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0화
이제 장서영에게 남은 건 사부님이 주신 금(琴)뿐이었다. 심지어 하녀조차 그녀를 따라오지 않았다.
장서영은 이랑들이 어색한 모습으로 한 손에는 짐을, 다른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방에 두고 나온 옷가지와 보석함이 떠올랐다.
행렬을 뛰쳐나온 장서영이 금을 껴안은 채 숨을 헐떡이며 장방에게 다가가 말했다.
“내 장신구와 옷들은…….”
장서영을 힐끗 쳐다본 장방이 그녀의 머리에 꽂혀 있던 비녀를 홱 빼내어 수거함에 던져 넣었다. 장방이 쌀쌀맞게 답했다.
“그것도 모두 조 씨 가문에서 사 준 것들이지요? 입던 옷과 장신구가 갖고 싶으면 가서 좌상 어른께 사 달라고 하십시오!”
말을 마친 그녀는 장부를 닫고 들어가 버렸다.
장서영은 억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원망의 눈길로 ‘조부(赵府)’를 노려보았다. 그녀는 금을 껴안은 채 곧 이랑들의 뒤를 따라 떠났다.
장서영은 속으로 맹세했다. 훗날 반드시 존귀한 모습으로 돌아와 자신을 괴롭힌 모든 이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 * *
황실의 표식이 새겨진 마차가 거침없이 황궁으로 들어갔다. 전쟁 중이었기에 궁인들은 하나같이 고개를 숙인 채 종종걸음으로 조용히 지나다녔다. 과거의 활달한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마차가 정문에 멈추자 일행은 다시 가마로 갈아탄 후 조석궁으로 향했다.
오는 내내 진 공공은 그동안 황제께서 장서열에게 얼마나 잘해 주었는지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녀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황제가 어떻게 버팀목이 되어 주었는지, 그녀가 아프거나 다쳤을 때 그녀의 전담 태의로 배정된 호 태의가 어떤 활약을 펼쳤는지까지.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폐하께서 내리신 그런 영광은 아가씨만이 누린 것입니다.”
장서열은 침묵을 지켰다. 그녀는 현천기와의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어떻게 해야 그를 확실히 괴롭힐 수 있을지 고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가장 중요한 건 그녀의 속옷을 대체 현천기가 어떻게 처리했느냐였다.
만에 하나 현천기가 반격할 마음을 버린다면 모든 것을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 그녀는 예정대로 서풍엽과 혼인해 이전처럼 근심 걱정 없는 나날을 보낼 수 있기를, 현천기가 진심으로 용서를 구하고 그녀에게 꿈꾸던 미래를 선사해 주기를 바랐다.
얼마 지나지 않아 우뚝 솟은 궁벽과 화려하고 번잡한 경치들이 사라졌다. 가마는 마침내 웅장한 기세를 내뿜는 금빛 황궁 앞에 멈춰 섰다.
가마에서 내린 장서열은 지면을 응시했다. 쳐다보지 않아도 길을 잃을 일 없는, 더없이 익숙한 곳이었다.
“잠시 기다리십시오, 아가씨. 도착하셨다고 고하겠습니다.”
장서열은 기다리고 있을 때, 별안간 대전 안에서 큰소리가 새어 나왔다. 곧이어 익숙한 목소리가 격노하여 크게 소리를 질렀다.
“감히 짐을 거역하겠다는 것이냐? 대체 뭐가 문제란 말이냐! 혹시 그 아이가 싫어진 게냐? 잘 듣거라. 무슨 일이 있었든 너는 무조건 그 아이를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고개를 숙인 장서열이 입가에 싸늘한 냉소를 지었다. 그녀는 진심으로 달려가 물어보고 싶었다.
‘진심이신가요? 다른 이와 정을 나누었어도 정말 괜찮은가요? 그럼 혼인하지요. 그리고 얼마나 역겨워하실지 지켜봐 드리죠!’
이어 구염락이 뭐라 대답하는 듯했지만 그녀에게는 오직 무언가 내리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그의 대답이 황제를 만족시키지 못한 게 분명했다.
“그 아이와 충왕부와의 혼약은 이미 파기됐다!”
또 다시 들리지 않는 구염락의 대답이 이어진 후 황제의 목소리가 울렸다.
“네가 지금 짐을 놀리는 것이냐? 그 아이가 세자를 사랑하는 게 뭐가 대수란 말이냐! 똑똑히 들어라. 짐은 줄곧 그 아이를 며느리로 삼고자 했다. 이번 일이 아니었대도 짐은 억지로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그리 했을 것이다! 네가 원하든 원치 않든 넌 그 아이를 아내로 맞이해야 한다!”
“…….”
“짐이 세자를 신경 쓸 것 같으냐? 두 사람의 감정은 짐이 상관할 바 아니다. 현천기에게 복수를 하고 싶다면 그 아이는 반드시 너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리고 너 역시 훗날 그 아이에게 반드시 비빈 이상의 대우를 해야 할 것이다!”
거칠고 난폭한 목소리는 이번 납치 사건으로 더욱 비이성적으로 변한 황제의 속내를 낱낱이 드러냈다. 오랫동안 소망한 일을 눈앞에 두고 있기 때문인지 그는 유난히 흥분해 있었다.
참으로 감격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주국의 천자가 심혈을 기울여 그녀를 맞이하려 하지 않는가.
‘영광스러워 몸 둘 바를 모르겠군.’
입술을 구부린 장서열이 더욱 차갑게 조소했다. 이제껏 황제는 그녀를 고생시킬 수 없다며 반드시 태자비를 고집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이렇듯 품계를 강등시키다니, 그야말로 끔찍이 그녀를 아끼는 분이었다.
잠시 뒤, 진 공공이 땀을 닦으며 급히 달려 나왔다.
“아가씨, 폐하께서 안으로 들라 하십니다.”
장서열이 조석전 정전으로 들어섰다. 황실 특유의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분위기가 물씬 느껴졌다. 용의 몸에 사자 머리 모양을 한 향로와 황금색 비단 휘장, 그리고 가구 하나하나에 새겨진 ‘어용(御用, 황제가 사용하는 물건)’이라는 글자는 그 존재만으로 보는 이를 두렵게 했다.
목탑(木榻, 나무로 만든 침대 모양 평상) 위에 앉은 황제는 자애로운 낯빛으로 늠름한 위용을 뽐내고 있었다. 마치 용의 혼을 지닌 사람처럼 고고한 모습이었다.
구염락은 붉은 비단 망포를 걸친 채 평온한 표정으로 침묵하고 있었다. 깨끗하고 위엄 있는 모습은 이미 그녀에게 익숙한 영덕대제의 모습이었다.
구염락은 정전으로 들어오는 장서열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는 무의식적으로 그동안 잘 지냈는지, 현천기 그 개자식을 어찌 처리할 것인지 물을 뻔했지만 이내 다시 고개를 숙였다. 장서열은 그를 쳐다보지도 않고 있었다. 이를 깨달은 구염락은 허리를 곧게 펴고 그저 담담한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했다.
그는 황제의 제안을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자기 자신조차 역겹게 느껴지는 이런 더러운 마음을 드러내 보일 수는 없지 않은가. 그는 마음을 더욱 꼭꼭 숨기고 감췄다.
장서열은 구염락의 반응이 지극히 정상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태생부터 감정적인 결함이 있었고 애초에 여인을 존중해 준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구염락이 자신을 아내로 맞이한다고 나서는 게 더 이상했다. 옛정을 생각해 여러 가지 도움을 주는 것만으로도 이미 기특한 일이었다.
장서열이 절을 올렸다.
“폐하와 태자 전하를 뵈옵니다.”
“일어나라.”
구염락이 태자 신분에 걸맞게 담담히 명했다. 황제가 그를 슬쩍 노려보았다.
‘무릎 한 번 꿇는 것도 안쓰러워 어쩔 줄 모르는군. 나서지 말고 좀 참거라!’
고개를 숙인 구염락은 황제의 눈초리를 못 본 척했다. 황제는 아마도 바닥이 얼마나 차가운지 모르는 듯했다.
장서열이 몸을 일으켰다. 황제는 고고한 자태로 아래에 선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불같은 성미를 숨길 줄 모르는 조옥언을 조금도 닮지 않은 아이였다. 그녀는 어렸을 때부터 냉담했지만 웃을 때면 무척 온화해 많은 이들에게 귀여움을 받았다.
장서열을 향한 황제의 총애는 익히 알려져 있었다. 조정 대신들은 공주는 못 알아볼지언정 조옥언과 장서열만큼은 모르지 않았다. 황제는 그간 장서열을 아껴온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그녀가 자신을 너무 원망하지 않기를 바랐다. 그 역시 장서열에게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아들을 위해서라도 어쩔 수 없었다.
황제가 마음을 차분히 하고 물었다.
“진 공공에게 이야기를 들었느냐?”
“예, 폐하.”
“짐에게 감사하지 않는 것을 보니 원치 않는 것이로구나.”
실의에 찬 황제의 목소리에도 장서열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치 대단한 은혜를 내리는 듯한 그의 태도는 분명 얄미운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크게 분노가 일지는 않았다.
어쨌든 전생에서 그녀가 소원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은 지금과 같은 황제의 집착 덕분이었다. 비록 결말은 처량했지만 장서열은 자신의 이기적인 바람대로 구염락과 혼인했다. 마냥 황제를 원망할 수만은 없었다.
그녀는 차라리 황제가 대놓고 말해 주기를 바랐다. 널 입궁시키고 싶지만 황후는 될 수 없다고. 그 편이 조금 전처럼 밖에서 둘의 대화를 듣는 것보다 훨씬 나았다.
“아닙니다. 단지 실례를 범하고 싶지 않을 뿐입니다.”
황제는 붉은 치마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는 장서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릴 적 곱고 어여쁘던 용모는 세월이 지나 사람의 마음을 감동시킬 만큼 아름답게 피어 있었다. 구염락이 그녀에게 반한 심정도 이해가 갔다.
그러나 그녀는 가시 돋친 장미였다. 겉으로는 유순해 보였지만 누군가에게 통제당하는 것을 싫어하던 예전과 지금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특히 황제는 그녀의 아버지를 떠올리면 기분이 썩 유쾌하지 않았다.
“너는 현천기의 일로 짐을 곤란하게 만들었다. 잘 모르겠지만 대주국에서 현 씨 가문은 내각(内阁, 황제를 도와 정무를 처리하는 기관)보다 중요한 위치에 있다. 그들은 짐의 유능한 신하이지……. 헌데 너를 위해 짐이 오른팔을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무척 마음이 아프구나.”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지요, 폐하?”
장서열이 낭랑한 목소리로 빠르게 물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잠시 멈칫한 황제가 곧이어 탄식을 내뱉었다. 평소 그녀를 너무 총애한 탓에 황제의 위엄을 잃은 것 같았다.
“서열아, 짐이 너를 위해 현 씨 가문의 사람을 제거하려면 누구나 인정할 만한 명분이 필요하다. 예컨대 황실에서 널 내 며느리로 내정한 상태였다면 어느 누구도 현천기를 처단하는 데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것이다.”
“…….”
“너도 알고 있겠지. 짐은 과거 네 어미를 서운케 한 일이 있다. 끝내 그녀를 입궁시키지 못한 것이 짐에게 평생 한이 되었지. 이제 짐에게는 이 두 가지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방법이 있다. 짐이 이 기회를 그냥 흘려보낼 것 같으냐? 이건 너에게도 일거양득의 기회가 될 게다.”
장서열이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먼저 구염락의 차가운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바마마, 위지 씨 가문도 제거하였는데 현 씨 가문을 제거하지 못할 까닭이 없지 않습니까? 어찌하여 서열 아가씨를 난처하게 하시는지요? 소자, 혼인하기 어려울 정도로 아바마마께 못난 태자라 생각지 않습니다.”
난생 처음 듣는 ‘아바마마’라는 단어에 넋을 잃은 황제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감히 주제넘게 끼어든다고 나무라는 것도 잊은 채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을 폐하라 칭했다.
순간 황제는 자신이 구염락을 기쁘게 했다는 걸 깨달았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된다면 다시는 그에게서 아바마마라는 소리를 듣지 못하게 될 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