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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51)화 (151/449)
  • 제151화

    그가 장서열을 향해 마치 어린아이를 어르듯 말했다.

    “서열아, 짐은 너를 도와주려는 것이다. 하여 널 짐의 곁에 둘 수 있다면 얼마나 좋으냐. 현천기의 일은 짐에게도 중대한 결심이 필요한 일이다. 어쩔 수 없이 너와 거래를 해야 하는 짐의 심정을 네가 헤아려 주었으면 좋겠구나. 게다가 이건 너에게도 나쁠 것이 없는 제안이지 않느냐.”

    구염락의 차가운 말투에 넋을 놓고 있던 장서열은 이내 정신을 차리고 황제의 말에 동의한다는 듯 유순하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저는 더 이상 순결한 몸이 아닙니다.”

    장서열은 누가 진짜 악취미를 가진 사람인지 보여주겠다는 듯 눈앞의 황제를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 속에 한줄기 통쾌함이 스쳐 지나갔다.

    순간 마음을 칼로 베인 듯한 아픔에 구염락이 주먹을 꽉 쥐었다.

    ‘그 정도로 나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건가? 저런 말을 내뱉을 정도로?’

    구염락은 이미 현천기에게 모든 걸 물어 본 상태였다. 현천기는 결단코 그런 일은 없었다고 답했다. 구염락은 현천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연실색한 황제가 구염락을 쳐다보았지만 구염락은 결연한 눈으로 황제에게 고개를 저어 보였다. 이제 오히려 뒤로 넘어갈 지경이 된 것은 황제였다.

    ‘순결한 몸이 아니라는데 여전히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고?’

    황제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며 다시 한번 아래에 선 장서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녀는 확실히 남달랐다. 가만히 서 있는 것만으로도 시선을 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다. 막 피어나기 시작한 꽃봉오리 같은 자태에 차갑고 도도한 분위기는 뭇 남성을 매혹시키기에 충분했다.

    황제는 아무래도 구염락을 위해 용모가 단정한 시녀를 물색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과거 네 어미도 그러했지…….”

    황제가 탄식하며 침통한 표정을 지었다.

    “궁 안에 여인은 셀 수 없이 많으니 어차피 네가 태자의 여인이 되지 않는다 해도 아쉬울 것은 없다. 허나 네가 곤경에 처한 것을 안 이상 내 그냥 두고 볼 수는 없느니라. 태자라면 너를 책임지기에 부족함은 없을 것이다.”

    깜짝 놀란 장서열의 몸이 굳었다. 그녀는 황제의 말에 구염락이 경멸하는 기색을 숨기지 않기를 바라며 자기도 모르게 즉시 구염락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쉽게도 구염락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마치 아무것도 듣지 못한 사람 같았다.

    잠시 당황했지만 장서열은 이내 이해했다. 구염락은 언제나 다른 사람에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못된 짓을 벌여놓고 징계 당하지 않을 방법만을 궁리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에게 이런 이야기는 그저 사소하고 하찮은 일에 불과할 것이다.

    장서열은 빈틈을 찾기 어려운 황제의 지략에 거의 감동할 지경이었다. 이제 그녀는 현천기를 죽일 수도, 추문에 대한 약점도 깨끗이 지울 수 있게 되었다. 그녀는 곧 높은 지위에 올라 만인의 부러움을 사게 될 것이다.

    장서열은 혹시 이번 납치 사건의 배후에 황제가 있는 게 아닐까 의심스러웠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듯 그가 원하는 모든 게 이루어질 리 없었다.

    그녀는 온통 정신이 멍해지는 걸 느꼈다. 그녀는 진심으로 황제가 은혜를 베풀겠다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과 원한을 쌓겠다는 것인지 헷갈렸다. 완벽한 태자에게 약점이 있는 여인을 들이밀다니, 과연 황제는 시간이 지날수록 우매했던 제왕다웠다.

    황제는 대답을 기다리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물론 장서열은 거절했다. 뜻밖의 제안이었고, 구염락에게는 그럴 배짱이 있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구염락이 돌연 외쳤다.

    “아바마마, 그만 하십시오!”

    구염락의 눈에 낭패스러운 빛이 스쳤다. 자존심까지 모두 내팽개친 계략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을 싫어했다.

    “저는 이만 아가씨와 함께 현천기에게 가 보겠습니다.”

    말을 마친 구염락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람처럼 나가 버렸다. 더는 한 마디도 듣고 싶지 않았다.

    황제는 굳은 얼굴로 구염락이 물러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가 싸늘한 눈빛으로 말없이 장서열에게 그를 따라가라고 눈짓했다.

    두 사람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참이 지난 뒤, 황제가 원망스러운 기색으로 입을 열었다.

    “감히 짐의 호의를 받아들이지 않다니! 장서열이 내 아들을 몹시 무시하는군!”

    진 공공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을 지긋지긋하게 하는 게 제 아비와 똑같아! 옥언의 좋은 성격은 조금도 배우지를 못했어!”

    태자가 그렇게 참고 양보했으나 장서열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대체 뭘 어쩌고 싶은 게야? 우리 부자가 네게 빌기라도 해야 한단 말인가!’

    진 공공은 더욱 입을 열 수 없었다. 이런 일은 사실 겪어 본 사람만이 아는 것이었다. 어린 아가씨의 의사를 무시하고 억지로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게 진 공공의 생각이었다.

    한편, 장서열은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구염락의 뒤를 바짝 쫓았다.

    ‘오늘따라 왜 저렇게 서두르는 거지? 바쁜가?’

    장서열은 구염락을 따라가느라 거의 몇 발자국씩 뛰어야 했다. 이런 움직임은 지난 이틀간 몸과 마음이 지친 장서열에게 몹시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구염락이 모퉁이를 돌아 자취를 감추자 장서열은 결국 그대로 자리에 멈춰 섰다. 그를 먼저 가게 놔두기로 한 장서열이 옆에 있던 어린 태감에게 말했다.

    “실례지만 길을 좀 안내해 주시지요.”

    구염락은 걷다가 제자리에 섰다. 마치 버림받은 느낌이었다. 겨우 이 정도로 포기하다니. 그녀는 서풍엽의 뒤를 쫓을 때는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다.

    막 모퉁이를 돌던 장서열은 자신을 기다리는 구염락의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구염락 역시 저절로 입꼬리를 올렸다. 하마터면 서열 누님이라고 부를 뻔했다. 지금 그녀는 한없이 애정 어린 눈길을 주던 과거의 서열 누님과 똑같았다.

    장서열은 언제나 높은 곳에 앉아 있었다. 그는 그녀의 앞에서 재주를 부리는 어릿광대가 된 기분이었다.

    구염락이 마음 속 감정을 누르고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가 아바마마를 잘 설득하겠습니다. 이번 일이 마무리 되면 누님과 세자의 혼사는 예정대로 진행될 것입니다. 현천기는 감히 누님께 함부로 하지 못해요. 이번 일이 소문나는 일은 없을 겁니다.”

    말을 마친 구염락은 뒤돌아 다시 걷기 시작했다. 아까보다 더욱 빠른 속도였다.

    구염락의 말에 잠시 멍해진 장서열이 이내 기쁜 미소를 지었다. 그가 자신을 도와주고 싶어 한다니, 드디어 지난날의 노력이 결실을 맺고 있었다. 그녀가 그간 구염락에게 잘해 줬던 이유는 바로 이토록 중요한 순간에 써먹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장서열은 이제껏 지금처럼 스스로의 선견지명에 감탄한 적이 없었다.

    어두컴컴한 지하 감옥은 마치 저승까지 이어진 듯했다. 불을 밝히는 횃불이 벽에 걸려 타는 소리를 냈다. 사치스러운 기색조차 사라진 커다란 야명주 몇 알만이 어둠을 가르고 있었다.

    단순한 형태의 지하 감옥은 고문 기구가 갖추어져 있는 것을 제외하면 다른 감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 초라한 탓에 한눈에 떳떳하지 못한 장소임을 알 수 있었다.

    장서열은 공기 중에 떠도는 피비린내와 썩은 냄새를 느꼈다. 헐떡이며 간청하는 숨결이 느껴졌다. 하지만 걷는 내내 그녀의 눈에는 신기할 정도로 어떤 것도 보이지 없었다. 습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는 것을 제외하면 주변은 모두 깨끗이 정리되어 있었다.

    한참 걸었을 때쯤, 돌로 만든 벽 속 가장 깊숙한 곳에 그녀가 찾던 사람이 나타났다. 주위에는 어떤 용도인지 짐작이 가능한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금색 갈고리와 은색 자물쇠는 시퍼런 빛을 반사했고, 칠흑 같은 어둠 속 기다란 의자는 수없이 사용된 흔적을 보여주듯 반질거렸다. 멀지 않은 곳에는 우뚝 솟은 교수대가 침묵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 가운데 선 구염락은 주변에 한기를 더했다.

    감옥에 갇혀 있는 현천기는 면피가 벗겨진 채 지나치게 아름다운 민낯을 드러내고 있었다.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누구든 빠져들 만큼 단정한 외모였다. 장서열은 한눈에 그가 현천기라는 걸 알아챘다.

    그는 자신을 감추던 위장술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살려 달라고 애원하지도, 불안에 떨지도 않았다. 그는 전과 다름없이 자신의 행동을 후회하지 않는 듯 보였으며, 그 행동이 얼마나 졸렬하고 무지한 것인지도 모르는 듯했다.

    장서열은 당장이라도 현천기를 찢어 죽이고픈 충동을 느꼈다. 그에게도 공든 탑이 무너지는 느낌을 뼈저리게 느끼게 해 주고, 차라리 죽여 달라고 발밑에서 애원하게 만들고 싶었다.

    그녀가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한 걸음씩 내딛을 때마다 마음도 차갑게 식어갔다. 그녀는 살모사처럼 냉혹한 눈으로 현천기를 노려보았다.

    장서열을 마주 바라보던 현천기가 갑자기 눈빛을 거두었다. 그는 증오 가득한 장서열의 모습에 놀랐지만 이내 평소와 같은 얼굴로 되돌아왔다.

    차가운 쇠창살을 움켜쥔 장서열이 지옥에서 기어 나온 악귀처럼 현천기를 노려보았다. 당장이라도 그를 잡아먹을 기세였다.

    “내 속옷은? 그 빌어먹을 걸 어디로 빼돌렸어!”

    구염락의 눈이 단번에 어두워졌다.

    장서열이 대놓고 속옷을 언급할 거라 생각지 못한 현천기는 깜짝 놀랐다. 그는 이미 황제의 계획을 알고 있었다. 앞으로 황궁에서의 아름다운 앞날을 기다리는 그녀가 구염락을 앞에 두고 모든 걸 망치는 질문을 할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죽고 싶어 환장했군! 앞으로 태자에게 총애도 받지 못할 텐데?’

    손을 뻗은 장서열이 정확히 현천기의 옷소매를 움켜쥐었다. 그대로 그의 심장을 파내고 영혼까지 앗아갈 듯한 기세였다.

    현천기는 순간 머리털이 곤두서는 걸 느꼈다. 눈앞의 여인은 그의 손아귀에 갇혀 눈물을 흘리던 어린 여자아이가 아니라 지독한 악귀였다. 피에 흠뻑 젖어 발광하는 악귀 중의 악귀!

    “내 놔! 지금 당장!”

    문득 장서열은 자신이 어리석었다는 걸 깨달았다. 맨손으로 그를 상대하려 하다니!

    정신을 차린 그녀가 다짜고짜 칼을 뽑아 든 채 쇠창살을 밀고 뛰어 들어갔다. 구염락은 혹시라도 현천기가 장서열에게 위해를 가하지 못하도록 그녀의 뒤를 바짝 쫓았다.

    현천기의 유일한 패는 그렇게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몰래 장서열과 협상할 때 사용하려던, 그의 목숨을 살려줄 마지막 부적이 찢어진 것이다.

    그는 즉시 속옷의 행방을 자백할 생각이었다. 독살스러운 미인 뒤에서 사색이 된 남자를 향해 그가 서둘러 설명을 시작했다.

    “전하……! 소신은 아가씨가 함부로 나설까 두려워 마지막 패를 남겨둔 것입니다. 무척 조심히 주워 왔습니다!”

    장서열이 피식 웃었다.

    “아니. 네놈이 직접 벗기고 가져가지 않았느냐.”

    구염락은 스스로가 더욱 어릿광대처럼 느껴졌다. 저리도 확고하다니……. 장서열이 하고픈 한 마디는 분명했다.

    입궁하지 않겠다.

    이렇게 단호하게 자신의 계획을 멸시하고 웃음거리로 만들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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