 수작 부리지 말아요! 아직 정식으로 본처가 된 것도 아니고 혹 내일이라도 조 부인이 우리를 데리러 올지 누가 알아요? 그렇게 되면 그 뒷감당을 어찌 하려고요?”
원 씨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냉랭한 표정으로 말했다.
“모두 나를 믿지 못하는 것 같으니 다들 보는 앞에서 내가 먼저 은자를 내겠네!”
소 씨 역시 다른 여인들에게 반박할 기회를 주지 않고 얼른 돈을 꺼내 들었다.
“우리 아이들은 모두 딸아이라 밖으로 내보낼 수가 없다네. 난 먼저 아이들을 데리고 물러가겠네.”
돈을 내놓은 소 씨는 아이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눈치가 있는 여인들은 그저 버티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장신성이 자리에 없는 이상 이대로 버텨 봐야 결론이 날 수 없었다. 원 씨의 말처럼 우선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고 나머지 일은 내일 다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이들은 돈을 건넨 뒤 그나마 후원에 있는 좋은 방을 차지하기 위해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방이 모자란다는 걸 알고 있었던 탓이었다.
계속해 소란을 피우던 여인들은 눈치가 빠른 순서대로 돈을 내고 대청을 나갔다. 남아 있는 여인들은 아이가 없거나 지나치게 건방지거나, 혹은 노야의 총애를 철석같이 믿고 있는 첩실들이었다. 그녀들은 여전히 자리에 버티고 앉아 꼿꼿한 모습으로 원 씨와 맞섰다.
원 씨가 남아 있는 여섯 명의 첩실을 훑어보았다. 평소 눈엣가시 같았던 여인들이었다. 그녀는 조옥언이 아니었기에 이들에게 비단을 대접해 줄 만큼 여유가 넘치지 않았다. 게다가 몸단장이란 마음이 한가할 때나 신경 쓸 수 있는 사치일 뿐, 더 이상 노야의 총애는 권력이 될 수 없었다.
원 씨가 차갑게 코웃음 쳤다. 저들이 앞으로 며칠이나 고운 자태를 유지할 수 있겠는가. 그리하여 원 씨는 그녀들을 무시한 채 아들에게 나이 많은 형제들과 함께 쌀과 면을 사오도록 시켰다. 원 씨의 아들 장서해(章栖解)가 고개를 끄덕인 뒤 돈을 받아 나가자 원 씨도 자리를 떠났다.
순식간에 대청에는 서로 멀뚱히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미녀들만 남았다. 텅 빈 대청에는 휘장도, 병풍도 없었으며 마실 차도 없었다. 언제라도 꺼질 듯이 흔들리는 촛불을 제외하면 그들에게는 자신들을 괴롭힌 부인을 질책해 줄 노야 또한 없었다.
* * *
조옥언은 홀가분하기 그지없었다. 진작에 장신성을 내쳤어야 했다. 아이에게 양친 모두가 존재하는 가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노모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그녀는 일찌감치 쌀만 축내는 첩실들과 눈엣가시 같은 장신성을 버렸을 것이다.
그녀는 후회하지 않았다. 어차피 뒤에서 손가락질하는 남들의 이목은 중요하지 않았다.
“홍촉, 서열이는?”
“네, 부인. 아가씨께서는 옷을 갈아입고 국공부로 가셨습니다. 오늘 밤은 그곳에서 묵을 거라고 하셨습니다.”
홍촉의 말을 들은 조옥언의 표정이 일순간 굳었다. 순간 조옥언의 머릿속에 지팡이를 든 어머니가 장서열을 때리는 장면이 지나갔다. 이제 막 침대에 누운 몸을 다시 일으킨 조옥언이 이불을 젖히고 말했다.
“옷을 갈아입어야겠다. 국공부로 가자.”
이혼은 순전히 자신의 선택이었다. 딸아이가 자신을 위해 용서를 빌게 만들 순 없었다.
조옥언은 장신성과 저택을 가득 채운 그의 첩실들을 내보낸 후 이제까지 겪어본 적 없는 편안함을 만끽하는 중이었다. 이는 그녀의 어머니가 귀에 못이 박히도록 주장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남자가 없으면 온전한 집안이 될 수 없어 불안하다니,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심지어 그녀는 남편이 없어도 아들에게 좋은 혼처를 구해 줄 수 있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그녀는 정 안 되면 부유한 상인의 여식을 구하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깊은 밤, 조국공부의 내원(内院)은 어수선했다. 만약 중간에서 장서열이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리지 않았더라면 조 노부인의 지팡이에 불효녀 조옥언의 등은 아작이 났을 터였다.
조 노부인은 화병으로 쓰러질 것 같았다. 하지만 온화한 미소를 띤 손녀가 가슴을 짚은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조리 있게 이야기를 이어나가자 그녀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노부인은 압경탕(压惊药, 마음을 진정시키는 탕약) 한 그릇을 마신 뒤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 날, 볕이 없는 가을 아침은 흐릿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예전과 같았다.
장서열 역시 그대로였다. 까다롭게 몸단장을 마친 뒤에야 문 밖을 나서는 습관까지도 여전했다. 현천기에게 복수한 후 가슴에 맺힌 한을 푼 그녀는 가볍고 상쾌한 기분을 즐겼다. 이 좋은 기분을 유지하기 위해 장서열은 날이 밝자마자 마부를 불러 헌원가를 만나기로 했다.
몸소 손녀딸을 쫓아 나온 조 노부인은 건장한 호위 무사 몇 명을 붙여주고 헤어지기 섭섭한 얼굴로 그녀를 배웅했다. 그 뒤, 노부인은 지팡이를 들고 저택 안을 누비며 딸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있느냐! 이제 나이가 들었다고 늙은 어미의 말은 듣지도 않는 게냐!”
조 노부인의 며느리인 조국공 부인은 미소를 머금은 채 한쪽에 서서 이들을 쳐다보았다. 그녀는 하품을 하며 오늘은 날이 흐리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웬일인지 국공부를 떠났던 장서열이 다시 돌아왔다. 즉시 지팡이를 내린 노부인이 자애로운 눈빛으로 손녀를 바라보았다. 이리 보고 저리 봐도 마음에 쏙 드는 어여쁜 아이였다.
조옥언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어렸다. 지팡이를 피하느라 새로 한 머리가 헝클어져 흔들리고 있었다. 조옥언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어머니에게 소리라도 치고 싶었지만 다시 돌아온 딸의 모습에 그 즉시 단정하기 이를 데 없는 자세로 제자리에 섰다.
한적함을 달래고 있던 국공 부인이 남편이 가장 아끼는 조카에게 다가가 자상하게 물었다.
“잊고 간 물건이라도 있니?”
외조모를 보며 눈을 깜박이던 장서열이 조옥언을 향해 말했다.
“어머니, 국암사에 있는 그 여인은 이제 어머니와 관계없는 사람이니 그만 풀어 주시지요.”
말을 마친 장서열은 절을 올리고 다시 길을 떠났다.
장서열이 확실히 떠났음을 확인한 조 노부인이 다시 지팡이를 집어 들고 조옥언을 찾으려 했다. 미소를 머금은 국공 부인이 앞으로 다가와 시어머니를 부축하며 말했다.
“어머니, 아가씨는 집에 급한 일이 있어 먼저 가겠다고 하였습니다.”
국공 부인은 조국공부로 시집을 온 다음에야 아름다운 용모에 행동이 제멋대로인 손아래 시누이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혼인 후 성질을 죽인 시누이의 모습에 이제 어른이 다 되었구나 생각했으나 갑자기 이렇듯 엄청난 일을 저지를 줄이야. 정말이지…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노부인은 며느리의 말에 지팡이로 바닥을 탕탕 치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저런 철부지 딸을 낳았을꼬. 그래도 그나마 다행이구나. 그나마…….”
무엇이 다행이라는 건지 알 수 없게 노부인은 말끝을 흐렸다.
* * *
같은 시각, 장 씨 가문은 난장판이었다. 지난밤은 어떻게든 해결했으나 당장 오늘 아침부터 난감한 일의 연속이었다.
장신성은 조례에 참석해야 했지만 타고 갈 마차가 없자 한바탕 크게 화를 냈다. 결국 그는 소매를 떨치고 직접 걸어서 조례에 참석하러 갔다.
어젯밤 먹다 남긴 음식이 조금 남아 있었지만 아무도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원래도 맛이 없던 음식이 지금이라고 목에 넘어갈 리 없었다. 평소 온실 속의 화초처럼 살았던 첩실들은 다시 불만을 성토하며 난리를 피우기 시작했다.
수업을 들으러 가야 하는 아이들은 필요한 물품과 시중을 들어줄 하인이 없어 발이 묶였다. 아이들은 가까스로 몸단장을 마친 후 각자의 어머니에게 동전 몇 닢을 받아 굶주린 배를 안고 길을 나섰다. 그러나 이번에는 마차가 없었다.
‘마차도 없이 어떻게 수업을 가라는 거야!’
장서양은 더욱 당혹스러웠다. 어제부터 옷을 갈아입지 못한 데다 부릴 하인도, 돈을 달라고 할 어머니, 아버지도 없었다. 새로운 저택과 국자감까지의 거리는 상당히 멀었기에 걸어가면 지각할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결석할 수는 없었다. 최근 국자감은 무단결석을 엄하게 단속했다.
장서양은 생각 끝에 결국 원 씨를 찾아가 돈을 요구하기로 했다. 그러나 원 씨의 처지도 그리 녹록지 못했다. 이제 막 첩에서 정실부인이 된 처지인 데다 그나마도 오늘 정오에 장신성이 족보에 올려 줘야만 확정이 되는 신세였다.
그런 그녀에게 은자가 풍족할 리 만무했다. 오히려 은자라면 소 씨가 더 많을 터였다. 설령 있다 해도 그녀는 밑 빠진 독에 은자를 보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원 씨가 상냥한 눈으로 장서양을 쳐다보았다. 그는 이제껏 노야께 많은 사랑을 받은 아들이었다. 물론 조 부인은 그를 두고 볼 만큼 차고 넘치는 재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못 본 척 장서양이 무엇을 해도 그리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 씨는 달랐다. 아들을 출세시키기 위해 원 씨가 기댈 수 있는 건 오직 노야의 지위와 봉급뿐이었다. 이들 앞에 놓인 자원이 한정되어 있었기에 당연히 원 씨는 자신의 아들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했다.
원 씨에게 장서양은 걸림돌이었다. 어차피 적자와 서자는 절대 동등하게 기를 수 없었다.
“서양아, 안타깝게도 내게도 은자가 없구나. 네 아버지는 아침에 급하게 나가셨고 내가 해결해야 할 집안일은 산더미란다. 그러니 내 어찌 네게 은자를 내어 줄 수 있단 말이냐. 차라리 오늘은 집에서 쉬거라. 괜히 지각하여 벌을 받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니.”
원 씨는 사실 장서양이 아예 국자감을 그만두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국자감의 학비는 매우 비쌌고, 지금의 가세로는 감당할 수 없었다.
단지 사실을 이야기했을 뿐 원 씨에게 악의는 없었다. 장서양은 말없이 원 씨를 바라보다가 그대로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원 씨 역시 그를 붙잡지 않았다.
지금 장 씨 가문에 필요한 건 선량하고 자애로운 모친이 아니었다. 이는 원 씨가 정실부인을 자처한 뜻과도 부합하지 않았다. 게다가 현재 무일푼인 장 씨 가문의 정실부인 자리는 굳이 나서서 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만약 장서양이 아버지께 이 일을 일러 바쳐 그가 어젯밤 공표한 본처 자리를 취소한다면 그녀는 과연 누가 이 난장판을 수습할지 똑똑히 지켜보겠다고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