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7화
현재 가문이 처해 있는 상황을 떠올리면 현일은 그저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역시 세상은 돌고 도는 것이었다. 위지 씨 가문의 사건이 채 끝나기도 전에 바로 다음 목표물이 현 씨 가문이 되지 않았는가. 확실히 현일은 지금 이 사주단자가 필요했다.
현일이 차가운 눈빛을 거두며 말했다.
“장 승상께 감사드립니다.”
“하!”
장신성은 현일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에게 눈을 부라린 장신성은 자리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저택을 떠났다.
그러나 발걸음을 옮기는 장신성의 기분은 몹시 좋았다. 사리분별 못하는 조옥언을 대신해 자신이 집안의 웃어른으로서 중차대한 일을 해결한 것이다. 그는 고개를 쳐들고 오만한 표정으로 집에 돌아왔다.
전원(前院)에 들러 옷을 갈아입은 장신성이 하인을 불렀다.
“부인은 어디 있느냐?”
그는 조옥언이 울먹이며 감사를 표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무지한 여인은 역시 중요한 순간 일을 해결하는 건 남자라는 깨달음을 얻게 될 것이다.
“예, 나리. 부인께서는 후원 선방(禅房, 참선하는 방)에 계십니다.”
상심한 조옥언은 달리 뾰족한 수가 없자 부처에게 빌고 있는 모양이었다. 혹여나 딸이 혼인하지 못할까, 가문의 명성에 누를 끼치지는 않을까 불안에 떨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다행히 그가 결단을 내린 덕분에 현 씨 가문과 맺어졌으니 그야말로 완벽히 일을 해결한 셈이었다. 자칫하면 막힐 수도 있는 다른 자녀들의 혼사 또한 무리가 없을 것이다.
장신성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후원으로 향했다. 그는 이 좋은 소식을 빨리 조옥언에게 알리고 싶었다. 그녀는 감격의 눈물을 뚝뚝 흘리며 앞으로 다시는 집안에서 큰소리치지 못할 것이다.
선방 문 밖을 지키고 있던 홍촉은 장신성의 등장에 어리둥절했다. 이 시간 그는 집이 아니라 조정에 나가 있어야 했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노비가 나리께서 오셨다고 아뢰겠습니다.”
딸을 위해 기도를 드리며 손에 쥔 염주를 굴리던 조옥언이 결국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험악한 표정으로 말했다.
“기도를 드리는데 불러내다니, 반드시 중요한 이유가 있어야 할 게야.”
서둘러 고개를 숙인 홍촉은 진땀을 흘렸다. 부인은 참선하는 시간에 방해 받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장신성이 굳이 이 시간에 그녀를 불러낸 것은 의외였다.
‘정말 무슨 큰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조옥언이 불당을 나왔다. 옥처럼 고운 자태에 장신성은 순간 또 넋을 잃었다. 그는 이 또한 오늘 특별히 기분이 좋은 탓이라 여기며 앞으로 나가 그녀의 손을 잡고 부축했다.
조옥언은 그래도 장신성에게 최소한의 양심은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딸을 걱정하는 자신을 위해 일부러 건너와 안부를 묻고자 함이 아닌가. 조옥언은 그가 이끄는 대로 순순히 의자에 앉았다.
곧장 다가온 홍촉이 차를 올렸다. 장신성이 자리를 피해달라고 눈짓했지만 홍촉은 이를 무시하고 다시 부인을 쳐다보았다.
조옥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 역시 딸의 일에 대해 장신성과 자세한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아무리 못나도 딸의 아버지였다. 아무것도 모르게 둘 순 없었다.
“저…….”
“저…….”
장신성이 얼른 다정하게 웃으며 말했다.
“부인 먼저 말씀하시오.”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아름다운 조옥언을 그가 탐욕스럽게 바라보았다. 조옥언이 냉랭하게 답했다.
“먼저 말씀하시지요.”
얼른 정신을 차린 장신성은 속으로 조옥언을 깔보며 생각했다.
‘네까짓 게 뭐 얼마나 대단하다고! 내 방금 딸을 위해 혼사를 성사시키고 왔다는 사실을 알면 아마 절로 내 시중을 들게 될 것이다. 먼저 말하라면 못할 줄 알고!’
장신성이 득의양양하게 입을 열었다.
“내 방금 현 씨 가문에 다녀오는 길이오. 두 아이의 사주단자를 교환했고, 현 대인도 이에 동의했으니 앞으로 서열이는 현 씨 가문의 며느리요. 그러니 당신도 앞으로 더는…….”
그러나 장신성은 말을 끝맺지 못했다. 그의 이마를 때리며 깨진 찻잔이 쨍그랑 소리를 내며 바닥에 떨어졌다. 뜨거운 찻물과 찻잎을 몽땅 뒤집어 쓴 그의 모습은 몹시 낭패스러웠다.
장신성이 벌컥 역정을 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딸을 위해 분주히 노력한 나를 이런 식으로 대하다니! 충왕부가 파혼을 요구한 마당에 이제 서열이가 무슨 낯으로 고개를 들고 다니겠소! 다른 아이들의 혼삿길까지 막을 작정이오?”
얼굴에 붙은 찻잎을 떼어낸 장신성은 노여움이 극에 달해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는 사리분별 못하고 잘난 체하는 저 여인을 때리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고약한 여인 같으니! 아무도 서열이를 원하지 않는 게 당연하지! 당신의 괴팍한 성격 때문에 딸의 고생길이 훤히 열렸구려! 그나마 현 씨 가문에라도 시집갈 수 있는 걸 감지덕지해야 하오!”
분노로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오른 조옥언은 이어 찻주전자까지 내던져 버렸다.
“감히 누가 충왕부에서 파혼을 요구했다더냐! 충왕부는 당장이라도 서열이를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거늘!”
“…….”
“혼사는 서열이가 거부한 것이오! 뜰에 놓인 충왕비의 선물이 아직 치우지도 못할 정도로 쌓여 있지 않소!”
날아오는 찻주전자를 피한 장신성은 더욱 화가 치밀었다. 언제나 저렇게 퉁명스럽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어디서 나를 속이려는 게요! 그게 다 충왕부에서 돌려보낸 혼수인 걸 내 모를 줄 아오? 그들은 서열이를 원하지 않는다니까!”
조옥언이 냉소를 터뜨렸다.
“대체 서열이를 뭐라고 생각하는 게요. 아무도 원치 않는다? 그러니 아무에게나 시집을 보내겠다?”
“…….”
“똑똑히 들으시오! 지금 당장이라도 손만 내밀면 이 집에 들어와 데릴사위라도 하겠다는 가문이 줄을 서 있소! 어디서 감히 현 씨 가문 따위를!”
“그 현 씨 가문에서 서열이를 납치했잖소! 내가 모를 줄 아시오? 당신은 그저 내가 일을 해결했다고 인정하기가 싫은 거요!”
홍촉이 황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싸움을 말리려는 게 아니었다. 손님이 왔기 때문에 두 주인이 계속해 큰소리를 내게 만들 순 없었다.
“부인, 나리. 충왕비께서 오셨습니다. 지금 문 밖에 계십니다.”
조옥언은 매섭게 장신성을 노려보았다.
“가서 사주단자나 찾아오시오! 되찾아오지 못하면 더는 집에 돌아올 필요 없소. 첩실들과 그 자녀들을 데리고 당장 내 집에서 나가시오. 난 당신과 이혼할 것이오!”
깜짝 놀란 장신성이 얼른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어… 어… 어디서 그런 헛소리를 하오! 감히 누굴 내쫓겠다는 거요! 당신이야말로 아녀자의 도리를 지키지 않고 혼례를 올리기도 전에 다른 남자와……!”
조옥언이 장신성의 뺨따귀를 후려쳤다.
“장신성, 잘 듣거라! 내가 이번 생에서 누군가에게 가장 떳떳할 수 있다면 그건 바로 너일 것이다. 억울하면 썩 꺼지거라!”
장신성은 의자에 얼어붙어 움직이지 못했다.
“대체 내가 무슨 잘못을 했소! 난 서열이에게 혼처를 찾아줬소! 서열이가 시집가지 못하고 망신당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말이오!”
조옥언은 진심으로 다시 장신성의 따귀를 갈기고 싶은 심정이었다.
“어디서 딸을 원수 놈과 엮느냐!”
“현 씨 가문에 시집보내지 않으면 대체 서열이를 어디로 보낸단 말이오? 설마 평생 과부로 수절시킬 생각이오? 보시오, 지금 충왕비가 직접 찾아와 파혼을 요구하고 있잖소!”
아무리 기다려도 홍촉이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자 충왕비는 직접 방에 들어가기로 결심했다. 어차피 평소 장신성은 조옥언에게 부군의 대접을 받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충왕비 역시 딱히 그에게 정중히 예를 갖춰야 한다고 여기지 않았다. 그녀에게도 장신성은 마음에 드는 구석이 없는 자였다.
때마침 장신성의 마지막 말을 듣게 된 충왕비가 장중한 왕비복을 걸친 채 그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가 팔짱을 낀 채 불쾌한 얼굴로 장신성을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가요, 사돈어른? 서열이를 며느리로 맞이하는 건 우리 충왕부의 영광입니다. 본궁은 부인께 부디 충왕부의 체면을 봐서라도 어서 서열이를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 이렇듯 친히 온 것입니다. 그런데 파혼이라니요?”
장신성은 불쾌한 기색을 한껏 드러낸 충왕비를 보면서도 결단코 자신이 잘못했다는 걸 인정하지 않았다.
“헛소리! 충왕부가 여전히 서열이를 며느리로 맞이하겠다는 말입니까? 서열이는 두 시진 동안이나 납치를 당한 몸입니다!”
충왕비가 경멸하는 눈길로 장신성을 쏘아보았다.
“그게 뭐 어떻다는 것입니까? 그럼 본궁 또한 사람을 시켜 풍엽이를 한 번 납치당하게 하면 되는 것입니까? 충왕부는 한 번 정한 며느리는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으니 좌상께서는 부디 쓸데없는 걱정 마시지요!”
두 여인이 동시에 눈을 부라리자 장신성은 몸이 떨려오는 걸 느꼈다. 아무리 현 씨 가문에 혼담을 건넸어도 당연히 충왕부가 우선이었다. 미리 생각했던 바와 같이 충왕부에 딸을 몇 명 더 딸려 보낸다면 서열이의 결함을 메울 수 있으리라.
‘하지만 현 씨 가문은 어찌한다…….’
하찮은 현 씨 가문이야 가서 건넸던 사주단자를 되찾아오면 그만이었다. 가볍게 넘긴 장신성은 찻물을 뒤집어쓴 얼굴로 충왕비를 향해 웃으며 말했다.
“맞습니다. 충왕비께서는 역시 도량과 신의가 깊으시군요. 우리 장 씨 가문에서도 결코 세자를 홀대하는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십시오. 세자는 원하는 게 무엇이든 마음껏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로 인해 서열이가 불평하는 일은 절대 없을 테니까요!”
충왕비가 당혹스러운 얼굴로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분노한 조옥언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개만도 못한 것, 네 눈엔 서열이가 그리도 못난 자식이란 말이더냐! 저렇게나 비굴하게 굴다니!’
조옥언이 냉소를 터뜨렸다. 장신성에게 중요한 것은 그의 명성일 뿐 결코 딸의 행복이 아니었다. 장서열이 아니어도 그에게는 셀 수 없이 많은 자녀가 있었다. 그에게 장서열과 장서전은 그저 수많은 자녀들 중 일부였다. 그의 체면을 세워주면 총애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버리는!
그녀의 아이들에게 저런 아버지는 필요치 않았다. 조옥언이 소리쳤다.
“여봐라!”
놀란 장신성이 조옥언에게 삿대질을 하며 외쳤다.
“무슨 짓을 하려는 게요! 난 당신의 남편이오! 단 한 번도 당신을 버린 적 없는 남편이란 말이오!”
얼른 한 걸음 뒤로 물러선 충왕비는 고개를 돌린 뒤 못 본 척 시선을 피했다. 장 씨 가문은 조옥언의 손아귀에 있었다. 이 저택에서 그녀의 말은 곧 법이었다.
“분부하십시오, 부인!”
조옥언은 분노로 핑 도는 머리를 가라앉혔다. 다른 사람이 딸을 함부로 짓밟는 건 백 번 양보해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어찌 아버지라는 자가 딸을 모욕하는가.
“노야의 물건을 모두 내다 버려라. 이랑들과 그 자녀들도 마찬가지다. 그는 더 이상 내 남편이 아니다.”
“예!”
장신성은 당황해서 소리쳤다.
“당신은 장모님이 두렵지도 않소? 장모님께서는 당신이 행동을 분명 용납하지 않으실 거요! 장모님을 화병으로 돌아가시게 만들 작정이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