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3화
밀려드는 생각을 떨쳐 내며 다시 마음을 다잡은 구염락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아무 걱정 마세요, 누님. 현천기 일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아바마마의 일도 제게 생각이 있어요. 저야 어떤 여인을 맞이하든 상관없지만 만에 하나 누님이 오게 된다면 정말 적응하기 어려울 것 같아요.”
온화한 목소리로 농담을 건네는 모습만큼은 어릴 적 모습과 똑같았다.
“하지만 전란으로 어지러운 상황이라 세자와 예정대로 혼사를 치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구염락의 말에 장서열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건 급하지 않아.”
그녀는 그것만으로도 족했다. 전쟁이 끝나면 모든 게 다시 시작될 것이다. 게다가 구염락이 약속한 일이니 더욱 안심할 수 있었다.
다시 아름다운 인생이 눈앞에 펼쳐졌다. 장서열은 몹시 기뻤다. 구염락에게 쏟은 다년간의 노력이 드디어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의 곁으로 바짝 다가간 그녀가 친근하게 말을 이었다.
“고마워. 난 권 씨 가문의 아가씨도 몹시 훌륭하다고 생각해. 두 사람이 백년해로하기를 기도할게.”
구염락이 담담하게 웃으며 말했다.
“배웅해 드릴게요.”
“아니야.”
장서열이 서둘러 거절했다. 떠나기 전 그녀가 조용히 구염락의 곁으로 다가가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정말 날 위해 그 일을 해결해 줄 수 있어?”
구염락은 장서열이 다가오자 가슴이 쿵쿵 뛰는 걸 느꼈다. 그녀의 말이 끝난 후 심장이 다시 가라앉았지만 여전히 웃음 띤 얼굴로 그가 답했다.
“서열 누님을 위해서라면 최선을 다할 거예요.”
순간 장서열의 눈이 반짝였다. 새벽의 첫 햇살처럼 부드러운 눈빛이었다.
“고마워.”
장서열은 전생에서 자신을 냉궁에 내팽개쳤던 그를 용서해 주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원한 따위야 오래 품고 있어 봐야 좋을 게 없었다.
“이만 갈게.”
그녀가 가볍게 절을 올리며 장난스레 말했다.
“태자 전하, 소인은 이만 물러가옵니다.”
반짝 빛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던 구염락이 미소 지었다. 그는 그녀의 뜻대로 배웅 없이 그녀가 시종들과 함께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는 사랑하는 이는 반드시 곁에 두고 직접 지켜 주어야 안심하는 사람이었다.
다음에는 이렇게 쉽게 그녀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을 것이다. 오늘 장서열은 그를 속였고,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척해야 했다. 현천기의 말은 사실이었다. 만일 그녀의 신변에 정말로 위협이 있었다면 서풍엽의 이름 앞에서 그녀는 결코 웃지 못했을 것이다.
‘서열 누님, 스스로 명예를 떨어뜨릴 정도로 제가 싫은 건가요?’
하지만 달리 뾰족한 수가 없었다. 그게 사실이라 해도 구염락은 여전히 그녀를 잡고 싶었다. 그것이 그녀의 미움을 사게 되리라는 걸 알면서도…….
* * *
집을 잃은 장신성은 식솔들을 데리고 객잔으로 향했다. 소매를 뒤지던 그는 그제야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장신성이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렇다고 조옥언에게 돈을 요구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면 필시 그녀는 그간 그가 받아온 녹봉을 낱낱이 따진 후, 지난 스무 해 동안 사용한 비용을 모조리 청산하려 들 것이다.
복스럽게 살이 찐 객잔 주인이 미륵보살처럼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친히 마중을 나왔다.
“좌상 어른. 투숙이신가요, 아니면 식사를 하시나요?”
장 씨 가문의 일은 이미 온 연경에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지만 객잔 주인은 애써 이를 모른 체했다. 소문에 대해 캐묻고 싶은 심정은 굴뚝같았지만, 그보다 장신성이 객잔에서 묵고 갈 만큼 충분한 은자를 지니고 있는지가 더 중요했다. 만약 그가 외상을 요구한다면 큰 손해를 입게 될 것은 불 보듯 뻔했다.
객잔 주인의 손에 들린 주판을 힐끗 바라본 장신성은 언제라도 값을 치를 수 있다는 듯 기름이 반들반들한 얼굴을 치켜들었다. 그는 무일푼으로 내쫓긴 곤궁한 처지를 드러낼 생각이 없었다. 자신을 향한 주변의 시선이 점점 늘어나는 것을 느낀 그가 얼른 말했다.
“별실에서 식사를 하겠소.”
그는 도저히 이 많은 식솔들을 데리고 다른 곳으로 갈 수가 없었다. 자신에게 쏟아지는 호기심 어린 시선만으로도 이미 충분히 짜증이 났다.
장신성의 말에 객잔 주인은 계속해 싱글벙글 웃었다. 여전히 사근사근한 그에게서 이전처럼 쉬지 않고 알랑거리던 태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실례지만 대인께서는 몇 칸의 별실이 필요하신지요?”
객잔 주인은 여전히 장신성의 뒤로 늘어선 행렬을 모른 척했다. 그 사이 구경꾼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다. 심지어 남의 일에 참견하기 좋아하는 이들은 일층 창문에 머리를 들이 밀고 그들을 노골적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분노한 장신성이 대충 외쳤다.
“보면 모르오!”
깜짝 놀란 객잔 주인이 서둘러 말했다.
“여봐라! 대인께 방을 안내해 드려라. 별실 열 칸을 사용하실 것이다!”
허겁지겁 위로 올라가려던 장신성이 순간 비틀거렸다.
‘열 칸? 그렇게 사람이 많다고?’
별실 한 칸을 쓰는 데 필요한 은자는 열 냥이었다. 열 칸이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그저 잠시 머물다 가는 것만으로 은자 백 냥이 사라진다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본 장신성의 안색이 순식간에 굳었다. 이제까지 이토록 많은 첩실을 두고 있는 줄 몰랐던 탓이었다. 게다가 첩실들은 각각 연령이 다른 아이들을 데리고 있었다. 강보에 싸인 아기를 제외하고도 거의 칠십여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장신성은 난처한 기색을 숨긴 채 우선 첩실들과 아이들을 방에 들여보냈다. 그들 모두와 객잔에 묵는 건 아무래도 불가능할 것 같았다. 그에게는 집과 하인을 구해 첩실들을 정착시켜야 할 의무가 있었다.
별실에 들어온 장신성의 시선은 자연스레 조금 전 조옥언에게서 은자를 받아 나온 첩실들에게로 향했다. 그는 우선 부유한 상인의 여식인 삼 이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과거의 미모를 간직하고 있었으며 평소 성격이 유순해 딱히 소란을 피운 적도, 실수를 저지른 적도 없었다.
게다가 장신성에게 시집올 당시 그녀가 친정에서 받아 온 재산은 적어도 만 냥이 넘었다. 그래서 그는 먼저 삼 이랑의 귓가에 속삭였다.
“소아(苏儿, 삼 이랑), 내 현재 지니고 있는 은자가 없소. 혹시…….”
고개를 든 삼 이랑이 가만히 두 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담담하게 말했다.
“노야, 저는 부인께 은자를 전부 드리고 나왔습니다. 아시겠지만 저희 아이들이 혼기가 찼기 때문에 나오기 전 부인께 좋은 혼처를 마련해 달라고 부탁드렸답니다.”
삼 이랑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슬하에 두 명의 딸을 둔 그녀는 모범적인 첩실의 표본이었다. 두 아이의 터울이 한 살 차이인 것만 보아도 그녀가 한때 매우 총애 받았던 여인임을 알 수 있었다.
그녀는 일순간 초라한 처지가 되었음에도 그다지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다. 오로지 두 딸을 위로하는 것 외에는 어떤 것도 관심이 없어 보였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삼 이랑의 목소리는 모든 첩실들에게 똑똑히 전달되었다. 첩실들은 당황했다. 저택을 나오며 받은 은자를 장신성에게 건네는 건 한마디로 그냥 날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삼 이랑을 바라보던 첩실들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녀는 셈이 빠른 여인이었다. 오히려 조옥언에게 은자를 돌려주고 큰 기회를 사지 않았는가. 조옥언은 일전에 삼 이랑의 큰 딸을 꽤 괜찮은 집안의 자제와 맺어 주려 했다. 비록 적출 소생은 아니었지만 수재라고 소문이 자자해 어쩌면 훗날 장원급제를 한 사위를 두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나머지 첩실들은 이제 아이의 혼처를 부탁할 곳이 없었다. 조옥언이라는 뒷배를 잃었으니 이제 그들은 뇌물을 써서라도 아이들의 장래를 기약해야 했다. 이런 때 은자를 내놓는 건 앞날을 망치는 짓이었다. 은자가 없다면 장차 누가 그녀들의 생사를 신경 써 주겠는가.
첩실들은 하나같이 몸을 움츠렸다. 비교적 적은 은자를 받아 나온 첩실은 좋은 말로 꽁무니를 뺐고, 꽤 많은 은자를 받아 나온 이들은 점잖은 자세로 아이의 몫이라며 말을 잘랐다. 이들은 대부분 연배가 있는 첩실들로 비교적 세상 물정에 밝았다.
장신성의 닦달에 청산유수로 말을 잇던 이들은 결국 큰 손해를 보는 것처럼 각각 열 냥씩 은자를 내놓았다. 장신성은 겨우 은자 삼백 냥을 모을 수 있었으나 여전히 별실 열 칸에서 숙식까지 해결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장신성은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기꺼운 마음으로 은자를 내놓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평소 그토록 나긋나긋하고 유순하던 여인들은 어려운 상황에 처하자 누구 한 명 나서서 자신을 희생하려 하지 않았다.
‘그동안 내가 내린 상이 얼마인데!’
그러나 장신성은 잊고 있었다. 그가 내린 상 또한 모두 조옥언의 재산이라는 사실을. 따라서 첩실들은 저택을 나올 때 그가 내린 어떠한 것도 갖고 나오지 못했다.
삼백 냥의 은자를 든 장신성의 시선이 문득 장서영의 금(琴)으로 향했다. 귀한 금이기에 값을 매기기 어렵다는 이야기를 얼핏 들은 기억이 있었다.
아버지의 뜻을 눈치챈 장서영이 금을 꼭 끌어안았다. 사부님이 내린 선물이었다. 이것만큼은 절대로…….
그러나 장신성이 아랑곳하지 않고 말했다.
“서영아, 전당포에 잠시 맡겨만 두자꾸나. 나중에 이 아버지가 반드시 찾아 주마!”
딸에게 반찬을 집어 준 삼 이랑이 온화한 손길로 어린 딸의 입가를 닦아주었다. 그녀는 마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못 본 사람 같았다.
불쌍하게 입을 삐죽인 장서영이 결국 아버지를 위해 품 안의 금을 건네주었다. 그가 금을 들고 나가자 장서영은 탁자 위에 엎드려 엉엉 울었다.
여기저기서 그녀를 위로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그녀의 가슴에 쌓인 억울함은 풀 수 없었다. 금은 사부님이 그녀에게 선물로 준 것이었다. 금이 없으면 앞으로 어떻게 수업을 듣는단 말인가.
장신성은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겨우 작은 저택 하나를 얻어 돌아왔다. 세가 비싼 건 말할 것도 없거니와 일 년치 보증금을 지불해야 했기에 십시일반으로 모은 은자는 순식간에 동이 나버렸다. 연경의 집값이 결코 낮지 않은 까닭이었다.
장신성이 구한 저택은 부촌의 구석에 위치해 있었다. 세도가들이 모여 사는 마을에 못 미치는 곳으로 겉은 화려해 보였지만 특히 치안이 좋지 않았다.
텅 빈 저택은 협소했다. 새 저택으로 들어간 첩실들은 처음에는 별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저 잠시 거처를 옮긴 것뿐, 곧 부인의 화가 풀리면 자연히 원래의 저택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하지만 온실 속의 화초로 산 그녀들은 실제로 초라한 생활이 피부에 와닿은 다음에야 그 실상을 깨닫게 되었다. 그들의 곁에는 수발을 들어 줄 하녀도, 비단 이불과 모피도 없었다. 제비집탕이나 인삼탕이 없는 건 물론이고 심지어 미리 준비된 뜨거운 물조차 없었다.
그들은 모두 망연자실했다. 당장 입을 옷가지와 잠을 잘 만한 침대가 없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하인이 없으면 대체 누가 불을 피우고 밥을 지어 준단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