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6화
연경의 술집들은 이미 손님을 맞이하고 있었다. 공기 사이로 향기로운 술 냄새가 떠다니며 행인들을 유혹했다. 술을 마시지 못하는 사람조차 혹할 정도로 달콤한 향기였다. 미주(米酒, 쌀로 담근 술)의 향을 따라 코를 킁킁대면 뱃속까지 따뜻해지곤 했다.
술집은 오가는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술에 취한 자들은 풍류를 즐기며 시를 지었으나 간혹 행패를 부리는 자들도 있었다. 가히 인간 세상의 천태만상이라 할 만했다.
간단히 상투를 틀어 올린 준수한 소년은 정교하게 수놓인 비단 도포를 걸치고 있었다. 아름다운 옥 세 개를 허리춤에 늘어뜨린 그는 최근 부유한 상인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머리 위에 놓인 크고 푸른 옥석까지 그야말로 완벽한 상인 자제의 모습이었다.
그의 뒤에는 마르고 연약한 하인 한 명이 마치 무슨 잘못이라도 저지른 사람처럼 소심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현천기는 탄식했다. 머릿수를 채우기 위해 급히 돈을 주고 사온 하인이었다. 하지만 저런 꼴로는 한 눈에 들킬 게 뻔했다.
그러나 그는 집에 돌아갈 수도, 아버지와 연락을 취할 수도 없었다. 오로지 기다리는 것 외엔 달리 방도가 없는데다 마지막 비장의 패는 더더욱 함부로 사용할 수 없었다. 만약 장서열이 정말 공멸을 무릅쓰고 덤비는 것이라면 그의 이번 생은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계집은 제 얼굴이 아깝지도 않은지 뜻밖에도 모든 걸 버리면서까지 자신과 싸우려 하고 있었다.
현천기는 골치가 아팠다. 누군가에게 압박을 당하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집이 있어도 돌아가지 못하고, 주인이 있어도 섬기지 못하는 상황에 처하게 될 줄이야.
현천기는 멋스러운 한량인 척 살살 부채질을 하며 이따금씩 생각했다. 장서열이 자신의 진짜 얼굴을 본다면 그동안의 원망을 접고 기꺼이 자신의 편이 되지는 않을까.
그가 상상에 잠겨 있을 때였다. 돌연 야외에서 몇 명의 사내가 걸어 들어왔다. 높은 모자를 쓰고 검은 옷을 걸친 그들은 왼쪽 가슴팍에 작게 수놓아진 활 표식을 달고 있었다. 그들의 등장에 주변 사람들은 자연스레 길을 터주며 그들과 적당한 거리를 유지했다.
현천기는 긴장했다. 그는 그자들이 태자 수하의 일등공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자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태자가 직접 일등공을 움직였다는 건 현천기가 정말로 운이 없다는 걸 의미했다.
현천기는 손에 든 술을 마시지 않았다. 아니, 마실 수가 없었다. 그는 조용히 다른 사람에 묻어가길 바라며 두려움에 찬 얼굴로 그들을 관찰했다. 위장술 하나만큼은 누구도 따라가지 못할 만큼 자신 있었다.
그들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현천기의 긴장 역시 거세졌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태연한 척 오히려 더욱 호기심 가득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 중 한 명이 현천기를 바라보았다. 나머지 인원이 전부 자신을 향해 다가오기 시작하자 그는 결국 창문을 열고 곧바로 이층에서 뛰어내렸다.
긴박하고 은밀한 추격이 이어졌다. 일등공 중에서도 최상위에 해당하는 7인조가 헤매고 있을 무렵, 현천기를 골목 안으로 몰아세운 우두머리는 아무 말 없이 곧장 그를 쇠사슬로 묶어 끌고 나왔다.
손과 발이 모두 결박된 후, 현천기가 순간적으로 꾀를 냈다. 그들은 분명 자신에 대해 확신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 지금 뭐하는 거요! 은자를 원하면 내 아버지께서 원하는 만큼 줄 것이니 당장 풀어 주시오! 안 그러면 국물도 없을 게요!”
“헛수고 마시지요, 현 공자.”
표정 없는 일등공의 입에서 음산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검은 옷 아래 숨은 얼굴은 창백하고 혈색이 없었으며 눈은 죽은 물고기처럼 초점이 없었다. 빨간 입술만 움직이는 모습은 무척이나 소름끼쳤다.
현천기가 움직임을 멈췄다.
“노팔(老八), 나를 배신하는 거냐.”
그가 여전히 감정 기복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공자께서 가르쳐 주셨지요. 이익이 없으면 행동하지 말라고요.”
말을 마친 그는 사람을 시켜 현천기를 데려가게 했다. 노팔은 일등공 중에서도 지위가 높지 않은 자였다. 그는 압송 담당이었으며 전방에서 발 빠르게 보고 사항을 전달했다.
현천기는 노팔이 패기가 넘치고 상황 판단이 빠른 자라는 걸 인정했다. 노팔은 황제가 아닌 태자를 선택했고, 이렇게나 빨리 태자의 눈에 들었다. 역시 그가 가장 신임한 부하다웠다. 안목 역시 자신을 빼닮지 않았는가.
말을 마친 노팔은 다시 현천기의 곁으로 돌아와 그를 직접 압송했다. 죽은 물고기 같은 눈을 번뜩이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오싹했다. 노팔은 굳이 숨기려는 기색 없이 현천기에게 말을 꺼냈다.
“공자, 어쩌면 다시 재기할 기회가 있을지도 모릅니다.”
현천기의 눈빛이 굳었다. 그 역시 같은 생각이었다. 태자가 자신을 생포했다는 건 마지막 기회를 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를 잘만 이용하면 비록 큰 대가를 치를지언정 살길을 도모할 수 있을 것이다.
노팔은 현천기가 희망을 갖는 모습을 보며 음산하게 웃었다.
‘살아남으십시오.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자기 자신을 팔아서라도 말이지요!’
현천기는 감옥을 찾아온 구염락에게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다.
* * *
저군전 지하 감옥, 구염락은 동물 가죽을 씌운 박달나무 의자에 앉아 갇혀 있는 현천기를 바라보았다. 쉴 새 없이 떠드는 현천기의 말을 듣던 구염락이 점점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무엇을 주저하십니까! 이건 두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을 수 있는 기회입니다! 소인을 폐하께 넘기시면 폐하께서는 장 씨 가문과 거래하여 장 씨 아가씨가 저를 처리하도록 넘겨줄 것입니다!”
“…….”
“아니면 아예 전하께서 친히 저를 처벌하시어 장 씨 가문 아가씨의 복수를 하십시오! 그러면 아가씨는 분명 전하께 감사하게 될 겁니다! 보잘 것 없는 목숨 하나로 전하께 이바지할 수 있는 건 소인의 영광입니다.”
“…….”
“전하, 부디 심사숙고하십시오. 소인을 그냥 넘기지 마시고 천천히 괴롭히는 걸 보여 주셔야 합니다. 그래야 장 씨 아가씨를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구염락이 감옥에 내려온 뒤, 현천기는 한시도 쉬지 않고 온갖 잔인한 수법을 늘어놓으며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자신이 고안한 이 충격적이고 수치스러운 고문들이 장서열을 기쁘게 만들기를 바랐다.
구염락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에는 현천기를 죽이지 못하는 게 한이었으나 지금은 도리어 마음이 평온해지고 있었다. 현천기는 확실히 자신과 많이 닮은 자였다. 목표를 위해서라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았고, 자존심과 자기 존엄을 버릴 줄 알았으며 이용할 수 있는 건 절대 놓치지 않았다.
그렇기에 오히려 현천기 같은 인간을 괴롭히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무슨 수를 써야 차라리 죽여 달라는 소리가 나올까?’
“전하! 소인이 비록 아는 건 적지만 여인의 마음을 얻으려면 어르고 달래며 비위를 맞춰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구염락이 골치가 아프다는 듯 귀밑머리를 문질렀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캄캄한 지하 감옥을 나지막이 울렸다.
“난 줄곧 자네를 좋아했지. 그런데 자네는 날 곤란하게 만들었어…….”
현천기도 후회하고 있었다. 그리도 간단한 계략에 갑자기 장서열이 끼어들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일은 걷잡을 수 없이 망가졌다. 그는 대체 누구에게 하소연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현천기는 쓴웃음을 금치 못했으나 필사적으로 간청하지 않았다.
“소인이 어찌 후회하지 않겠습니까. 제가 갔을 땐 이미 손쓸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소인, 다시 되돌릴 수만 있다면 반드시 부하를 철저히 단속할 것입니다.”
“사람 일은 한 치 앞도 모르는 것이다.”
현천기가 탄식했다.
“그렇습니다.”
“차라리…….”
돌연 눈을 가늘게 뜬 구염락이 광채를 드러냈다.
“이 자리에서 널 죽여주마. 그녀의 눈앞에서 모욕을 당하느니 그 편이 낫겠지.”
멍하니 그를 쳐다보던 현천기가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고개를 숙였다.
“전하, 그 방법이 저를 가장 고통스럽게 만드는 건 틀림없습니다. 허나 장 씨 아가씨는 분명 저를 갈가리 찢어 죽여야 만족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진정으로 그녀를 위하신다면 그리 행동하셔서는 안 됩니다.”
“네 말이 맞구나.”
“예. 하여 소인 역시 후회하고 있습니다. 소인이 식견이 짧아 우를 범했습니다.”
‘이번 일은 실수인 셈 칠까.’
구염락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완벽히 성인이 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절로 우러러보게 만드는 기세가 느껴졌다.
“편히 쉬거라. 얼마 못 가 죽느니만 못한 시간을 보내야 할 테니.”
현천기가 바닥에 머리를 조아렸다.
“성은에 감사드립니다, 전하.”
현천기에게 있어 죽음보다 더 두려운 건 없었다. 정말로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된대도 어떻게든 살아야 했다.
구염락이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 순간, 현천기는 왼쪽 주먹을 꽉 쥐며 스스로에게 상기시켰다.
‘죽느니만 못한 삶은 두렵지 않다!’
자신의 쓸모를 증명해 어떻게든 살아남아야만 어렸을 때부터 별러 온 적을 직접 처치할 수 있었다.
* * *
장신성은 우연히 하인들이 수군대는 말을 듣게 되었다. 장서열이 현 씨 가문 공자에게 납치를 당했으며, 그 일로 어젯밤 세자가 파혼을 요구하는 바람에 조옥언이 장서열을 끌어안은 채 하루 종일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그 말을 전해 들은 장신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만약 이대로 어느 가문에서도 딸을 받아 주지 않는다면 남 보기에 얼마나 부끄럽겠는가! 그리하여 딸을 끔찍하게 사랑하는 장신성은 늠름한 아비의 모습으로 중임을 짊어진 채 현 씨 가문에 혼담을 건네러 갔다.
알록달록한 저택에서 장신성을 맞이한 현일의 안색 역시 매우 다채로웠다. 현일은 할 수만 있다면 장신성을 곧장 내쳐버리고 싶었다. 사람이 무식하면 용감하다고 했던가. 어리석은 장신성은 자신의 부인이 연경에서 얼마나 특별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지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한 채였다.
장신성은 눈앞의 현일은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 그저 주위를 둘러보며 딸이 앞으로 현 씨 가문에 시집을 오면 참으로 고생이 많겠다고 속으로 혀를 찼다. 어느 것 하나 장 씨 가문보다 나은 게 없었다.
‘그러나 서열이는 이미 선택권이 없으니 시집갈 사내라도 있다는 걸 다행으로 여기자.’
“정말 그리 결정한 것이오?”
쭈글쭈글한 손으로 사주단자를 움켜쥔 현일이 비웃으며 말했다.
“당신에게 결정권이 있소?”
현일은 지금까지 이런 남자를 데리고 산 조옥언이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장신성이 즉시 화를 냈다.
“무엄하오!”
장신성의 눈에 현일의 태도는 일개 2품 관리가 감히 좌상(左相)에게 도발하는 꼴이었다. 좌상의 적녀인 장서열이 현 씨 가문과 혼사를 맺는 일은 그들 가문이 몇 대에 걸쳐 받을 복을 한꺼번에 받는 일이었다. 마땅히 고개를 조아리며 감사히 여겨도 모자라지 않은가.
“당신의 아들이 그런 천박한 짓을 저지른 건 바로 이런 결과를 원해서가 아니오?”
현일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장신성을 쏘아보았다. 연경 사람이라면 누구나 장서열을 피하기에 급급했다. 장서열을 맞아들이지 못해 안달인 건 오직 그 멍청한 충왕부뿐이었다. 그런데도 장신성은 마치 장서열이 모두의 보배인 양 으스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