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5화
줄곧 잠자코 있던 장서양이 자기도 모르게 장서열을 쳐다보았다. 장서열이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낯선 사람을 대하듯 말했다.
“오늘 낮에 있었던 일입니다. 이 저택은 내 어머니께서 혼인할 때 가져온 것이고, 집안의 하인들 역시 모두 국공부에 계신 내 외숙께서 보내준 이들이지요. 장 대인께서 모든 식솔들을 데리고 떠났으니 저잣거리에 나가 사람들에게 물으면 그들의 거처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장서열이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두 형제가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큰 소란이 있었는데 아무도 알려주지 않았다고?’
그러나 이들은 정말로 아무 것도 듣지 못했다. 장서양은 국자감에, 장서목은 병영에 머물다 저녁이 되어 돌아오던 참이었다. 반나절 만에 이렇게 큰일이 일어났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장서목은 이 모든 게 너무 황당무계하다고 생각했다. 여기는 자신의 집이었다. 내 아버지의 저택인 좌상부! 그런데 하루아침에 조 씨 가문으로 바뀌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장서열은 두 형제를 보며 조소를 감추지 못했다. 먹여주고 입혀주고 재워준 것도 모자라 하인을 붙여 시중까지 들게 하였는데, 어쩌다가 저런 배은망덕한 이들이 튀어 나왔는지 모를 일이었다.
‘전생에서 네놈들은 내 어머니의 재산을 모조리 가로챘지. 우리가 너희에게 제공한 게 부족해서? 그럴 리가. 그저 너희의 욕심이 끝도 없었을 뿐이다.’
장서열은 전생에서 자신이 부족했음을 인정했다. 그녀를 원망했던 수많은 사람들처럼 기 씨의 자녀들 또한 못된 적녀에게 한이 맺혀 자신에게 복수한 것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이번 생에서만큼은 최대한 몸을 사렸다. 그들을 홀대하지 않은 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면 적어도 이번 생에서는 그들도 다른 모습을 보여줘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여전히 원망으로 가득 차 있었다.
‘나보다 출신이 미천한 게 억울해서? 우리가 해준 게 부족해서?’
하나같이 말이 안 되는 이유뿐이었다.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들에게는 자신을 싫어할 이유가 충분한 것 같았다.
장서열이 끝내 그들을 싫어하고 멸시하게 된 건 다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기 씨의 세 남매를 적절히 손봐 주지 않으면 오히려 그들을 더욱 무시하는 것이 되리라.
그러나 이제 그들에게는 더 이상 그녀를 곤경에 빠뜨릴 만한 능력이 없었다. 장서열이 그들에게 딱히 신경을 쓰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세 남매에게 관심을 가지면 가질수록 그들은 더욱 기고만장해져 정말로 무슨 억울한 일이라도 당한 양 어머니를 공격하려 들 것이다.
장서열은 장서양을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장 공자, 안타깝게도 내 어머니와 장 대인은 오늘 이혼하셨습니다. 모든 절차가 끝났어요. 믿지 못하겠으면 내일 호부에 가서 알아보십시오. 이 집은 내 외조부께서 어머니께 내리신 저택으로 장 대인의 사유 재산이 아닙니다. 장 대인께서 군말 없이 나간 것도 그 때문이니 공자도 이만 받아들이고 돌아가세요. 이제 저택에 장 씨 가문 식솔들은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장서열이 부드럽게 그들을 바라보았다.
‘어때? 내가 얼마나 너희를 친절하고 너그럽게 대하는지 보거라. 만약 이것마저 경멸과 멸시로 받아들인다면 그건 너희들이 약해 빠진 탓이다.’
그녀는 갑작스레 수많은 형제자매를 잃게 되어 아쉬운 소녀처럼 굴었다. 이를 마주한 장서양의 눈에 원망이 스쳐 지나갔다.
‘또 저렇게 베푸는 척을 하는군. 우리가 거지인가? 아니면 마음대로 가지고 놀다가 버리는 장난감이야?’
초조한 눈으로 장서양을 바라보던 장서목이 별안간 장서열을 노려보며 소리쳤다.
“웃기는 소리! 우리 벼루와 옷가지는? 형님이 평소에 그린 그림값이 얼마나 나가는지는 알아? 그것들은 다 어디 있지? 우리를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건 너희가 우리 물건을 탐내고 있기 때문이지!”
앳된 눈을 부릅뜬 장서목이 기세등등하게 소리쳤다. 장서열이 놀랍다는 듯 작게 입을 벌렸다. 마침내 장서열은 그들이 배은망덕한 원수라는 걸 확신했다.
“그 벼루와 붓은 내 어머니의 돈으로 산 것들인데…….”
장서열이 무척 억울하다는 듯 천천히 말했다. 두 눈을 깜박이는 그녀의 시선은 노골적인 조롱을 담고 있었다.
장서목이 순간 입을 다물었다.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바로 말을 할 수가 없었다. 그는 분명 장서열이 생트집을 잡고 있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침묵하던 장서목이 작은 얼굴을 붉히며 한 마디를 토해냈다.
“그 그림들은 우리 서양 형님 거야!”
장서열이 얼굴에 남아있던 마지막 온기를 지웠다. 그 즉시 가문의 큰아가씨로 돌변한 그녀가 마치 벌레를 보듯 경멸하는 투로 그들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닌 게 아니라 장 공자께서도 방법을 강구해 주시지요. 내 어머니께서 사신 붓과 종이, 먹, 벼루를 전부 글을 쓰기 전으로 되돌릴 수 있는 방법 말입니다. 그게 아니라면 난 관아에 가서 당신들이 우리 집의 물건을 허락도 없이 멋대로 사용했다고 고발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제껏 두 사람이 사용한 것들이 모두 최상품의 물건이라는 건 아시지요? 배상이 가능할지 모르겠군요.”
“너… 너!”
장서목이 장서열을 향해 삿대질했다. 멍하니 넋을 놓고 있거나 남자를 홀릴 줄만 알았지 이토록 언변이 좋을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너……!”
급히 아우를 잡아끈 장서양이 차가운 얼굴로 차분하게 말했다.
“그만하고 가자.”
결국 두 사람은 발걸음을 옮겼다. 장서목이 마차를 끄는 하인에게 외쳤다.
“뭘 멍하니 있느냐! 가자니까!”
그러나 하인들은 움직이지 않았다. 그들 중 장서양을 모시던 하인이 웃는 얼굴로 두 손을 모으며 나왔다.
“도련님, 죄송하지만 소인은 조 씨 가문의 노비입니다. 더는 도련님을 모실 수 없음을 용서하십시오. 소인은 이곳에서 도련님의 행복과 장수를 빌겠습니다. 부디 장원급제하십시오.”
그의 행동을 본 나머지 하인들 또한 똑같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두 도련님의 행복과 장수를 빌겠습니다. 부디 장원급제하십시오. 노비들은 여기서 작별 인사 올리겠습니다.”
장서목이 고래고래 욕을 퍼부었다. 장서양은 그저 침묵을 지킨 채 바닥에 꿇어앉은 하인들을 힐끗 바라본 뒤 아우를 끌고 자리를 떠났다. 한 번도 이런 수모를 당한 적이 없었던 장서목은 장서양에게 질질 끌려가는 와중에도 큰 소리로 외쳤다.
“이 한 치 앞도 못 보는 것들! 평소에 내가 얼마나 잘해 줬는데 먹을 것과 마실 것을 나눠준 주인을 감히 배신해? 이 배은망덕한 놈들! 나를 배신하고 무사할 것 같으냐?”
그들 곁으로 순찰을 돌며 지나가던 관병들이 말했다.
“시끄럽게 떠드는 것을 금한다.”
장서목은 즉시 입을 닫았다. 장서양이 사죄하자 관병들은 더는 죄를 묻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공손하게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던 하인들은 멀어져 가는 예전 주인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해야지. 그게 무슨 봉창 두드리는 소리야. 우리가 언제 주인을 배신했어?’
그들을 사온 사람도, 그들에게 품삯을 주는 주인도 조옥언 한 사람뿐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여태껏 최선을 다해 두 도련님의 시중을 들었을 뿐더러 도련님들을 도와 떳떳하지 못한 일도 해본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 모든 건 조 씨 가문의 하인으로서 행한 일일 뿐, 자신들의 주인인 부인께서 도련님들을 내쫓고 장 대인과도 이혼을 했다면 당연히 두 도련님을 따를 이유가 없었다.
노비들은 곱게 자란 도련님, 아가씨보다 눈치가 빠른 자들이었다. 그들이 보기에도 장신성은 딱히 충성할 만한 가치가 없었다. 게다가 제아무리 뛰어난 도련님, 아가씨라 할지라도 서출인 이상 정실부인의 비호가 없다면 결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는 걸 그들은 잘 알고 있었다.
이제 장서양과 장서목은 아무리 뛰어난 학식을 자랑해도 기껏해야 현령(县令, 현의 장관) 정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다. 그 또한 아주 오랜 기간 공적을 쌓아야 가능했기에 그 사이 그들을 모시는 하인에게 얼마나 많은 고생이 뒤따를지는 불을 보듯 훤했다.
물론 그들의 주인이 두 도련님이었다면 기꺼이 고생을 감수해야 했을 테지만, 실상은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 누구든 노비들이 주인을 가려 섬긴다고 탓할 수 없었다.
지켜보던 상 집사가 입을 열었다.
“뭘 멍하니 서 있느냐! 어서 들어오지 않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노비들이 얌전하게 상 집사의 뒤를 따랐다.
장서열은 장서양과 장서목이 사라진 방향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돌리다 문득 서풍엽과 시선이 마주친 그녀가 자기도 모르게 서둘러 변명했다.
“난… 사실 그들이 이런 일을 당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해요.”
말을 마친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인 채 허리춤에 묶인 향낭을 만지작거렸다. 서풍엽이 애정 어린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웃음을 터뜨렸다. 조용한 거리를 울리는 웃음소리가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서풍엽이 웃으며 말했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나였다면 방금 마주친 관병들에게 두 형제가 시끄럽게 떠든 죄를 묻게 하고 이틀은 감옥에서 썩게 했을 거야.”
장서열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두 눈은 하늘에 뜬 달보다도 더욱 밝게 반짝였다. 그녀가 귀엽게 골을 내며 말했다.
“하지만 난 선량한 사람인걸요?”
서풍엽은 순간 먹구름이 끼어 있던 지난 며칠 동안의 답답함이 걷히는 느낌을 받았다. 잃어버렸던 진귀한 보물을 되찾은 기분이었다.
“맞아. 우리 서열이는 세상에서 가장 착하지.”
얼굴을 붉힌 장서열이 뒤를 돌아 대문 안으로 미끄러지듯 들어갔다.
“이제 그만 집으로 돌아가요. 몸에서 땀 냄새가 진동해요.”
장서열은 입가에 미소를 띤 채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지만 마음은 발걸음과 정반대의 방향을 향해 있었다.
저택 안으로 사라지는 장서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서풍엽은 눈에 굳건한 결심을 채우며 미소를 거뒀다. 그녀가 힘닿는 데까지 노력했으니 이제부터는 자신이 나설 차례였다.
서풍엽이 몸을 돌렸다. 황실과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 * *
장서양에게 태어나서 이런 굴욕은 처음이었다. 집사에게 문전박대를 당한 것도 모자라 관병에게 훈계를 들었으며, 저잣거리에 나가 백성들의 구경거리가 된 채 쫓겨난 식구들의 행방을 물어야 했다.
그들은 물어물어 지극히 평범한 저택 앞에 도착했다. 엉망진창이 된 집안을 보자 그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오라버니들의 등장에 허겁지겁 달려온 장서영이 그들에게 매달렸다. 불쌍하기 짝이 없는 표정으로 그녀가 눈물을 보였다.
“큰오라버니, 드디어 오셨군요. 우리 집이… 우리 집이 없어졌어요. 아버지께 은자가 없어 하인을 못 사는 바람에 오라버니들을 데리러 갈 수가 없었어요. 무사히 찾아와서 정말 다행이에요, 오라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