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6화
금을 빼앗긴 억울함과 물밀듯이 밀려오는 피로를 느끼며 장서영이 큰오라버니에게 기대 낮게 흐느꼈다. 그녀는 아직 씻지도 못한 상태였다.
장서양은 누이동생을 위로하며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인이 없었던 탓에 그들은 직접 동네를 이 잡듯이 뒤진 후에야 겨우 집을 찾을 수 있었다.
장서양은 침울했다. 방 안 가득한 사람들의 모습에 원망이 솟구쳤다. 잠시 침묵하던 그가 입을 열었다.
“우선 자러 가자.”
어차피 지금은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모두가 하인을 요구하고 있었지만 그들 중 누구도 은자를 내지 않았다. 이런 상태라면 어쩌면 영영 하인을 사오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를 고민하느니 차라리 충분히 쉰 후 대책을 마련하는 게 나았다. 내일이라도 조옥언을 찾아가 소란을 피운다면 그녀는 체면 때문에라도 그들을 무시하지 못할 것이다. 조옥언의 두 자녀는 아직 혼인 전이었다. 그녀는 두 사람의 혼사를 고려해서라도 반드시 타협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혼은 파기될 터였다.
나무 침대는 등이 아플 정도로 몹시 딱딱했다. 장서양은 옷을 벗어 장서영의 밑에 깔아 주었지만 그다지 효과가 있지는 않았다. 그가 추위에 쉴 새 없이 몸을 떨었다. 결국 그는 감기에 걸리지 않기 위해 누이동생의 권유로 다시 옷을 가져다 입었다. 세 남매가 한데 모여 서로 온기를 나누었지만 생전 처음 겪는 추위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았다.
잠시 뒤, 장서영이 눈물이 그렁그렁한 불쌍한 얼굴로 말했다.
“오라버니… 배가 고파요.”
그녀는 점심에 남긴 음식 생각이 간절했다. 평소 잘 먹지 않던 음식도 지금이라면 기쁘게 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라버니…….”
누이동생이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장서양이 속 편하게 잠이 든 장서목을 힐끔 바라보았다. 잠시 생각하던 그가 장서목을 흔들어 깨웠다.
“일어나라. 주방에 가서 서영이가 먹을 만한 게 있는지 찾아 보자.”
그들은 이제껏 사내라면 주방을 멀리 해야 한다는 말을 어긴 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자존심을 구긴 보람도 없이 주방은 텅 비어 있었다. 두 형제는 불을 지필 땔감조차 없어 오히려 자신들보다 깨끗한 주방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이런 광경은 처음이었다. 이전에는 비단 식사 시간이 아니더라도 항상 먹을 것이 풍족했다. 하지만 이제 주방에는 저절로 밥을 지어 바치는 일꾼들이 없었다. 그들이 직접 밥을 지어 먹어야 했다.
세 남매는 아연실색했다. 비로소 자신들이 처한 현실이 피부에 와닿았다.
허리에 찬 옥패를 만지작거리던 장서양이 배고파 하는 장서영을 바라보다 이내 결심이 선 듯 말했다.
“가자. 오라버니가 먹을 걸 사 주마.”
작은 저택은 여전히 난리법석이었다. 먹을 게 없는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그 아이들을 달래는 소리, 투덜거리는 소리, 각기 다른 사람들이 한마디씩 떠드는 소리에 장신성은 매우 짜증이 났다. 종일 소란에 시달린 그는 아래에 펼쳐진 난장판을 보며 속으로 분통을 터뜨렸다.
‘국공부가 뭐 그리 대수인가! 내 당당히 장원급제까지 한 몸, 조옥언이 없다 해서 내 벼슬길이 막히지는 않는다. 내가 조 씨 가문을 못 떠날 줄 알고?’
장신성은 더는 국공부에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국공부의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매번 시기를 엿보지 않았던가. 기왕 조옥언의 입에서 먼저 이혼 이야기가 나왔으니 나중에 후회해 봐야 전부 그녀의 몫이었다.
장신성은 아수라장이 된 여인들을 바라보다가 돌연 외쳤다.
“모두 입 다무시오!”
여인들은 잠시 조용해졌다. 하지만 그의 위엄에 도전이라도 하듯 적막을 깬 아이의 우렁찬 울음소리는 오히려 그를 우스꽝스럽게 만들었다.
장신성이 침통한 얼굴로 대충 삼 이랑을 가리키며 말했다.
“앞으로 당신이 이 집안의 본처로서 집안을 관리하시오!”
아이를 달래던 소 씨가 순간 우뚝 동작을 멈췄다. 누군가 입을 열기도 전에 그녀가 온화하게 말했다.
“노야께서 저를 신임하여 주시는 건 소첩의 복입니다. 허나 소첩은 노쇠하였고 자매들과 교류도 많지 않습니다. 또한 돌봐야 할 아이가 둘이나 있는 데다 딸아이는 몸이 약해 병치레가 잦으니 아무래도 여력이 없을 것입니다.”
자신의 말을 거역하는 소 씨의 태도에 장신성이 즉시 얼굴을 굳혔다. 한참동안 그녀를 바라보던 장신성은 이내 소 씨의 말에 수긍했다. 특히 상인 집안 출신인 걸 고려할 때 그녀는 본처로서 위엄을 세울 수 없었다.
그는 섣부른 결정을 후회하며 소 씨가 이를 수락하지 않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일국의 좌상인 자신의 정실부인이 어떻게 상인 집안 출신일 수 있단 말인가.
장신성의 시선이 다시 움직였다. 조금 전까지 난리법석을 피우던 여인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일순간 고요했다. 누군가는 본처가 되기 위해 뜨거운 눈빛을 던졌고, 또 누군가는 혹시나 하는 기대를 품으며 담담하게 결과를 기다렸다. 이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는 여인도 있었다.
장신성의 손가락이 사 이랑을 가리켰다. 그녀의 아버지는 7품 관원으로 멀리 척박한 곳에 거주하고 있었다. 말단이긴 하나 삼 년에 한 번 치르는 고과에서 인맥을 잘 활용한다면 어쩌면 보다 부귀한 지역으로 옮길 수 있을 것이다.
“당신이 맡으시오.”
사 이랑 원 씨는 멈칫했지만 줄곧 울지 않고 곁에 얌전히 앉아 있는 아들을 한 번 바라본 뒤 절을 올리는 것으로 이를 받아들였다.
원 씨를 바라보며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한 소 씨는 이내 고개를 숙인 채 계속해 딸을 달랬다. 원 씨는 어쩔 수 없다는 듯 소 씨를 향해 웃었지만 소 씨는 이미 시선을 돌린 후였다.
원 씨로서는 도박이나 다름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조옥언이 어떤 성격인지 잘 알고 있었다. 그녀가 아는 조 부인은 한 번 자신들을 내쫓은 이상 절대 이를 번복할 리 없었다. 그렇다면 첩실들 중 누군가는 정실부인의 빈자리를 채워야 했고, 그걸 다른 이에게 넘겨주는 건 어리석은 짓이었다.
소 씨는 수중에 모아둔 은자를 조옥언에게 바쳐 딸들의 혼처를 얻어 냈다. 그녀는 앞으로 딸들의 효도만 기다리면 될 몸이었다. 운이 좋다면 효성이 지극한 사위를 맞아 딸의 집에서 편한 노년을 보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원 씨에게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도박을 해 보기로 했다. 그간 그녀가 기울인 세심한 노력 덕분에 아들은 퍽 총명했다. 모자란 건 오로지 신분뿐이었다. 원 씨는 훗날 아들의 앞길에 방해가 없도록 정실부인의 소생이라는 신분을 안겨 주기로 했다.
세월의 흔적이 남은 원 씨의 예쁘장한 얼굴에 쓴웃음이 퍼졌다. 소 씨가 뭐라 생각하든 그녀는 물러설 수 없었다.
그러나 사실 소 씨는 원 씨를 원망하지 않았다. 그저 마음이 아팠을 뿐이었다. 조 부인의 밑에서 그저 편히 누리면 그만인 호화로운 일상이 사라진 지금, 가난한 대가족을 관리하는 건 상당히 골치 아픈 일이었다. 소 씨의 눈에는 원 씨의 고생길이 훤했다.
나이 어린 첩들의 아름다운 얼굴이 즉시 굳었다. 이건 좀처럼 얻기 어려운 일생일대의 기회였다. 조옥언이 갖고 있던 좌상부 정실부인의 자리라니!
그녀들은 평소 조옥언이 보여준 위엄을 떠올렸다. 그녀의 말 한마디는 곧 법이었다. 아침저녁으로 문안인사를 받는 모습은 또 얼마나 당당했던가.
‘그런 자리를 저 늙은 여자에게 넘겨준다고?’
자태가 고운 첩실 하나가 아직 돌도 지나지 않은 아이의 칭얼거림을 무시한 채 장신성을 향해 눈짓을 보내려 했다.
“노야…….”
“시끄럽다!”
잔뜩 짜증이 난 장신성에게 첩실과 노닥거릴 인내심 같은 건 없었다. 평소 그가 총애하던 여인들은 전부 빚쟁이가 되어 자신에게 먹을 것, 입을 것을 내놓으라며 아우성이었다.
“내일 관부에 가서 원 씨를 족보에 올릴 것이오. 이제부터 집안 살림과 단속 모두 원 씨의 소관이오.”
말을 마친 장신성은 더는 참지 못하고 소매를 떨치며 나가버렸다. 대청은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장신성이 사라지자 첩실들은 신랄하고 매몰찬 말투로 원 씨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괜한 트집을 잡는 이들부터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이들까지, 스무 명의 첩실들이 따져대는 소리와 아이들의 울음소리가 섞여 대청은 그야말로 아수라장이었다. 원 씨는 초조하고 불안했지만 곁에 조용히 앉아 있는 아들을 바라본 뒤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결연한 눈빛으로 높은 곳에 올라선 그녀가 옆에 있던 의자를 쾅 내던지며 소리쳤다.
“웬 소란이냐! 계속 떠드는 사람은 노야께 말씀드려 내일 당장 팔아버리겠다!”
살벌하게 입을 놀리던 여인들의 목소리가 순간 작아졌다. 그러나 말투는 여전히 고까웠다. 평소 장신성이 가장 총애하던 어린 첩실이 아리따운 여인들 사이에 선 채 교태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동생은 차마 경솔하게 굴 수가 없네요. 조금이라도 언니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팔려갈 테니까요.”
입을 가리고 웃는 어린 첩실의 모습은 고혹적이었다. 금세 이를 흉내 내게 된 나이 어린 첩실들이 교태 넘치는 자태로 원 씨를 조롱하기 시작했다. 높은 자리에 있어도 위엄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여인이 아닌가.
원 씨는 이에 아랑곳없이 차가운 눈으로 첩실들을 바라보았다. 아무리 어여뻐 봤자 조 부인과 비교하면 그 발끝에도 못 미치는 것들이었다. 원 씨에게 그들은 그저 소란 피우기를 좋아하는 계집에 불과했다.
“언니, 시간이 이리 늦었는데 소첩들은 뭘 먹어야 할까요? 설마 저희를 굶기진 않으시겠지요. 조 부인 덕분에 저희는 모두 피부에 윤기가 흐를 정도로 잘 먹고 살았는데, 언니도 당연히 그리 해 주시는 거지요?”
조옥언의 권력이 사라지자 어린 첩실들은 하나같이 기고만장하여 큰소리를 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원 씨는 이들을 무시했다. 당장은 눈앞의 문제를 해결하는 게 우선이었다.
“계속 시끄럽게 굴면 봐주지 않을 것이야! 모두 알겠지만 노야께는 은자가 없다네. 아이들이 모두 굶주려 있고 동생들도 하루 종일 돌아다니느라 피곤하겠지. 지금 당장 하인을 사오기에는 무리가 있으니 일단은 내 말대로 하세.”
원 씨가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소 씨를 바라보며 무언의 지지를 얻은 원 씨가 이어 말했다.
“각자 은자 2관(贯) 씩을 내놓으시게. 그것으로 나이 많은 아이에게 쌀과 면을 사오게 하여 일단 오늘 밤을 넘기세. 남은 은자로는 내가 내일 아파(牙婆, 하인을 사고 파는 여인)를 찾아가 집안일을 할 하인과 노야의 마차를 사오겠네. 만약 은자가 남는다면 모두에게 돌려줄 것이야. 혹 따로 시중들 하녀를 사고 싶은 사람은 내일 아파에게 직접 돈을 지불하시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