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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45)화 (145/449)
  • 제145화

    현천기는 군중 속에 섞여 들어가 조용히 칩거했다. 그가 손에 넣은 물건은 이미 비밀리에 옮겨진 후였다. 이는 훗날 그의 목숨을 지켜 줄 부적이었다.

    충왕부와의 싸움은 분명 장기전이 될 것이다. 그는 보잘 것 없는 충왕부 때문에 몸을 숨긴 것이 아니었다. 그는 황제와 태자의 태도를 살피고자 했으며, 특히 태자의 행보에 주목하고 있었다.

    만약 태자가 죄를 묻지 않는다면 그는 함께 싸울 지원군을 얻는 셈이었다. 그러나 반대의 상황이 벌어진다면 그는 어떻게든 목숨을 부지할 방도를 찾아야 했다. 심지어 태자가 직접 나선다면 그에게는 마지막 살길조차 요원했고, 현 씨 가문은 파멸이었다. 그리고 태자의 심복은 교체될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숨어든 현천기는 인파 속에서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다 마침내 결정을 내리고 발걸음을 옮겼다.

    * * *

    장서열은 집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웃음기 없는 얼굴만 제외하면 붉은 치마에 도도하고 아리따운 자태까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때마침 반운각에서 딸을 기다리던 조옥언은 돌아온 장서열을 보고 얼른 농교와 완정을 시켜 시중을 들게 했다.

    잠시 뒤, 옷을 갈아입은 장서열은 어머니와 함께 죽탑(竹榻, 대나무로 만든 평상형 침대로 앉거나 눕는 데 사용)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셨다.

    조옥언의 시선은 줄곧 딸에게 머물러 있었다. 그녀는 약간 지쳐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여전히 흐트러짐 없는 얼굴이었다. 조옥언은 의연한 딸의 모습에 놀랐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아팠던 탓에 딸의 손을 꼭 쥐고 자책하는 얼굴로 말했다.

    “어제 이 어미가 너와 함께 있었더라면, 어쩌면…….”

    그러나 장서열은 달콤하게 웃어 보였다.

    “어머니,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만약 어머니가 저와 함께 계셨다면 공연히 제 걱정거리만 하나 더 늘었을 거예요.”

    의아한 얼굴로 딸을 바라보던 조옥언은 미안함에 애써 눈물을 삼키며 말했다.

    “서열아. 웃고 싶지 않으면 웃지 않아도 된단다.”

    장서열 역시 어머니의 손을 꼭 마주 잡았다.

    “어머니, 제가 세상에서 가장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사람은 바로 어머니예요. 어머니가 울지 않으시면 저도 웃지 않을 게요.”

    결국 참지 못한 조옥언은 딸을 껴안고 몹시 슬퍼하며 흐느껴 울었다. 딸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밀려들었다.

    “착한 내 딸… 네가 고생이 많구나. 어미가 반드시 네 복수를 해주마. 어미는 충분히 그럴 만한 힘이 있다.”

    장서열의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녀가 팔을 벌려 어머니를 껴안았다.

    “황제를 찾아가 울기라도 하시려고요? 그는 어머니를 동정하며 도와 줄 수 있겠지만 그것으로 모든 빚을 갚았다고 후련해 할 거예요. 그럼 어머니의 한은 누가 풀어 주겠어요.”

    조옥언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내 딸을 위해서라면 아무것도 상관없다. 네가 행복하게 사는 것만이 이 어미의 바람이란다.”

    “제 마음도 어머니와 같아요. 전 어머니께서 평생 행복하셨으면 좋겠어요. 또 저는 황제를 비롯해 어머니를 흠모하는 모든 이들에게 어머니가 언제나 당당한 모습이길 바라요. 그러니 제 걱정은 마세요. 제게도 다 생각이 있어요.”

    그러나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자신의 피와 살 같은 자식을 염려하기 마련이었다. 게다가 그녀의 아들은 전장에 나가 있었으며, 딸은 불미스러운 일에 휘말렸다. 둘 중 한 명이라도 편치 않다면 그녀 또한 사는 의미가 없었다.

    돌연 어머니를 떼어 낸 장서열이 그녀의 슬픈 눈을 바라보았다.

    “어머니, 절대로 황제를 찾아가지 마세요. 그럴 가치조차 없어요. 저를 위해서라면 더욱 그러지 말아 주세요. 정말로 어머니의 도움이 필요하면 그때 말씀드릴게요. 아셨죠?”

    장서열이 대답을 기다리는 얼굴로 조옥언을 바라보았다. 장서열은 어머니가 가진 최후의 무기까지 사라질까 두려웠다. 그녀는 어머니의 과거를 함부로 훼손할 권리가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건 죽는 것보다 더 괴로운 일이었다.

    조옥언은 진지한 얼굴의 어린 딸을 바라보며 돌연 웃음을 터뜨렸다.

    “어리석기는. 어째서 네가 벌써부터 그런 걱정을 하는 게야. 네가 지금 기댈 수 있는 의지처도 결국 이 어미를 향한 황제의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직접 청하시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금까지는 황제가 자진해서 도운 것이니까요.”

    “알았다. 그럼 이제 말해 보거라. 혹 현 씨 가문의 그 놈이 네게…….”

    장서열의 눈 속에 어두운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절 죽이려 했지요. 그리고 헌원가를 범하려 했고요. 하지만 저희를 본 자들은 모두 죽었어요.”

    놀란 조옥언이 멈칫했다. 마음이 아파 고개를 떨군 조옥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앞으로 어쩔 셈이냐?”

    “현천기 그 자를 죽을 때까지 괴롭힐 거예요.”

    “그래. 내키는 대로 하거라.”

    단칼에 죽이는 것조차 아까웠다. 반드시 능지처참(陵遲處斬)보다 더한 고통을 맛보게 해 줄 것이다.

    “그럼 풍엽은…….”

    “어머니, 저와는 인연이 아니에요.”

    “하지만… 그 아이는 쉽게 너를 저버릴 사람이 아니잖니.”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어머니라면 어떻게 하셨겠어요? 혼인하셨을까요?”

    조옥언은 자연히 여자에게는 남자가 필요하다고 말을 떼려다 문득 낡은 사고방식이라는 생각이 들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딸의 결정에는 분명 그만한 논리가 있을 터였다.

    홍촉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부인, 세자께서 아가씨를 만나겠다며 밖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조옥언이 즉시 대답했다.

    “가서 전해라. 아가씨는 죽었다고.”

    다음 날, 눈을 뜨자 방 안에는 이미 햇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장서열은 침대에 누운 채 사람들이 몰려오기를 기다렸다. 그들은 그녀를 일컬어 불결하고 더러운 존재라고 손가락질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는 그런 그녀를 동정하고 고소해 할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어서 일어나라는 초 마마의 잔소리와 농교와 완정의 인기척 외에는 어떠한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세 사람의 얼굴에 딱히 숨기는 기색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결국 침대에서 일어난 장서열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몸치장을 시작했다.

    ‘열() 자가 새겨진 속옷은? 그림을 그려서 집집마다 돌리겠다고 했잖아. 도망친 현천기는 어떻게 된 거지? 이렇게 그냥 지나간다니… 말도 안 돼.’

    현천기라면 이번 일을 반드시 다른 사람에게 뒤집어씌울 것이 분명했다. 그는 분명 추잡한 사내의 손에 속옷을 들려 보낸 후 가당찮은 혼담을 꺼낼 것이다.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장서열은 어리둥절했다.

    ‘설마 너무 멀리 도망가서 며칠 더 걸리는 건가?’

    그녀가 속으로 스스로를 비웃으며 초 마마를 향해 물었다.

    “오늘 특별한 방문객은 없었고?”

    순간 장서열의 머리를 빗고 있던 초 마마의 손이 우뚝 멈춰 섰다. 장서열은 긴장했다.

    ‘역시 누군가 찾아온 거야.’

    다시 머리를 빗기 시작한 초 마마가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었다.

    “아가씨, 세자를 용서해 주세요. 아가씨를 위해 범인도 잡아야 하는데 매일 밤새도록 밖에 서 있을 수는 없잖아요. 세자가 범인을 잡아 오면 하자는 대로 따르겠다고 하셨죠? 세자께서는 그걸 염두에 두고 계신 거예요.”

    초 마마는 장서열이 당연히 세자에 관하여 묻는 줄 알고 덧붙여 말했다.

    “세자께서는 어제 밤늦게 떠나셨어요. 아가씨를 무척 보고 싶어 했고요.”

    장서열은 초 마마가 자신의 질문을 완전히 잘못 짚고 있다는 걸 알았다. 초 마마의 말대로라면 아무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은 것이었다.

    ‘말도 안 돼. 대체 현천기는 언제 움직일 계획인 거지? 아니면 아직도 숨느라 정신이 없는 거야?’

    장서열이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현천기는 궁지에 몰릴수록 꾀를 내는 자로 절대 타협이 불가능했다. 설마 그가 정말로 집집마다 그림을 보낼 작정이라면…….

    “아가씨, 아가씨! 진주 장식은 잡으시면 안 돼요.”

    완정이 다급하게 장서열의 손에서 머리 장식을 빼앗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장서열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초 마마, 머리 장식은 너무 많이 꽂지 마.”

    그녀는 오늘도 현 씨 가문에 찾아갈 작정이었다. 비록 사건은 무마됐지만 여전히 유언비어는 사라지지 않고 있었다.

    한편,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장서목과 장서영은 정방(正房)이 웃음거리가 되기를 기다렸다. 장서양은 새벽부터 자신의 방을 지키고 앉아있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며 입을 열었다.

    “듣자하니 장서열의 혼약이 깨졌다고 하는구나.”

    장서목이 즉시 환호성을 질렀다.

    “이야, 인과응보군요! 하기야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파혼을 당해도 싸죠. 사람을 홀리는 그 얼굴을 보세요. 딱 봐도 단정한 규수처럼 보이지 않잖아요. 이제 세자도 없는데 무슨 희망이 있겠어요?”

    순간 장서영의 표정이 멍해졌다. 그녀가 사슴 같은 두 눈을 깜빡이며 장서양을 바라보았다. 사랑스러운 그녀의 모습은 꼭 인형 같았다.

    “그럼… 세자가 너무 불쌍하잖아요…….”

    장서목이 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불쌍하기는. 서영아, 세자는 드디어 고생에서 벗어난 거야.”

    장서영이 작은 얼굴을 찡그리며 근심 어린 말투로 중얼거렸다.

    “그렇지 않아요. 세자가 서열 언니를 얼마나 좋아하는데… 언니는 어떻게 그를 내칠 수 있죠…….”

    장서양이 즉시 엄숙하게 말했다.

    “쓸데없는 생각 마라. 어머니께서 하신 말씀 잊었어?”

    장서양이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계속해 말했다.

    “너에게는 훨씬 좋은 선택권이 있어.”

    작은 얼굴을 붉게 물들인 장서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녀는 쑥스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저… 저도 알아요…….”

    국암사에 있는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혼인하여 상상도 할 수 없는 부귀와 권세를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앞으로 다시는 장서열의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었으며, 이 저택보다 더 큰 황궁에서 살 수 있었다. 하찮은 남녀 간의 정 때문에 그 모든 걸 포기할 수는 없었다.

    장서양이 누이를 칭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감정은 사치일 뿐이다. 그들은 존귀한 장서열이 아니므로 감정에 따라 행동해서는 안 되었다. 그들은 각자의 힘으로 지위를 상승시켜야 했다.

    옷소매를 잡아당기던 장서영은 갑자기 무언가 생각난 듯 소매에서 연지 한 통을 꺼내 들었다.

    “곧 서 씨 가문 아가씨의 생일이지요? 그럼 큰오라버니도 선물을 준비해야 해요. 제가 만든 이 연지는 거리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부드럽고 고와서 아가씨들이 아주 좋아해요. 제가 특별히 미래의 올케를 위해 가져왔으니 생일 선물로 주세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장서목이 곧바로 입술을 삐죽였다.

    “값어치 없는 물건이야.”

    장서영이 얼른 고개를 들며 반격했다. 얼굴에 홍조가 채 가라앉지 않은 모습은 무척이나 보기 좋았다.

    “오라버니가 뭘 알아요! 이건 성의라고요. 새언니는 분명 큰오라버니의 성의에 감동받을 거예요!”

    장서양의 엄숙한 눈빛 속에 평소와 다른 다정함이 스쳐 지나갔다. 서 씨 가문의 아가씨는 총명하고 단정했다. 적녀인 그녀가 서자인 자신과의 혼사에 응해준 것에 대해 평소 감정 변화가 크지 않은 장서양은 몹시 감격했었다.

    “큰오라버니, 꼭 선물로 주세요. 분명 좋아할 거예요.”

    장서양은 다시 본래의 냉정한 모습으로 돌아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탁자 위에 두거라.”

    그 모습에 장서영이 불만스럽게 그를 타일렀다.

    “오라버니, 평소에 많이 웃으세요. 정색하고 있으면 너무 못생겨 보여요. 새언니가 놀라서 도망이라도 가면 어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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