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9화
충왕비는 왕부에 돌아가 장서열을 맞이할 방법을 궁리하기로 했다. 약혼은 아직 파기되지 않았다. 여전히 충왕부가 우선이었다.
한쪽 구석에 선 장서열은 조금 전 받았던 충격이 사라진 뒤에도 딱히 특별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단정하게 다듬어진 진귀한 꽃처럼 가지런히 두 손을 모은 채 조용히 제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었다.
차갑게 코웃음을 친 조옥언이 딸에게 물었다.
“현천기가 궁에 있다는데 가 보겠느냐?”
현천기는 딸의 한을 풀기 위해서라면 반드시 만나야 할 중요한 사람이었다.
장서열이 평온해진 얼굴을 들었다. 황실에서 순결하지 못한 여인을 맞아들이려 한다고 실컷 소리라도 질러 주마.
“가겠습니다.”
그러자 조옥언이 진 공공을 바라보며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폐하께 혼사는 못 들은 것으로 하겠다고 고하시오.”
진 공공은 난처했다. 도무지 뭐라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설마 조옥언이 거절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황제 또한 조옥언이 거절했을 때의 대비책을 마련해 놓지 못했다. 그는 자나 깨나 장서열을 비호하는 황제를 향해 거절 의사를 표명하는 조옥언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왜, 폐하께서 조건을 승낙하지 않으면 현천기를 내줄 수 없다 하셨소?”
부담감이 더욱 커진 진 공공이 몸을 깊이 숙였다. 물론 그렇지는 않을 터였다.
“폐… 폐하께서는 그런 뜻이 아니십니다.”
조옥언이 시선을 거두었다.
“그렇다면 좋소. 딸아이를 위해 공정하게 나서 주신 폐하께 꼭 감사드린다고 전해 주시오. 헌데 꼭 서열이가 입궁해야 하오? 현천기가 나올 수는 없는 것이오?”
이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 진 공공이 재빨리 답했다.
“그렇습니다, 부인. 폐하께서 말씀하시길 현천기는 황궁 감옥에 가두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조옥언은 딸아이의 옷매무새를 다듬어 주었다. 그녀는 나머지 일은 자신이 맡을 테니 딸에게 마음 놓고 다녀오라는 말을 잊지 않았다.
장서열이 싱긋 웃었다. 그녀에게도 나름대로의 생각이 있었다. 황제 역시 어린아이를 데려다 놓고 쓸데없는 수작을 부릴 만큼 분별없는 사람은 아니었다.
게다가 구염락은 현재 태자였고 장서열에게도 자신만의 생활이 있었다. 구염락이 아무리 천성적으로 매정하다지만 옛정과 친분을 생각해서라도 그녀의 뜻을 무시할 리 없었다.
어머니와 눈빛을 주고받은 장서열은 곧 진 공공을 따라 집을 나섰다.
진 공공은 침착하고 평온한 태도를 유지하는 장서열을 바라보면서 내심 그녀가 조옥언처럼 어려운 사람이 아니라 다행이라 여겼다. 최근 벌어진 변고만 아니었다면 마땅히 황후가 될 만한 기품을 갖춘 아가씨였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후원을 나온 진 공공은 그제야 저택 안이 아수라장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람들은 버림받기라도 한 것처럼 일제히 울부짖고 있었다.
장서열이 문득 무언가 떠오른 듯 발걸음을 멈췄다.
“실례가 안 된다면 뒷문을 통해 나가도 되겠습니까?”
진 공공은 당연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럼요. 가시지요.”
멀지 않은 곳에서 아버지가 문지기와 다투고 있었다. 장서열은 힐끗 바라본 뒤 진 공공과 함께 후문으로 사라졌다.
같은 시각, 장 씨 가문의 대문 앞은 네 것 내 것을 따지는 이들로 아수라장이 되어 있었다. 과거 조옥언은 시집오는 첩들에게 따로 혼수를 받지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재물을 돌려 줘야 할 의무도 없었다. 오히려 그동안 그녀들을 먹이고 입힌 값을 돌려받아도 모자랄 판이었다. 조옥언은 가차 없이 모든 이들을 내쫓았다.
조옥언은 본래 아이들에게 양친이 온전한 가정을 만들어 주고자 했다. 그러나 장신성은 아들의 혼사를 나 몰라라 방치했고, 딸에게 좋은 혼처를 맺어주기는커녕 오히려 원수를 들이밀었다. 이런 아버지라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았다.
장서영은 멍한 얼굴로 평소 자신의 시중을 들던 하녀들에 의해 버려지는 물건들과 아버지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여긴 내 집이잖아. 어떻게 내 집에서 쫓겨날 수가 있지?’
“아버지…….”
장신성은 장서영을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는 자신만만하게 제 능력만으로 연경의 세도가가 될 수 있을 거라 믿던 그 옛날 무지한 청년이 아니었다. 정말 이대로 국공부를 잃고 조 씨 가문의 사위라는 지위를 잃는다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장신성은 다시 저택으로 들어가기 위해 쉬지 않고 대문을 두드렸다.
“네 놈들이 정녕 미친 게로구나! 노비 주제에 감히 나를 홀대해? 썩 문을 열지 못할까! 내가 직접 부인과 이야기하겠다!”
공손하게 문 앞에 선 집사가 그를 가로막았다. 웃고 있었지만 태도는 강경했다.
“죄송합니다, 좌상 어르신. 부인께서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내보내라 하셨습니다.”
조 씨 가문에서 은자를 받고 있는 집사에게 장신성을 도와 문을 여는 건, 스스로 밥그릇을 걷어차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저택 바깥은 사람으로 가득 찼다. 크고 작은 짐 꾸러미와 옷가지가 줄을 이었다. 바깥은 여전히 아이들의 울음소리와 여인들의 원성으로 가득했고, 이웃들은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구경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대문 앞 계단에는 장방(账房, 저택의 회계 업무를 관리하는 하인) 한 명이 나와 있었다. 그녀는 책상과 주판을 놓고 첩실들의 물건을 철저히 조사했다. 탁탁 주판알을 튕긴 그녀는 꼼꼼하게 목록을 작성한 뒤 모든 이랑들에게 빠짐없이 서명을 받았다. 그러나 잔꾀를 부리는 사람은 떠나려 하지 않았으며 서명은 더더욱 거부했다.
어깃장을 놓는 이랑 앞에서 장방은 주판을 탁 때리며 다시 처음으로 돌아갔다. 장방은 이랑이 먹은 것, 입은 것, 사용한 것 등등 사시사철 들어간 비용을 계산한 후, 그녀가 부인에게 빚진 수백 냥의 은자를 확인시켜 주며 크게 소리쳤다.
“돈 갚으시오!”
평소 조옥언의 보호 아래 횡포를 일삼던 어린 이랑은 자신의 면전 앞에서 제멋대로 구는 하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의 곁에는 장신성이 있었다. 돌아가는 상황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소란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내가 먹고 입고 사용한 것은 모두 나리의 것인데, 그게 너 같은 계집과 대관절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너희가 무슨 속셈인지 모를 줄 알고? 나리의 재산을 차지하고 자녀들을 위해 마련해 준 혼수까지 빼돌리려는 수작이겠지! 어림도 없다!”
‘고작 푼돈으로 사람을 내쫓으려 해? 꿈 깨시지!’
어린 이랑은 가슴을 꼿꼿이 세운 채 아리따운 자태로 이랑들 틈에서 당당하게 버티고 섰다. 다시 한번 장방이 주판을 탁 때리자 건장한 하인들이 나와 좌우로 이랑의 팔을 붙들었다. 집사가 입을 열었다.
“여봐라! 구 이랑이 부인을 고발하고 싶어 하니 모시고 관아로 가서 북을 쳐 드려라! 이 장방 자네는 구 이랑을 따라가서 셈을 해 주고, 만약 구 이랑이 채무를 상환하지 못하면 그녀를 팔아 돈을 받아 오시게!”
순간 구 이랑의 아름다운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아… 아니에요! 아닙니다! 관아에 고발이라니요……. 집사! 아니, 집사 어른! 살려 주십시오. 노비는 부인을 존경합니다. 부인을 위해서라면 소가 되고 말이 되겠어요! 노비는……!”
구 이랑의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평소 장신성의 총애가 두터웠던 구 이랑은 하인들에게 끌려갔다. 그럼에도 여전히 집사 주위를 맴돌고 있는 장신성에게 눈길 한번 받지 못했다.
이를 줄곧 지켜보던 십여 명의 첩실들은 마침내 상황을 이해했다. 부인은 정말 그들을 내쫓은 것이다. 얌전히 협조하면 은자를 받아 떠나는 것이지만 저항하면 그동안 장 씨 가문에서 베풀어 준 모든 비용을 배상하고 쫓겨나야 했다.
첩실들은 재빨리 머리를 굴렸다. 장신성과 혼인한 후 장 씨 가문에 들어와 살면서 그녀들이 쓴 비용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들이 누린 모든 것들은 전부 최상품이었다.
결국 여인들은 감히 난리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얼른 서명을 한 뒤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은표를 쥔 채 노야께서 한시 바삐 거처를 마련해 주기만을 얌전히 기다렸다. 그나마 세상 물정을 아는 이랑은 장부(章府)라고 쓰여진 저택이 실은 장신성의 것이 아니고 조옥언의 것이라는 걸 깨닫고 남몰래 그를 원망했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의 부군이자 아이의 아버지인 장신성이 대주국의 좌상이므로 앞날이 그리 막막하지만은 않을 거라고 막연히 생각했다. 또 어떤 면에서는 그녀들 위에 있던 절대 권력 하나가 사라진 것이므로 참을성 있게 기다리면 언젠가 가문의 여인으로서 출세할 날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안절부절못하는 건 오로지 아이들뿐이었다. 아이들의 머릿속엔 온통 집에 놓고 나온 장난감과 장신구로 가득했다. 정자와 누각 사이에 아직 잡지 못한 나비는 또 얼마나 많던가.
어떤 이랑은 장서열이 봉변을 당한 지금, 노야를 내쫓는 조옥언의 행동은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부인과의 옛정을 생각한 노야가 대문을 두드리며 마음을 돌리려 하는데도 요지부동이라니. 만약 정말로 화가 난 노야가 부인을 버린다면 어쩌려고 저러는지 알 수 없었다.
잠시 뒤, 대문이 활짝 열렸다.
모든 이가 눈을 반짝였다. 역시 부인은 금세 후회한 것이다. 이제 다시 들어가면 되는 걸까? 그녀들은 그 짧은 시간동안 저택에서 살던 때가 그리워 어쩔 줄을 몰랐다. 장 씨 가문은 그야말로 인간 세상 속 호화로운 선계(仙界)였다.
장정 몇 명이 긴 사다리를 들고 나와 대들보 위에 놓았다. 그들은 곧 ‘장부(章府)’라고 쓰인 편액을 떼어내고 ‘조부(赵府)’라고 쓰인 편액을 달았다.
저택 앞은 놀란 이들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로 가득했다. 구경하던 이웃들은 더욱 놀라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세상에! 장 부인이 남편을 내쫓고 이혼하는구나!’
그러나 놀란 것도 잠시, 이내 평정을 되찾은 사람들의 시선은 저택에서 쫓겨난 미인들에게로 향했다. 여인들은 하나같이 고운 비단옷을 입고 있었으며, 아이들은 살이 통통하게 올라 볼에 윤기가 가득했다. 그간 장신성이 국공부가 내린 저택에서 얼마나 편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누리며 살았는지 충분히 짐작이 가능한 모습이었다. 내쫓는 마당에 조 부인이 자신이 하사한 모든 걸 빼앗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저택에서 쫓겨난 사람들을 보던 구경꾼들은 집에 돌아가 주인에게 이 이야기를 어떻게 설명할지 고민에 빠졌다.
장서영은 웅장한 필체로 쓰인 ‘조부(赵府)’라는 두 글자를 바라보다가 다시 혼란스러운 얼굴로 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장신성은 편액을 바라보며 이를 악물고 있었다.
‘그래, 나를 내쫓겠다 이거지! 누가 무서워할 줄 알고?’
과거 당당히 장원급제하여 뛰어난 학식을 자랑한 그였다. 이제 인생에서 조옥언이라는 오점이 사라졌으니 더욱 잘 살 수 있으리라.
눈을 부릅뜬 장신성이 울고 있는 여인들을 향해 외쳤다.
“뭘 울고들 있소! 모두 짐을 챙겨 나를 따라오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