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4화
울며 보채는 아이를 안은 첩실들이 벌떼처럼 대청에 모여들었다. 말수가 적은 여인은 침묵으로 항의했고, 재잘대기를 좋아하는 여인은 울고불고 난리를 피웠다.
“노야, 이를 어쩌면 좋단 말입니까?”
한 여인이 손수건으로 눈가의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맞습니다. 노야, 방법을 찾아 주세요. 아이들은 계속 우는데 대부분의 자매들은 아이를 달래 본 적이 없습니다. 이를 어쩌면 좋아요?”
“노야, 소첩은 견딜 수 있지만 아이들이 고생을 어떻게 참겠어요. 우선 하인부터 사 와야 하지 않을까요? 방에 불부터 피우게 하세요.”
대청은 순식간에 난리법석이 되었다. 장난감을 빼앗던 아이들 간의 싸움은 이내 첩실 간의 싸움으로 번졌다. 어떤 첩실은 잃어버린 귀걸이를 찾으며 이를 본 사람이 있는지 큰 소리로 물었다. 그 밖에도 초조하게 성토하는 소리와 탄식하는 소리 등 모두가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몹시 시끄러웠다.
장신성은 후원의 아름다운 여인들이 이렇게 사람을 짜증나게 할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녀들에게서 평소 입가를 가린 채 옅은 미소를 짓던 조용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들의 말소리에 장신성은 머리가 다 지끈거렸다. 이들은 부군의 곁에도 하인이 없다는 것을 모르는 모양이었다.
게다가 하인을 부리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인에게는 먹을 것, 입을 것, 그리고 품삯이 필요했다. 장신성은 그제야 녹봉 외에 자신에게 어떠한 수입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장신성은 스스로의 무능함에 욕지거리가 나왔다. 다른 수입이 없다니. 이렇게 오랜 세월 동안 따로 뒷주머니조차 차지 못한 자신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 * *
밤의 장막이 내리자 어두운 수풀 속에서 가을 매미가 울었다. 조 씨 가문은 모처럼 조용하고 청정했다. 첩실들이 사라지자 하인들 역시 한가로웠다.
조옥언은 이미 초 마마와 송 마마에게 첩실들의 시중을 들던 하인들을 정리해서 노비 문서를 돌려주고 집으로 다시 보내거나 팔라고 분부한 상태였다.
집에 돌아온 장서열은 어머니에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모두 고했다. 조옥언은 잠시 구염락을 칭찬했을 뿐 그 밖에 다른 건 모조리 무시했다.
잠시 뒤, 장서열은 등잔 아래에서 장부를 보는 조옥언에게 호기심을 금치 못하고 물었다.
“아버지에게는 정말 아무런 재산이 없나요?”
조옥언이 촛불 사이로 딸을 바라보았다.
“당연하지. 이 어미가 한 푼이라도 남의 손에 쥐여 줄 바보로 보이느냐?”
물론 장신성은 과거 재산을 옮기려는 시도를 한 적이 있었다. 이에 조옥언은 친정의 큰오라버니에게 부탁해 장신성을 호되게 혼내 줬고, 그 이후 그는 다시는 재산에 손을 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조옥언은 머리가 비상한 사람이었다. 그녀가 탁탁 주판알을 튕기며 빠르게 손을 움직였다. 낭랑하게 울리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어미 말을 새겨 두거라. 마음은 넓게 가지되 은자는 꽉 쥐고 있어야 한다. 언젠가 네가 누군가를 미워하게 되었을 때, 은자라면 그를 비참하게 만들 수 있단다.”
조옥언은 딸이 변변치 못한 남자와 혼인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최소한 집안에서는 주인으로 군림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장서열은 아버지가 걱정스러웠다. 혹 자신이 혼인한 후 장서영이 후궁이 되면 본격적으로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시작하는 걸까.
입구에서 시녀의 보고를 들은 홍촉이 종종걸음으로 들어왔다.
“부인, 아가씨. 세자께서 또 대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신다고 합니다.”
차를 마시던 장서열의 손이 순간 움찔했다. 찻잔 위로 발그레한 홍조가 떠올랐다. 마치 찻잎의 개수를 세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가 찻잔 속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조옥언이 미심쩍은 눈길로 딸에게 입을 열었다.
“뭐 하는 게야. 얼굴이 찻잔 속으로 들어가겠구나.”
얼른 고개를 든 장서열이 얼굴을 붉혔다. 그날 그녀는 모든 게 끝났다 여기고 그에게 막말을 퍼부었다. 그녀는 앞으로 서풍엽을 어떻게 마주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지조 없고 철없는 여인이라 생각하지 않을지 걱정스러웠다.
‘그러기만 해 봐!’
왠지 부끄러워진 그녀가 얼른 고개를 숙였다. 혹 서풍엽이 마차 안에서의 밀회를 불만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은지도 걱정이었다.
장서열은 자기도 모르게 자꾸만 고개를 숙였다. 그날 서풍엽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갖은 억지를 부린 자신의 행동을 떠올린 탓이었다.
장부를 내려놓은 조옥언이 까닭 모를 눈으로 딸을 쳐다보았다.
“감기라도 든 게야? 얼굴이 빨갛구나. 이번 일은 태자가 처리하겠다고 하였으니 됐고. 조금 전까지 충왕비가 너를 내치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마침 풍엽이 왔구나.”
장서열은 부끄러워 숨고 싶었다. 큰 산을 넘은 후 비로소 들끓던 감정을 진정시킨 그녀는 도저히 얼마 전처럼 제멋대로 굴 수 없었다.
“어서 가 보거라. 사람을 이리 기다리게 해선 안 되지. 아니면 어미가 내일 당장 너희 둘을 사원으로라도 데려가 혼례를 올려 주랴? 시간을 끌어 봐야 무얼 하겠느냐.”
펄쩍 뛴 장서열이 더욱 얼굴을 붉혔다.
“나가볼게요.”
“그래도 풍엽이가 너보다 훨씬 철이 들었구나. 소중히 대해 주고 괜한 투정 부리지 말거라.”
고개를 끄덕인 장서열이 여전히 부끄러운 기색으로 급히 방을 나섰다. 서풍엽이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녀의 발걸음은 매우 느렸다. 온몸이 다 긴장되어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완정은 의아한 눈길로 장서열의 뒤를 따랐다. 아가씨는 난생 처음으로 요조숙녀처럼 행동하고 있었다. 뒤를 따르는 농교 역시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 쉴 새 없이 완정과 눈빛을 교환하며 몰래 웃음 지었다.
한참을 망설이던 장서열은 더는 서풍엽을 기다리게 할 수 없어 대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고개를 내밀었다. 그는 의기소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마치 무거운 짐을 짊어진 무력한 늙은이 같았다.
서풍엽은 현천기를 잡지 못했지만 황제는 먼저 손을 써 현천기를 잡았다. 그는 연인의 소원을 들어주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서열이는 이미 자신의 것이었다. 그런 그녀가 어떻게 황실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만에 하나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그녀 역시 앞으로 마음 편히 살 수 없을 터였다. 특히 구염락과 황실 사람들은 결코 그녀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대문이 열린 걸 알게 된 서풍엽이 미친 듯이 기뻐하며 단숨에 장서열을 품에 안았다. 그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서열아, 내 말 잘 들어. 난 지금 당장은 너의 바람을 들어줄 수 없어. 하지만 내게도 다 생각이 있어. 난 네가 폐하의 제안을 거절했으면 좋겠어. 혹시 충왕부가 엮일까 봐 걱정되는 거라면 내가 왕부를 버리고 데릴사위가 될게. 현천기를 잡아오지 못한 내가 너무 못났다고만 생각하지 말고 잘 생각해 봐. 나 말고 누가 너를 원하겠니? 넌 내 거야. 오직 나만의 것!”
장서열은 감동을 채 느끼기도 전에 당혹스러워졌다. 그를 본 반가움이 이내 수치와 분노로 돌변했다. 그는 말을 가려서 할 필요가 있었다.
골이 난 장서열이 서풍엽을 때리려 했다.
‘내가 네 거라고? 게다가 갑자기 데릴사위라니, 어머니의 재산을 노리는 게 아니고?’
장서열은 속으로 폭풍처럼 서풍엽에 대한 원망을 늘어놓았지만 이와 달리 입꼬리는 위로 올라간 채였다.
“서열아, 난 대주국에서 막강한 권력을 휘두를 수 있는 사람은 아닐지도 몰라. 하지만 누구보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인 건 분명해.”
눈썹을 치켜올린 장서열이 괜한 트집을 잡으며 말했다.
“사랑이 밥을 먹여 주진 않죠. 난 막강한 권력이 더 좋아요.”
마음이 급해진 서풍엽이 얼른 말했다.
“안 돼, 서열아. 그러면 안 돼. 입궁이라는 게 얼마나 위험한…….”
순간 서풍엽이 멈칫했다. 그녀의 말투가 이전처럼 돌아와 있었다. 너무나도 익숙한 장서열의 표정에 얼굴을 찌푸리던 서풍엽이 이내 웃으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달빛 아래에 선 그녀를 한참이나 넋 놓고 바라보던 서풍엽은 곧 뛸 듯이 기뻐했다. 감정이 북받친 그가 장서열을 안고 빙빙 돌았다. 그녀는 찬란하게 웃고 있었다.
“거절했구나! 정말 잘 했어!”
장서열이 몸을 버둥거렸다.
“내려줘요. 빨리요!”
앞에는 시위가, 뒤에는 시녀들이 지켜보고 있었다. 장서열은 부끄러움에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긴 채 괜스레 하늘 위의 달을 바라보았다.
서풍엽 역시 어색함을 느꼈다. 며칠 전 깊은 사랑을 나누었던 시간이 다소 어색하면서도 친밀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서풍엽은 사내로서 그녀를 이렇게 부끄럽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그 날의 일을 후회하지 않았다. 그가 진지하게 그녀의 손을 잡고 말했다.
“내게 말해 줘. 황궁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장서열은 손을 통해 전해지는 그의 온기를 느꼈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느낀 안도감이었다. 그녀는 차분하게 황궁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녀가 어떻게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는지도 빼놓지 않았다.
서풍엽의 눈 속에 파란이 일었다가 사라졌다. 그녀의 대처가 훌륭했으므로 나머지는 그가 나서서 매듭지어야 했다.
“우리 서열이는 정말 속이 깊구나.”
장서열의 속 깊은 생각은 이따금씩 사랑스러우면서 또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서풍엽은 지금 이 순간이 몹시 기뻤다. 그녀가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며 자신을 밀어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녁 바람이 불었다.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준 그에게 문득 자제력을 잃었던 그날의 일이 떠올랐다.
돌연 뒤에서 차가운 코웃음이 들렸다. 장서양과 장서목이 돌아오고 있었다.
장서양은 두 사람이 다시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새삼 장서열의 뻔뻔함에 탄복했다. 이렇게 빨리 세자를 꼬여 내다니.
장서양이 서풍엽을 향해 절을 올렸다. 장서목 역시 공수(恭手)했다. 그리고 두 형제는 더는 풍기문란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두 사람을 지나쳐 저택 안으로 들어가려했다.
시위가 긴 창으로 입구를 막아섰다. 더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된 장서목이 순간 분노하여 소리쳤다.
“무엄하다! 감히 누구의 앞길을 막는 것이냐! 죽고 싶은 게냐!”
소란이 일자 조용히 옆문을 통해 나온 집사가 장서열과 서풍엽을 보고 얼른 먼저 인사를 올렸다. 잠깐 진땀을 흘리던 그는 과거 집안에서 자못 높은 지위를 자랑하던 두 도련님 앞에서 꼿꼿이 허리를 펴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소리를 지르는 게요? 장 씨 가문의 두 도련님께서 우리 조 씨 가문 앞에서 지금 무슨 행패요! 당장 가시오. 어서!”
“조 씨 가문이라니? 상 집사, 정녕 우리가 누군지 모르는가? 지금 주인을 무시하는 게야?”
차갑게 코웃음 치는 장서목에 아랑곳없이 상 집사가 대문 위에 걸린 편액을 짚으며 곧장 말했다.
“잘 보시오. 위에 뭐라고 써 있소? 설마 두 도련님께서는 아직 우리 조 부인께서 남편을 내쳤다는 이야기를 못 들으신 게요? 호부(户部)의 관리가 이미 이혼 수속을 마쳤소. 이제부터 장 씨 가문과 조 씨 가문은 각자의 길을 가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