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3화
“서열아… 정말 괜찮아?”
“괜찮아요. 이제 안 아파요.”
서풍엽이 순간 얼굴을 붉혔다. 그는 천진한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가 어색함에 처음으로 말문이 막혔다.
“그걸 물어본 게 아니라…….”
장서열이 그의 어깨를 끌어안고 고개를 갸우뚱했다. 눈처럼 하얀 피부 위에 반쯤 가려진 붉은 자국이 보였다.
서풍엽은 별안간 피가 끓어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녀의 팔을 떼어내고 싶었지만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지자 굳이 떼어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곧 저택에 도착할 시간이었다. 서풍엽은 장서열을 위해서라도 이런 모습을 누군가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말로는 너를 못 당하겠다.”
서풍엽이 진지한 눈으로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잘 들어. 내가 있는 한 어떠한 경우라도 다시는 어제와 같은 일은 없을 거야.”
엄숙한 그의 말에 장서열이 장난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오늘 같은 일은요?”
다시 얼굴을 붉힌 그는 수줍어하다가 화를 터뜨렸다.
“장서열!”
그녀가 웃음을 터뜨렸다. 오늘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은 강렬하고 완벽했다. 그녀는 서풍엽의 몸에 기댄 채 그가 아무리 어르고 달래도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았다.
마침내 마차가 장 씨 가문의 저택 앞에 멈추었을 때, 장서열은 비로소 아쉬운 듯 그에게 입을 맞추고 손을 놓았다.
“내가 바래다줄게.”
서풍엽이 마차에서 내리려 하자 그녀가 이를 막으며 곱게 눈을 치켜떴다.
“내가 뭐 어린애인가요? 아님 내가 떠나는 게 그렇게 아쉬워요?”
서풍엽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래, 이 장난꾸러기 아가씨야.”
말을 마친 서풍엽은 그녀를 안아 들고 농교 옆에 세워 주었다. 방금 전까지 손에서 놓지 못하고 만지작거리던 머리카락을 정리해 주며 서풍엽이 입을 열었다.
“기다리고 있어. 궁에 다녀올게. 아무래도 혼사는 빠를수록 좋겠어.”
장서열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어뜨렸다. 볼에 홍조를 띤 그녀가 땅에 있지도 않은 흙을 걷어차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
기다릴게요. 만약 당신이 돌아오지 않아도 돌아온 것으로 해요.
장서열은 서풍엽이 얼른 떠날 수 있도록 기쁜 표정을 지으며 몸을 돌렸다. 서풍엽은 그녀가 저택으로 들어간 후 대문이 닫힐 때까지도 떠나지 못했다. 그는 손에 남아 있는 따뜻한 온기를 느끼며 웃었다.
이어 웃음기가 걷힌 그의 얼굴에 깊은 분노가 서렸다.
‘한 놈도 살려 두지 않겠다!’
닫힌 대문 앞에 서 있던 장서열은 서풍엽이 떠난 그 순간 즉시 서늘한 얼굴이 되어 온몸을 꼿꼿이 세웠다.
아가씨를 모시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던 농교와 완정은 그 서슬에 놀라 제자리에 멈춰 섰다. 그들 중 누구도 감히 아가씨께 가까이 다가갈 생각을 하지 못했다.
장서열은 처음부터 웃을 줄 모르던 사람이었던 것처럼 줄곧 그렇게 냉랭한 기세로 서 있었다. 몸을 움츠린 완정은 영문 모를 시선으로 농교를 바라보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셨는데 왜 갑자기…….’
농교는 가슴이 철렁했다. 아가씨는 마치 아주 어렸을 때로 되돌아간 것 같았다. 그때 아가씨는 조금이라도 거슬리는 일이 생기면 불같이 화를 내며 하인을 때렸다.
장서열의 눈썹이 치켜 올라가자 모든 하인들이 놀라서 떨기 시작했다.
‘하지만 아가씨는 오래전부터 밝고 온화하지 않았던가.’
한 시진 뒤, 장서열은 집안의 시위들을 총동원해 현 씨 가문의 저택으로 향했다. 놀란 조옥언이 뒤를 쫓으며 말렸지만 역부족이었다.
“여봐라! 당장 조국공부에 이 사실을 알려라!”
‘서열아,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르려는 것이냐!’
말에 올라탄 장서열은 서릿발처럼 차가운 눈으로 길을 재촉했다. 그녀는 현천기에게 대가를 치르게 할 작정이었다.
장서열이 현 씨 가문의 대문을 들이받을 생각으로 얼마 남지 않은 길목을 돌진하고 있을 때였다. 평소 조용하기 그지없던 저택 안에서 갑자기 셀 수 없이 많은 시위들이 뛰어 나와 이들의 행렬을 막아섰다.
냉소를 터뜨린 장서열이 현 씨 가문의 대문 앞에 서서 큰 소리로 외쳤다.
“현천기! 네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거라! 이 비열하고 파렴치한 소인배! 내게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게 해 주겠다고 했느냐? 네가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도 무사할 줄 알았느냐!”
“…….”
“나와! 모두에게 네가 어떤 인간인지 보여 주거라! 네가 힘없는 여인에게 대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나와서 밝히란 말이다!”
장 씨 가문의 시위들은 현 씨 가문의 저택을 둘러싼 이들 때문에 더는 나아가지 못하고 대치상태에 돌입했다.
소란이 벌어지자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낸 사람들이 주변을 기웃거리기 시작했다. 두 가문의 시위들이 대치 중인 것을 확인한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대담하게 이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 중에는 고운 비단 옷을 입은 소녀도 있었는데, 그녀는 주인의 명령에 의해 무슨 일인지 알아보러 나온 것이 틀림없었다.
장서열은 차갑게 코웃음을 터뜨렸다. 예상한 결과였다. 대문조차 열 수 없다니, 과연 평생토록 사람을 멀리해 온 현 씨 가문다웠다.
권세 높은 현 씨 가문과는 대화조차 불가능했다. 검은 옷을 차려입은 그들은 보통의 무공을 지닌 자가 아니었다.
그러나 장서열은 기필코 현천기의 계획을 무너뜨릴 생각이었다.
“뭘 멍하니 서있는 게냐! 공격하라!”
순간 여러 가지 색깔로 뒤섞인 통이 고요하던 현 씨 가문의 담장 위로 쏟아졌다.
그녀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공기를 갈랐다.
“곳곳에 잘 뿌려라! 이곳에 얼마나 간악한 인물이 사는지 온 세상 사람이 다 알 수 있어야 한다! 대주국의 위대한 시랑(侍郞, 관직 이름) 나리께서 배후에 숨은 뱀이라는 걸 알려라!”
소식은 곧바로 전원(前院)에 전해졌다. 거칠게 책상을 치며 자리에서 일어난 현일이 노기충천하여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였다.
“그 계집은 대체 뭘 하는 게냐! 대체 무슨 꿍꿍이지? 감히 내 집 앞에서 행패를 부리다니!”
말은 그렇게 내뱉었지만 현일은 속으로 당황했다. 단번에 물리치지 못했다는 건 그들이 생각보다 성가신 존재라는 뜻이었다.
황제가 두둔하는 계집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뒷배에는 충왕부가 있었다. 얌전히 집에 들어 앉아 있어야 할 계집이 왜 여기 와서 발악을 한단 말인가.
‘설마 이번 납치 사건이 천기와 무슨 관계라도?’
현일은 깜짝 놀랐다. 사실이라면 큰일이었다.
“어서 관아에 있는 천기에게 이 소식을 알려라!”
오색 빛깔이 현 씨 가문의 담장을 물들이자 저택은 순식간에 거리에서 가장 눈에 띄는 집이 되었다. 주위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
“원래 저기에 사람이 살았었나?”
“저 시위들은 좀 이상해 보이네.”
모두가 검은 옷을 차려입은 모습은 괴상하기 짝이 없었다.
“저 여인이 장 씨 가문의 아가씨라고? 정말 예쁘군. 그나저나 여긴 왜 나타난 거래?”
평범한 백성들은 아직 어떤 소식도 전해 듣지 못한 터였다.
장서열은 두려움 없는 눈빛으로 저택의 대문을 노려보았다. 그녀가 여유롭고 느릿느릿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 주변에 사는 모든 이들은 조심하는 게 좋을 겁니다. 자칫 잘못해서 현 씨 가문의 심기를 건드렸다가는 당신들의 집안도 쥐도 새도 모르게 가루가 될지 모릅니다.”
“…….”
“나는 부처님께 향을 올리러 갔다가 저런 짐승만도 못한 놈에게… 치욕을 당했습니다.”
말을 마친 장서열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러 내렸다. 그녀가 뒤를 돌아 자리를 떠나자 주변은 삽시간에 발칵 뒤집혔다.
“이 저택에서 장 씨 가문의 아가씨를 건드렸다고?”
사람들은 이 엄청난 사실을 차마 믿지 못했다.
“젠장, 대체 어떤 놈이야?”
하지만 사람들은 이 저택에 사는 이가 어떻게 생긴 자인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 말이 사실일까요?”
“설마 귀한 아가씨가 함부로 말을 지껄이겠어요? 저 아가씨는 충왕부의 세자와 정혼한 장 씨 가문의 아가씨예요. 이유 없이 자신의 명예를 실추시킬 리 없잖아요.”
자리를 떠났던 장서열은 손에 금박을 잔뜩 쥔 채 다시 나타났다. 그녀는 구슬픈 표정으로 이를 바닥에 뿌린 뒤, 되는 대로 향을 피우며 애처롭게 눈물을 뚝뚝 흘렸다.
“네 놈은 황제 폐하께서 귀히 여기는 날 아내로 얻으면 조정에서 승승장구 할 수 있다고 말했지? 현천기, 네가 저지른 일에 책임을 지거라! 네가 대주국의 사내대장부라면 어서 나오란 말이다!”
관아(官衙)에 있던 현천기에게 소식이 날아들었다. 놀란 그가 딱딱하게 굳었다.
“누가… 누가 관아 앞에 와 있다고?”
“장 씨 가문의 아가씨입니다.”
현천기는 순간 하늘이 빙 도는 걸 느꼈다.
‘장서열이 어떻게! 그 계집이 어찌!’
그는 한 번 시작한 일은 끝을 보는 사람이었다. 손에 잡고 있던 것을 모두 내팽개친 그가 저택을 향해 뛰어가며 얼굴에 쓴 면피를 벗었다. 그의 얼굴은 순식간에 구염락이 되었다가 다시 서풍엽으로 바뀌었다.
장서열은 현 씨 가문이 다시는 숨어 살지 못하도록 아예 세상에서 매장시킬 작정이었다. 현천기 한 명을 처단하는 건 시작에 불과했다.
‘현천기, 네가 시작한 일이니 어디 한번 끝까지 해 보거라! 비록 내 음모와 책략으로는 널 이길 수 없겠으나 적어도 넌 충왕부를 적으로 돌리게 될 것이다.’
물론 구염락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종잡을 수 없었고, 황제는 아끼는 부하를 희생하면서까지 그녀의 편을 들어주지는 않을 것이다. 게다가 현 씨 가문의 인재를 잃는다면 황제로서는 곤란해 할 가능성이 컸다.
허나 그녀는 반드시 원수를 갚아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예 현 씨 가문의 씨를 말려야 했다. 그들을 영원히 조정에 발붙이지 못하게 만드는 것만으로 그녀의 원한이 풀릴 리 없었다.
하룻밤 새 현 씨 가문은 세상 앞에 발가벗겨졌다.
소식을 들은 서풍엽은 그대로 딱딱하게 굳었다. 그는 황제를 알현하려 입궁했다는 사실도 잊은 채 황급히 궁 밖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그제야 맹목적으로 달려들던 장서열의 행동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는 현 씨 가문과 함께 추락하려는 것이다.
서풍엽은 장서열이 얼마나 굳은 결심을 했는지 깨달았다. 그녀는 현천기를 죽이지 않는 한 절대로 멈추지 않을 작정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자신조차 포기하려는 것인가.
‘서열아, 서열아… 어찌 혼자서 그리 힘든 일을…….’
소식을 들은 구염락의 눈이 얼어붙었다. 순간 향을 피운 향로가 쾅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이를 악문 구염락이 한 자 한 자 힘주어 내뱉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현천기를 잡아라!”
주먹을 쥔 그의 손에서 뼈마디가 뭉개지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당장 일등공 전부를 움직여 이 사실을 아는 이를 모두 죽여라.”
구염락의 눈에 실낱같은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
‘서열 누님, 그러지 말아요……. 현천기는 누님이 직접 움직일 만한 가치가 없는 자예요. 누님의 명예를 훼손시키지 말아요……. 그건 정말 어리석은 행동이었어요!’
군중 속에 섞여 있던 조옥언은 딸이 흐느껴 우는 모습을 보았다. 딸아이는 원한에 사무친 나머지 앞뒤 가리지 않고 현 씨 가문을 모조리 불사를 작정인 듯했다.
조옥언은 앞으로 어떠한 결말이 펼쳐질지 이미 짐작하고 있었으나 딸을 저지하지 않았다. 억울한 일을 당한 딸에게 조용히 분을 삭이라 말하고 싶지 않았다. 물론 명예는 중요했다. 그러나 정 여의치 않다면 모든 걸 버리고 타향으로 떠나면 될 일이었다. 딸의 가슴에 맺힌 한을 풀 수만 있다면 아무 것도 중요치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