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2화
구염락의 시선이 돌연 현천기에게로 향했다. 그의 눈 속에 돌던 음산한 기운이 점차 피투성이가 된 야차처럼 잔혹한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깜짝 놀란 현천기가 뒤로 한 걸음 물러섰다.
“전… 전하…….”
억지로 장서열을 밖으로 내보낸 구염락이 철문을 잠근 뒤 그녀에게 말했다.
“탁자 위에 있는 등잔불을 돌리세요.”
순간 장서열의 얼굴에 일렁이던 불쾌감이 단박에 흩어졌다. 그녀는 기뻐하며 날 듯이 달려가 평범하기 짝이 없는 등잔불을 돌렸다. 구염락은 세상 누구보다 가혹한 고문에 탁월한 사람이었다.
장서열은 심장이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그녀는 증오로 새빨갛게 충혈된 눈을 부릅뜨고 하마터면 그녀의 모든 걸 잃게 만들 뻔한 남자를 쳐다보았다.
‘차라리 죽여 달라고 애원하게 만들어 주마!’
등잔불을 회전시키자 굉음과 함께 한쪽 벽면이 열렸다. 벽 너머에서 쏟아져 나온 수많은 사내들은 현천기를 발견한 후 마치 먹이를 찾은 짐승처럼 눈을 번뜩거렸다.
순간 구염락이 장서열의 눈을 가렸다. 서로의 체향을 맡을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그러나 장서열은 그의 손을 치워 버렸다. 그녀는 두려움과 인내, 증오를 품은 현천기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현천기, 두려워?’
두렵다는 단어로 다할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수많은 손이 현천기에게 뻗어지는 것을 시작으로 구역질나도록 잔인한 장면이 이어졌다. 현천기는 스스로에게 이건 인과응보라고 쉬지 않고 되뇌었다. 그래야만 장서열을 원망스럽게 쳐다보지 않을 수 있었다.
그의 옷은 순식간에 넝마가 되었다. 현천기는 충분히 반격할 수 있었음에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구염락을 바라보던 시선을 조용히 떨어뜨린 채 자신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묵묵히 받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곧 내장이 뒤틀리는 듯한 고통에, 반사적으로 자신의 위에 올라탄 사내를 때려 쓰러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구염락이 금방이라도 큰 파장을 일으킬 듯 눈을 가늘게 뜨자, 현천기는 치켜든 손을 다시 아래로 내렸다.
그는 뼈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땅바닥의 진흙을 꽉 움켜쥔 채 무차별적인 폭력을 견뎠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를 향해 달려드는 사람은 점점 많아졌다.
현천기는 더 이상 죗값을 달게 받겠다는 말조차 내뱉을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광채를 잃은 그의 눈 속 깊은 곳에는 어떠한 폭력에도 굴하지 않는 근성이 있었다. 마치 감옥의 모든 이들은 그저 소란이나 피우는 망나니들일 뿐, 자신은 여전히 그대로라는 듯이.
장서열은 속이 울렁거렸다. 비틀거리며 뒷걸음질을 치던 그녀가 순간적으로 구염락의 손을 잡았다.
“그를 놓아줘.”
이제 충분했다. 그러나 구염락은 부드러운 눈빛과 정반대인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누님, 이건 시작일 뿐이에요. 무언가를 하기로 했으면 끝을 봐야 합니다. 안 그러면 상대의 오기를 완전히 꺾지 못해요. 결국 손해를 보는 건 누님이고요.”
“…….”
“현천기를 상대하려면 평범한 방법으로는 불가능해요. 그의 본성에 담긴 거만함과 초연함을 무너뜨려야 하죠.”
구염락은 장서열의 어깨를 감싸며 부드럽게 등을 토닥였다. 연인을 달래듯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가 속삭였다.
“참기 힘들다면 보지 말아요.”
그가 충격에 휩싸인 장서열을 품에 안았다. 그의 눈 속에 분노의 폭풍이 맹렬하게 휘몰아쳤다.
‘넌 감히 나의 서열 누님을 건드렸다.’
현천기에게 반드시 알려 줘야 했다. 그를 죽느니만 못하게 만들 방법은 부지기수이며, 과거 그가 맛보았던 고통은 새 발의 피라는 것을.
현천기는 의식이 또렷했고 무공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그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구염락은 현천기의 자신감과 오만을 모두 무너뜨리고 있었다.
장서열이 별안간 구염락의 품에서 발버둥 쳐 빠져나왔다. 그녀가 뒤를 돌아 위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이제 됐으니까 그만해! 현천기는 충분히 대가를 치렀어.”
장서열은 결코 후회하지 않았다. 이것으로 현천기와는 서로 비긴 셈이었다. 그러나 그가 창백하게 질려 있는 모습은 어쩐지 자신과 헌원가의 머리를 백지장처럼 만들었던 그날의 공포를 떠오르게 했다.
장서열이 그곳을 벗어나자 구염락은 부하를 시켜 그녀의 뒤를 따르게 했다. 그가 다시 등잔불을 돌려놓자 순식간에 사내들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손으로 입가에 맺힌 피를 닦은 현천기가 구염락이 남아 있는 감옥 내부를 바라보며 냉소를 지었다. 장서열이 원망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모르게 그녀의 희미한 향기가 떠올라 정신이 아찔했다.
여인의 하찮은 동정 따위가 무엇이 중요하단 말인가. 장서열은 끝까지 자리에 남아 자신이 앙갚음을 당하는 장면을 지켜보았어야 했다.
구염락이 핏자국을 밟으며 안으로 들어섰다. 현천기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구염락은 눈 한 번 깜작이지 않은 채 현천기의 손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현천기가 서열 누님을 만졌다고 했지……. 과연 어느 쪽 손이었을까?’
현천기의 앞에 웅크리고 앉은 구염락이 탐욕스러운 눈으로 그의 손을 바라보았다. 아쉽게도 그녀의 숨결은 조금도 남아있지 않았다. 현천기는 실망한 표정을 짓는 구염락을 바라보며 속으로 웃음을 금치 못했다.
‘장서열, 네가 포기했다고 다 끝난 것이 아니구나. 여기 이제 막 나를 미워하기 시작한, 너보다 한 수 위인 악마가 있으니 말이다. 내가 단번에 죽지 않고 이런 굴욕을 당했으니 네 원한도 조금이나마 가셨겠지!’
한참이나 현천기를 지그시 쳐다보던 구염락은 이내 실망한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철문을 지나 첫 번째 바닥을 밟은 구염락이 발에 살짝 힘을 가하자 현천기가 갇혀 있는 감옥의 바닥이 열리며 그가 아래로 떨어졌다. 숨이 턱턱 막히는 열기와 사람을 삶아 버릴 듯한 뜨거운 물이 끓어올랐다.
“급하지 않으니 천천히 해라.”
아직 구염락에게는 현천기의 누이동생이라는 패가 남아 있었다. 그가 아무리 누이동생을 꽁꽁 감춰 뒀다 해도 찾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현천기, 안 그러냐?”
구염락의 눈에 선혈이 낭자하는 물보라가 용솟음쳤다. 혈액을 타고 조금씩 흥분이 꿈틀대며 날뛰기 시작했다. 구염락은 강제로 이를 억누르면서 감옥을 빠져나왔다. 약을 먹어야 할 시간이었다. 나머지는 관리인이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
구염락은 조급하지 않았다. 물론 자신이 사랑하는 서열 누님은 오로지 서풍엽과 함께할 생각밖에 없었기 때문에 마음을 아프게 하는 여인이자 어디서부터 잘못됐는지 알 수 없는 두려움의 근원이었다.
그녀와 가까워지는 건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멀어지는 건 더욱 싫었다. 그녀는 너무나도 쉽게 자신의 마음을 어지럽히고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 서열 누님은 오직 서풍엽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전에는 그러지 않았다. 그때 그녀의 눈에는 오로지 구염락뿐이었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며 모든 사랑과 관심을 그에게 주었다.
그 시절 구염락은 어쩌면 그녀에게 이유 없이 보채고 제멋대로 응석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는 감히 그러지 못했다. 혹여나 장서열이 보여주는 포용이 사라질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구염락에게 장서열만큼 아름다운 여인은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음을 조심스럽게 감춰두고 소중히 아꼈다. 자신이 그녀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를, 그리하여 아름다운 그녀에게 어울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다.
하지만 눈 깜짝할 새에 그의 아름다운 바람은 이룰 수 없는 환상이 되었다. 언제부턴가 장서열의 눈에는 다른 남자가 있었다. 그보다 훌륭하고, 그보다 손쉽게 그녀의 환심을 살 수 있는 남자.
그녀는 지체 없이 자신을 버리고 멀리 달아났다. 바보 같은 구염락은 제자리에 버려둔 채!
구염락은 있는 힘을 다해 마음을 가라앉히며 지하 감옥을 나왔다. 그는 자신의 마음이 또 흐트러졌다는 것을 알았다.
장서열은 창백한 얼굴로 초록 잎사귀가 달린 나무 밑에 몸을 기대어 있었다. 타는 듯한 붉은 색과 짙은 녹색이 대비된 풍경은 조금 전 구염락이 건드린 그녀의 잔인한 마음을 가라앉혀 주었다. 그녀는 다시 상쾌한 기분을 되찾았다.
구염락은 더는 예전처럼 용기를 낼 수 없었다. 달려가 서열 누님이라고 외칠 수도, 그녀와 거리낌 없이 대화를 나눌 수도 없었다.
그는 두려웠다. 아무리 높은 지위에 올라도 그녀의 마음속에 여전히 자신이 없을까 봐 몹시 두려웠다.
구염락이 나오는 것을 본 장서열의 혈색이 돌아왔다. 그의 수법은 언제나 악랄했다. 게다가 이번 일은 자신이 자초한 것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녀는 굳이 요조숙녀인 척하지 않기로 했다. 처음 보는 광경에 충격을 받았을 뿐, 현천기는 응당 받아야 할 대가를 치른 것이었다.
“그자는…….”
구염락을 뒤따르며 장서열은 남몰래 기뻐했다. 만일 구염락이 자신의 속옷을 되찾아 준다면 모든 게 원래대로 돌아갈 것이다. 그녀는 서풍엽과 혼인해 평생 그와 백년해로 할 수 있었다. 구염락이 나서주기만 한다면, 그가 과거의 정을 생각해 자신을 도와주기만 한다면 예정대로 서풍엽과 혼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장서열이 간절한 눈으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만 고개를 끄덕여 준다면 어떠한 소원도 다 이룰 수 있었다.
고개를 숙인 구염락은 사무치게 그리워하던 여인을 쳐다보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길은 지나치게 눈부셨다.
“이미 사람을 보냈으니 안심하세요. 현천기는 생존할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지 않을 겁니다.”
장서열은 당연히 그의 말을 믿었다. 역시 구염락이라면 영원히 현천기의 입에 재갈을 물리고 다시는 간교한 꾀를 쓰지 못하게 그를 저지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이러한 믿음은 그녀의 잠재의식에서 기인한 것으로, 그녀는 구염락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의 발밑에 무릎을 꿇고 그를 찬양할 만한 충분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며칠 만에 처음으로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을 지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린 홀가분함이 느껴졌다. 이제는 농담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면 구염락은 어렸을 때부터 이미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가 시종일관 오만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그는 그 냉담한 얼굴로 수많은 여인을 총애했으며,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대역죄라도 지은 것처럼 무섭게 굴었다.
장서열의 미소에 구염락의 목소리가 자기도 모르게 가벼워졌다.
“웃으시네요.”
“어렸던 열셋째가 벌써 다 컸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정말 대단해. 너에게 진심으로 탄복했어.”
구염락은 자신이 서풍엽만큼 대단하냐고 묻고 싶었다. 만일 그렇다면 어째서 그녀는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 걸까.
그는 과거의 자신이 더러워서 싫은 건지, 아니면 과거 그녀에게 꼬리를 흔들고 구걸을 일삼던 자신이 우습게 보이는 것인지 묻고 싶었다. 만약 다음 생이 있다면 그는 굶어 죽을지언정 다시는 그녀를 좋아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