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4화
급히 현장에 도착한 서풍엽이 무리들을 이끌고 현 씨 가문의 대문을 부수기 시작했다.
“모조리 죽여라! 한 명도 남기지 마라!”
창과 칼이 움직이고 화살이 비처럼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변에 몰려 있던 군중은 우왕좌왕하며 황급히 자리를 피해 뒤쪽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막다른 길에서 검은 복면을 쓴 무리가 나타났다. 이들은 구경하고 있던 군중을 모두 죽였다.
조옥언은 몹시 충격 받은 얼굴로 조금 전 벌어진 살육의 현장을 지켜보았다. 딸과 꼭 닮은 외모가 아니었다면 그녀 역시 그들의 칼 아래 유명을 달리했을 것이다. 참혹하기 그지없던 거리는 검은 복면을 쓴 자들이 떠남과 동시에 티끌 하나 없이 고요한 모습을 되찾았다.
서풍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누가 움직인 거지?’
이어 장서열을 부축하기 위해 뛰어간 그는 달라진 그녀의 눈빛에 깜짝 놀랐다. 불과 몇 시진 전까지 그와 달콤한 사랑을 나누며 애정 어린 눈길을 보내던 그녀는 지금 이 순간 놀랄 만큼 낯선 모습이 되어 있었다.
황급히 장서열의 어깨를 끌어안은 서풍엽이 속으로 적잖이 당황해하며 말했다.
“서열아, 이 일은 내게 맡겨. 내가…….”
애써 안타까운 마음을 감춘 그녀가 서풍엽을 밀어내며 거의 분노에 가깝게 소리쳤다.
“지금 뭐하는 거예요! 저 사람들을 다 죽이면 어쩌자는 거예요! 이제 겨우 사람들에게 현 씨 가문이 어떤 것들인지 각인시켰는데 당신이 왜 나타났어요! 저들이 없으면 나보고 현천기와 어떻게 대적하라고요!”
장서열의 어깨를 강하게 잡은 서풍엽이 그녀와 눈을 마주친 채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오해야! 뒤에 온 사람들은 나와 무관해. 하지만 난 그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아! 현천기 짓이야? 내가 반드시 복수해 줄게! 나 서풍엽이 그 자식을 갈가리 찢어 죽이지 않으면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까 너는 먼저 돌아가. 모두 내게 맡겨!”
장서열도 그러고 싶었다. 현천기가 한낱 서생에 불과했다면 그녀는 분명 서풍엽의 손을 빌어 죽을 때까지 그 자를 괴롭혔을 것이다.
하지만 현 씨 가문의 권세는 충왕부 못지않았으며 현천기는 치밀했다. 만일 서풍엽과 현천기가 서로 강경하게 설욕전을 벌인다면 충왕부는 필시 타격을 피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면 그녀는 충왕비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현천기는 반드시 그녀를 위협하고 그녀의 명성을 땅에 떨어뜨릴 것이다. 무슨 짓을 해도 바꿀 수 없는 결과라면 구태여 충왕부를 끌어들여 자신과 함께 추락하게 만들 순 없었다.
장서열은 전투를 벌이며 사상자를 내고 있는 시위들을 바라보았다. 짜증과 원망이 동시에 올라왔다. 눈앞에 놓인 성공이 물거품이 되려 하고 있었다.
“당신과는 상관없는 일이에요. 가요! 가라고요!”
그녀는 마침내 서풍엽을 포기했다.
“꺼져!”
서풍엽은 움직이지 못한 채 낯설고도 익숙한 여자아이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선하고 장난스러운 모습을 벗어 던지고 뼛속까지 냉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서풍엽은 몹시 불안했다. 그의 서열이는 언제나 해맑게 활짝 웃는 아이여야 했다. 그러나 홀로 비밀을 간직한 그녀는 그 누구도 친밀하게 구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와 함께 가자.”
서풍엽이 장서열을 잡아당기며 억지로 데려가려 하자 그녀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이거 놔요!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요! 서풍엽, 날 강제로 끌고 가는 날에는 평생 죽을 때까지 당신을 보지 않겠어요!”
장서열이 서풍엽을 노려보며 냉정하게 쏘아붙였다.
“당신은 지금 내가 막무가내로 말썽을 부린다고 생각하죠? 억지를 쓰는 것 같죠? 하지만 당신이 뭘 할 수 있어요? 현 씨 가문이 어떤 자들인지 당신도 알잖아요! 저들은 황실의 비호를 받고 있어요!”
“…….”
“봐요, 당신이 데려온 자들은 저택에 들어가지도 못하잖아요! 그러고도 당신이 세자예요? 당장 꺼져요! 앞으로 평생 보고 싶지 않으니까!”
일련의 사태에 겁에 질려 있던 조옥언은 딸의 말을 듣고 순간 당황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마음을 놓았다. 일을 이렇게까지 벌인 이상 혼인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딸의 말은 진심인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은 과거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무사히 혼인을 한다고 한들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조옥언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누가 봐도 자신에게 한참 못 미치는 사내와 혼인한 덕분에 그녀는 집안에서 최고의 권력을 누리며 편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딸이 충왕부에 들어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스스로 명예를 실추시킨 딸이 혼인 후에 왕부에서 어찌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겠는가. 어쩌면 하인들조차 딸아이를 업신여길지 모를 일이었다.
조옥언은 차라리 딸이 혼인하지 않고 자신의 곁에 남기를 바랐다. 그렇다면 최소한 뭇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만신창이가 되지는 않을 것이다.
서풍엽은 그저 가만히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그녀가 왜 그리 분에 못 이겨 화를 내는지 알 수 없었다. 심지어 자신과 사랑을 나눈 직후였다. 자신이 그녀를 돕지 못하게 하는 것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감당하지 못할까 봐 걱정하는구나.”
천천히 말을 마친 서풍엽이 현 씨 가문의 저택을 바라보았다. 그가 데려온 시위들은 얼마 남아있지 않았다.
“네가 왜… 나를 쫓아내는지 알 것 같아.”
장서열은 서풍엽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제발 여기에 있지 마!’
지금 자신의 모습은 흉할 것이 뻔했다. 곧 그녀는 현천기를 물어 죽일 것이고, 그때가 되면 서풍엽은 자신이 얼마나 잔혹하고 사악한 계집인지 알게 될 것이다. 그녀는 원한은 반드시 갚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서풍엽이 더 이상 자신을 귀히 여기지 않을 미래는 견딜 수 없었다.
한 발 앞으로 다가간 서풍엽이 다정한 눈길을 던졌다.
“이번 일은 내게 맡기고 먼저 돌아가.”
“싫어요! 내 말 못 알아들어요?”
“서열아, 화내지 마…….”
여전히 애정 가득한 말투였다. 그리고 그건 장서열이 현재 가장 보고 싶지 않은 모습이기도 했다.
“좋아요. 날 설득하려면 지금 당장 현천기를 잡아서 내 앞에 데려와요. 그러면 당신이 하자는 대로 다 할게요.”
장서열이 팽팽한 기세로 서풍엽을 노려보았다. 그는 여전히 따스한 눈을 하고 있었다.
“잠시만 기다려. 우리 쪽 사람을 보내 놨어.”
이미 그가 보낸 이들이 현천기가 있는 관아에 도착해 있을 터였다.
장서열은 시선을 돌린 채 여전히 자신을 바라보는 눈길을 무시했다. 어차피 기대조차 없었다. 현천기가 얌전하게 붙잡힐 리 없지 않은가. 대리시나 윤천부(尹天府)라고 해서 달리 방법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럴 것 같았다면 이미 그녀가 관아에 달려가 북을 두드리며 억울함을 호소했을 것이다.
잠시 후, 충왕이 급하게 모습을 드러냈다. 조옥언을 본 충왕은 순식간에 엄숙한 표정을 누그러뜨렸다. 충왕이 따뜻한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말했다.
“우선 집으로 돌아가시지요. 서열이가 무탈하도록 제가 지켜볼 것이니 안심하십시오. 사람을 시켜 저택으로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충왕을 바라보는 조옥언의 눈빛에 따스함이 배어 나왔다.
“율아, 혹 서열이가 말을 듣지 않는다면 그냥 내버려 두렴.”
말을 마친 조옥언은 딸을 한 번 바라본 뒤 충왕이 붙여 준 하인을 따라 현장을 떠났다.
조옥언이 가마에 오른 것을 확인한 충왕은 탄식하며 다시 자신의 아들과 예비 며느리를 바라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만족스러운 아이들이건만… 그는 지금 이 순간 몹시 무력함을 느꼈다.
“현천기를 놓쳤다.”
그 말에 즉시 서풍엽의 손을 뿌리친 장서열이 크게 소리쳤다.
“그깟 사람 한 명 잡지 못하면서 대체 무슨 자격으로 나더러 물러나라는 거예요?”
서풍엽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걸 느끼며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마음이 무척 아팠다.
“이틀만 시간을 줘.”
“이틀 후에도 잡지 못하면요? 그 다음에는 나흘인가요? 당신은 거짓말하는 사람이 아니니 내게 며칠이 걸릴 거라고 말하기 전에 현 씨 가문이 어떤 곳인지부터 먼저 따져 봐요! 저들이 당신을 저택 안으로 들여보내 준다고 쳐요. 거기에 현천기가 있을 것 같아요? 그 음흉한 자를 대체 어디 가서 잡아 온다는 거예요?”
서풍엽의 눈에 감정이 격앙된 장서열은 비록 화를 내고 있어도 여전히 봉황처럼 아름다웠다. 하지만 한달음에 달려온 부친의 모습에 그는 현 씨 가문을 상대하는 게 생각보다 쉽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했다. 감히 조국공부의 손녀이자 충왕부의 며느리에게 마수를 뻗은 자였다. 쉬운 상대일 리 없었다.
“서열아, 아직 시간은 많아.”
“난 기다릴 수 없어요!”
뭔가를 말하려던 서풍엽은 도통 자신의 말을 따를 것 같지 않은 장서열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충왕은 아들을 저지한 후 딸처럼 아끼는 장서열을 따뜻한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나비처럼 연약한 아이였다.
“나 역시 네가 매우 억울하다는 걸 안다. 분명 난처한 일일 것이고, 그래서 풍엽이도 멀리하려는 것이겠지. 하지만 서열아, 우선 나를 믿고 기다려 보거라. 어쩌면 네 생각만큼 타격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
장서열은 감동했지만 여전히 필사적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얼마나 기다릴까요? 삼 년이요? 아니면 오 년이요? 왕야와 세자께서 조정에서 피터지게 싸우는 동안 대체 결론은 언제 나고 전 언제 복수를 하겠습니까. 정말 그게 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충왕이 몹시 엄격한 기세로 입을 열었다.
“서열아, 그들은 네가 그렇게까지 할 만한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그럴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는 제가 판단하겠습니다. 현 씨 가문과 저희 장 씨 가문은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어요. 전 끝을 볼 겁니다. 설령 이 일이 연경 전체에 시끄러운 풍문을 몰고 온대도요!”
“서열아!”
충왕의 눈빛이 더욱 매서워졌다.
“너를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해라!”
장서열이 도도하게 고개를 치켜들었다.
“제 어머니께서 윤허하신 일입니다. 서전 오라버니 또한 반대하지 않을 거예요. 그리고… 아마 누구라도 충왕부의 세자비를 마다하지 않겠지요.”
충격을 받은 서풍엽이 순간 놀란 얼굴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서열아!”
일부러 자신을 밀어내기 위해 하는 말이라도 결코 듣고 싶지 않았다.
“내가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동시에 큰 모자를 쓴 이들이 소리 없이 나타났다. 번개처럼 빠르게 다가온 이들이 입을 열었다.
“태자 전하께서 내린 전언입니다. 그자는 이미 저희 쪽에서 바짝 뒤쫓고 있습니다. 반드시 사흘 안에 기별을 드릴 테니 오늘은 우선 집으로 돌아가라 하셨습니다.”
말을 마친 이들은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사람인 양 다시 순식간에 모습을 감췄다. 문득 가슴이 덜컥 내려앉은 서풍엽이 장서열을 끌어안았다. 그러나 장서열은 서풍엽을 밀어냈다.
“봤죠? 당신이 얼마나 무능력한지! 이런 때에는 당신은 아무 도움도 되지 않아요!”
현천기가 도망쳤다. 이미 속옷이 온 천하에 공개된 게 아닐까 싶었지만 이내 그녀는 냉소를 터뜨렸다. 어차피 각오한 일이었다. 현천기를 제거할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중요치 않았다.
몸을 돌린 장서열이 그대로 걸어갔다. 서풍엽이 그녀를 붙잡으려 했으나 소용이 없었다. 마음을 단단히 먹은 그녀는 그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현 씨 가문의 저택 앞에 선 충왕은 아들과 장서열의 모습에 고개를 저으며 탄식했다.
‘정녕 충왕부는 국공부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운명이 아니란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