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8화
모친을 떠올린 조옥언의 안색이 순간 굳었다. 매섭던 기세도 조금 수그러들었다. 장신성의 마지막 말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조옥언이 주춤하자 장신성은 자신을 붙잡고 있던 하인들을 떨쳐 냈다. 조금 전까지 당황하던 기색은 사라지고 한껏 거만해진 얼굴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이번 일은 내 그냥 넘어가 주리다. 현 씨 가문과의 일은 알아서 처리할 터이니 당신도 자숙하고 있으시오. 그리고 충왕부에서 동의한 틈을 타서 하루라도 빨리 서열이를…….”
별안간 맑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머니, 장 대인을 내쫓으십시오. 할머님께서도 이해해 주실 것입니다. 만약 이해하지 못하신다면 제가 직접 찾아가 말씀드리겠습니다.”
인파가 두 갈래로 갈라졌다. 붉은 옷을 걸친 여인이 침착하고 여유로운 모습으로 입구에 서 있었다. 그녀의 안색에는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할머님께선 절 봐서라도 분명 넘어가 주실 겁니다.”
딸을 한 번 쳐다본 조옥언이 장신성을 가리켰다.
“저 자를 내쳐라!”
장신성이 다시 당황했다.
“조옥언! 당신이 감히 내게 이럴 수 없……!”
입이 틀어 막힌 장신성은 그 즉시 장 씨 가문이 아닌, 조 씨 가문의 하인이 된 이들에게 붙잡혀 질질 끌려 나갔다. 잠시 뒤 후원에는 한바탕 전쟁이 일었다. 뜰 안은 급히 달려와 조옥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첩실들로 가득 찼다. 그러나 조옥언은 단 한 명도 만나지 않고 그들을 모두 내쫓아 버렸다.
충왕비는 남몰래 혀를 내둘렀다. 역시 옥언 언니였다. 오히려 진작에 이랬어야 하지 않은가. 조국공부가 지금까지 장신성을 끌어 준 이유는 그가 대단한 인재여서가 아니었다. 단지 조국공부의 딸과 외손주를 잘 돌봐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나 그는 배은망덕했다. 충왕비의 눈에는 조옥언이 여태껏 참아 준 것도 신기할 지경이었다.
충왕비의 시선이 입구에 선 장서열에게로 향했다. 역시 고집이 있는 아이였다. 충왕비는 만약 이대로 장서열이 끝까지 혼인을 거부한다면 충왕부에서도 어찌할 수 없다는 걸 알았다.
미소를 머금은 충왕비가 그녀에게 다가갔다. 두껍고 무거운 왕비복을 걸치고 있었으나 발걸음만큼은 가벼웠다.
“착한 서열아, 무엇이든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있다면 언제든 풍엽이를 단단히 혼내 주렴. 혹 철없는 내 아들이 널 언짢게 했다면 마음 풀거라. 내 돌아가서 혼쭐을 내줄 테니.”
조옥언은 충왕비의 말이 고마우면서도 달갑지가 않았다. 이제 딸아이에게 충왕부는 너무 높은 곳이 되어 있었다. 그런 와중에 이처럼 다정한 충왕비의 태도는 오히려 딸을 위해 좋지 않았다.
장서열이 충왕비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충왕비를 어머니처럼 따랐지만 인연이 여기까지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아요. 풍엽 오라버니는 훌륭한 사람이지만 전 그런 풍엽 오라버니에게 부족한 사람입니다. 오라버니의 앞길에 방해가 되고 싶지 않아요.”
충왕비의 안색이 굳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너에 대한 풍엽이의 마음을 잘 알지 않느냐. 그 아이는 널 잊지 못할 게야. 네가 이러면 풍엽이도 나도 얼마나 괴롭겠니. 나와 왕야는 네게 무슨 일이 있었든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단다.”
장서열은 고개를 숙였다. 그들이 신경 쓰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이들을 멀리 해야 했다. 충왕부까지 현 씨 가문의 보복에 말려들게 할 수 없었다.
장서열이 부드럽게 말했다.
“왕비마마, 마마께서 제가 괴로워하는 걸 원치 않으시듯 저도 마마께 근심이 없길 바랍니다. 저는 충왕부가 위험에 처하는 걸 원치 않아요. 현 씨 가문과의 일은 이미 왕야께서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제게 일어난 일을 개의치 않아 하는 마마의 마음과 충왕부를 염려하는 제 마음은 결국 같은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위하기 때문에 오히려 결론이 날 수 없다는 말이니?”
“네.”
충왕비는 평소 어린 줄만 알았던 여자아이가 이제 어엿한 아가씨가 되었다는 걸 깨달았다.
“풍엽이가 널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건 알고 있지?”
“포기하게 할 방법을 알고 있어요.”
장서열의 머리를 쓰다듬는 충왕비의 얼굴에는 슬픈 기색이 가득했다. 어미로서 아들이 상처받게 될 거라는 걸 알면서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었다.
“풍엽이는 어젯밤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마 너를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는 것이겠지. 만일 원하는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더라도… 그 아이를 위로해 주렴.”
“명심할게요.”
충왕비와 장서열은 서로 아쉽고 애석한 마음을 나누었다. 장서열이 후회하여 마음을 돌리기만 한다면 충왕부는 언제라도 그녀를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조옥언이 소리 없는 탄식을 내뱉었다. 서풍엽은 좋은 아이였다. 하지만 충왕비 또한 할 수 있는 모든 걸 다했다. 조옥언에게 장서열이 소중한 자식이듯 서풍엽 역시 충왕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소중한 자식이었다.
다시 방으로 들어온 홍촉이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부인, 육 씨가 떠나지 않고 일곱째 도련님을 데리고 밖에 꿇어앉아 있습니다. 이번 생은 오로지 부인께 충성하겠다면서요.”
조옥언이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내 말을 잊었느냐?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 쫓아내라!”
홍촉이 몸을 움츠렸다. 조옥언은 평소 육 이랑에게 매우 잘해 주었다. 어쩌면 그녀에게는 조금 다를 거라고 생각했으나 전혀 아닌 모양이었다.
잠시 뒤, 홍촉이 다시 방에 들어오자 조옥언의 표정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이번에는 또 누구냐? 누구라도 예외는 없다고 했을 텐데.”
굳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본 홍촉이 숨을 죽이며 말했다.
“부인. 황궁에서 진 공공께서 오셨습니다.”
놀란 충왕비가 움찔했다.
‘진 공공이라면 황제의 곁에서 일하는 일등 대태감이 아닌가?’
조옥언이 무표정하게 답했다.
“들라 해라.”
충왕비는 속으로 몹시 탄복했다. 일등 대태감의 등장에 태평할 수 있다니. 역시 옥언 언니였다.
장서열은 차분하게 모친을 바라보며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자신을 위해 도움을 구해서는 안 된다는 뜻이었다. 이 시기에 황제가 사람을 보내온 이유라면 뻔했다.
잠시 뒤, 허리를 굽힌 진 공공이 들어왔다. 공손한 자세에는 왠지 모를 부끄러움과 죄책감이 묻어 있었다. 그가 자신도 어찌할 수 없다는 듯 조옥언을 향해 먼저 웃어 보인 뒤 입을 열었다.
“서열 아가씨를 모셔오라는 폐하의 분부십니다. 현천기를 선물로 내릴 테니 받아달라고 하셨습니다.”
평온했던 장서열의 표정이 흔들렸다.
‘그를 잡았다고? 그럼 내 속옷은? 만약 벌써 다른 이에게 건네 조치를 취해 두었다면…….’
미간을 찡그린 조옥언이 경계하며 물었다.
“폐하께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소?”
한숨을 쉰 진 공공이 조용히 방 안에 선 사람들을 둘러보았다. 그의 시선이 잠시 충왕비에게서 멈췄다.
“큰 선물을 보냈으니 그에 대한 보답으로… 서열 아가씨를 태자 전하께 시집보낼 수 있는지 부인께 여쭤보라 하셨습니다.”
장서열의 얼굴에서 단번에 핏기가 사라졌다. 무엇인가 목에 걸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달갑지 않은 전생에서의 일들이 하나하나 머릿속을 채워 나갔다. 순식간에 참담한 결말이 눈앞에 펼쳐졌다.
충왕비는 하얗게 질린 장서열의 얼굴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위안을 느꼈다. 역시 서열이는 권세에 빌붙는 사람도, 태자라는 말에 자신의 아들을 버리는 아이도 아니었다.
‘황제가 아직까지 단념하지 못했구나!’
만약 장서열이 정말로 구염단신과 혼인했다면, 낙마 사고 이후 황제는 장서열을 이혼을 시켜서라도 다시 구염락과 혼인시키려 들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대체 왜 끼어드는 거지? 서열이는 내 며느리인데 어딜 빼앗아 가려고!’
하지만 진 공공을 앞에 두고 불쾌한 내색을 할 수 없었기에 충왕비는 오직 속으로만 초조하게 외쳤다.
‘만일 풍엽이가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진 공공은 고개를 숙인 채 대답을 기다렸다. 폐하께서는 바로 이 순간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다. 황제는 장서열이 예기치 못한 봉변을 당했음에도 여전히 그녀를 아꼈다. 진 공공에게 서열 아가씨는 크나큰 복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진 공공은 조옥언이 황제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랐다. 그렇게만 된다면 조옥언은 이번 제안이 일석이조의 결과를 가져다주리라는 걸 깨닫게 될 것이다.
종잇장처럼 창백해진 장서열이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쳤다. 암담했던 전생의 기억과 그녀를 조롱하던 사람들, 그리고 사람을 미치게 만들었던 황량함이 다시 목을 조르는 것 같았다.
그녀가 일평생 다시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은 곳이 바로 황궁이었다. 무력함에 허덕이는 어머니의 모습도, 헤어 나올 수 없는 고통에 시달리는 오라버니의 모습도 보고 싶지 않았다.
‘충분히 멀리 도망쳤다고 생각했는데. 대체 왜…….’
하필 이럴 때 자신을 가만두지 않는 황제에게 증오심이 끓어올랐다.
장서열은 잇따른 충격에 타격을 입었다. 누군가 그녀가 공들인 수년간의 노력을 가지고 놀고 있지 않고서야 이럴 수는 없었다. 황권이 있는 한 끝내 숨 한번 제대로 쉴 수 없는 인생을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니 숨이 막혔다.
‘혼인이라니!’
이건 구염락 또한 역겨워 할 일이었다.
장서열은 크나큰 복을 전하러 온 진 공공의 얼굴을 할퀴어 버리고픈 충동을 억눌렀다. 그들은 자신이 감지덕지하며 대단한 황실의 권세 앞에 납작 엎드려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한 번 그런 미치광이 같은 선택을 한 적이 있었다.
고개 숙인 장서열은 아무도 보지 못하도록 머리카락 사이로 표정을 감췄다. 누군가 자신의 명이 긴 걸 못마땅해 하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하루 빨리 발톱을 세우고 황궁의 모든 사람을 죽이길 바라는 걸까?
조옥언은 그저 웃고 싶을 따름이었다.
‘풍윤, 참으로 황송하기 이를 데 없구나. 누가 더 바보인지 겨뤄 보자는 게야? 네 아들놈이 얼마나 비열한지 내가 모를 거라고 생각하느냐?’
조옥언은 굳이 경멸하는 빛을 숨기지 않고 입을 열었다.
“태자비 자리를 얘기하는 것이오?”
놀란 진 공공이 잠시 멈칫했다. 조옥언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그가 황급히 안심시키듯 말했다.
“서열 아가씨는 폐하의 비호를 받고 계시니 태자비만큼 높은 지위에 앉으신 거나 다름없습니다. 태자 전하를 기쁘게 해 드린다면 훗날 귀비도 되실 수 있을 겁니다.”
조옥언이 참을 수 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조롱과 경멸이 섞인 웃음이었다.
진 공공은 일이 잘못되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로서도 어쩔 수 없었다. 황제께서 말을 바꾼 것을 탓하기에는 장서열은 이미 추문에 휩싸여 있었다. 조옥언은 이마저도 황제가 베푼 은혜라는 걸 알아야 했다.
충왕비가 남몰래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긍지 높은 조옥언이 성격상 자신의 딸을 누군가의 밑에서 고개 숙이게 만들 리 만무했다. 그러니 자신의 아들에게는 아직 기회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