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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41)화 (141/449)

제141화

서풍엽은 자신에게 안겨 있는 장서열을 바라보며 진심으로 감동했다. 그녀의 마음이 유달리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녀가 괜찮다고 말했다면 정말 괜찮은 것이다.

장서열은 왠지 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제 그녀는 다시 구염락에게 돌아가 현천기를 죽일 생각에 휩싸여 있었다. 현천기가 유일하게 두려워하는 구염락을 이용해 그 자를 매일 같이 공포에 떨게 만들고 절대 제 명에 죽지 못하게 만들 심산이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서풍엽을 떠난다면 그는…….

“헌원가는요?”

서풍엽이 답했다.

“헌원가는 무사히 집에 돌아갔어.”

서풍엽이 안쓰러운 시선으로 헝클어진 그녀의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헌원가를 만나보고 싶어요.”

장서열의 목소리는 평소와 같이 평온했다. 잠시 그녀를 바라보던 서풍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서풍엽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즉시 말을 준비시킨 뒤 장서열과 함께 마차에 올랐다. 그는 사랑하는 연인을 지켜주지 못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다시 놓칠까 두려운 듯 그녀의 손을 꼭 쥐었다.

헌원 씨 가문의 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러나 장 씨 가문의 마차가 도착하자 꼭 그만큼 작게 문이 열렸다.

헌원 부인이 수심 가득한 얼굴로 헌원가의 곁을 지키고 있었다. 쉰이 넘은 노부인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있었고, 시녀의 도움 없이는 자리에서도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노쇠한 모습이었다.

빨갛게 부어 오른 헌원 부인의 눈에서 쉬지 않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손님의 등장에도 눈물은 좀처럼 멈추지 않았다. 다쳐서 돌아온 딸이 정신적인 충격까지 받은 터라 헌원 부인의 상태 역시 몹시 좋지 않았다. 딸아이는 헌원 부인의 유일한 의지처였다.

“깨어난 뒤부터 줄곧 침대에 웅크린 채 저러고 있단다. 누가 말해도 전혀 듣지 않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훔친 헌원 부인은 모든 걸 체념한 사람처럼 마음 아파했다. 헌원가는 침대에서 쉴 새 없이 몸을 떨고 있었다. 텅 빈 눈동자는 여전히 공허했다.

헌원 부인은 소리 없이 울었다.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간신히 품위 있는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살짝이라도 건드리면 금세 무너져 버릴 것 같았다.

그녀가 무척이나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집에 돌아온 뒤 줄곧 저러는구나.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아무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해……. 어미인 나조차도 말이야…….”

눈물이 다시 손수건을 적셨다. 처음 보는 딸아이의 모습은 헌원 부인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아프고 괴로운 게 나았다.

‘쳐죽일 놈들! 내 딸이 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이리 괴로워해야 한단 말인가!’

헌원 부인의 눈을 가득 메운 자책감에 괴로워진 장서열이 입을 열었다.

“안심하세요, 부인. 가는 단지 놀라 겁을 먹었을 뿐이에요. 그날… 너무나 많은 사람이 죽었어요. 그들이 흘린 피가 강을 이룰 정도였고 피범벅이 된 시체가 도처에 널려 있는 광경은 끔찍하기 짝이 없었어요…….”

장서열의 말에 경악한 헌원 부인은 이내 그만하길 다행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딸아이에게 더 끔찍한 일이 벌어지지 않은 것으로 족했다. 정신적인 충격을 견뎌내기만 한다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올 것이다.

장서열이 불쾌한 기억을 떨치려는 듯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저도 여기 있잖아요.”

“그래, 맞다.”

헌원 부인은 헌원가를 껴안으려 했지만 딸이 깜짝 놀라며 만지지 말라고 소리치자 가슴이 찢어지는 듯했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장서열 역시 마음이 옥죄어 들었다. 목을 졸리는 건 몹시 고통스러웠지만 지금 느끼는 무력감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얼른 앞으로 나선 서풍엽이 장서열의 어깨를 감싸며 조심스레 위로했다.

“서열아…….”

장서열은 기댈 수 있는 이가 있음에 안도하며 마음을 놓았다. 그녀가 힘을 주어 말했다.

“절 믿으세요, 부인.”

핏기 없는 헌원 부인의 얼굴은 비통함으로 가득했다. 딸이 무사한 건 천만다행이었다. 하지만 이미 구설수에 오른 이상 이제 누가 딸아이를 아내로 맞이하려 하겠는가. 그녀 역시 딸아이의 원한을 풀어줄 때까지 마음 편히 살 수 없을 터였다.

“이 아이가 남은 평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아직 어리고 착한 아이인데…….”

행여나 침대에 누워 있는 딸이 놀랄까 염려하며 헌원 부인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장서열은 차마 헌원 부인을 쳐다볼 수 없었다. 뒤에서 서풍엽이 버티고 있지 않았다면 그녀 또한 강인한 모습을 보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당자는 약속을 저버리지 않을 거예요.”

깊게 패인 주름 사이로 흘러내리던 눈물이 문득 멈췄다. 창백한 헌원 부인의 눈 속에 한줄기 빛이 스치다 순식간에 사라졌다. 헌원 대인과 그녀는 당자가 전장에서 살아 돌아오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 구두로 혼담을 약속한 상태였다. 그래야만 만에 하나 당자가 변을 당하더라도 딸아이가 ‘남자 잡아먹을 팔자’라는 오명을 쓰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불미스러운 일이 발생한 지금, 정말로 당자가 혼담을 지키리란 보장이 없었다.

“당자는 그리 매정한 사람이 아니에요.”

장서열은 마치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듯 말했다.

“그건 매정한 것과는 다른 문제란다.”

헌원 부인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다.

“사는 동안 내내 주변의 시선을 감당해야 할 테지. 내 딸 때문에 누군가 그런 비난을 감수하게 할 수는 없다. 당자는 좋은 아이이니 구설수에 오를 일 없는 정숙한 여인을 아내로 맞이할 수 있을 거야.”

서풍엽이 자신의 변함없는 마음을 알려 주려는 듯 장서열의 어깨를 꼭 잡아 주었다.

꾸며낸 미소조차 지어낼 수 없었던 장서열은 속으로 조소했다.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또한 서풍엽을 놓아 주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머릿속에 수도 없는 생각들이 충돌하고 부딪쳤다. 하지만 최소한 지금 그녀는 그와 함께이지 않은가.

그녀가 의연한 눈으로 헌원 부인을 바라보았다.

“부인, 잠시 가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

헌원 부인이 과거 딸아이를 구해 주었던 은인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방을 나갔다.

“오라버니도 밖에 나가 잠시 기다려 줘요.”

침대에 있는 헌원가를 바라본 서풍엽이 장서열의 어깨를 따뜻하게 토닥였다.

“너무 오래 있지 마. 밖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네가 나오지 않으면 난 계속 기다릴 거야.”

서풍엽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눈을 바라보다 곧 방을 나섰다.

장서열은 침대맡에 앉았다. 헌원가는 어제 입었던 옷을 그대로 입고 있었다. 몸을 잔뜩 웅크린 그녀는 구석에서 멍한 눈으로 분홍색 옷자락만 바라보았다.

장서열이 옷에 달린 장식을 만지작거리며 가벼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현천기는 너를 노린 게 맞아. 과거 청산에서 벌어진 사고부터 이번 국암사 일까지, 그가 원하는 건 너를 아내로 맞이하는 거야. 무슨 짓을 해서라도 네 아버지의 승낙을 받아내는 게 그의 목표지. 그는 네가 어찌 되든 상관 안 해.”

“…….”

“이대로 그를 가만둘 거니? 계속 이렇게 웅크리고 앉아서 그 자가 활개치게 내버려 둘 거야? 그렇게 그가 선심 쓰듯 너를 아내로 삼길 바라?”

“…….”

“모든 게 그의 계획대로 되어 버리면 너무 억울하잖아. 어제 넌 정말 잘했어. 누구에게도 부끄럽지 않게 말이야. 비록 그 자는 놓쳤지만 그래도 넌 나를 구해 줬어. 잘 봐. 우리는 무사해. 아무 일도 없었어. 그래서 지금 나도 이렇게 뻔뻔하게 일어났잖아.”

헌원가의 텅 빈 눈이 순간 반짝였다. 장서열이 그녀의 차가운 손을 잡았다.

“나도 생각만 해도 구역질이 나. 그 자는 죽어 마땅해. 그가 죽지 않는다면 우리의 원한도 풀리지 않겠지. 하지만 생각해 봐. 과연 지금 당장 그를 죽일 수 있을까?”

장서열은 온기 없는 헌원가의 손을 어루만지며 이어서 말했다.

“그를 죽이려면 우리는 어제 있었던 일을 만천하에 알려야 해. 사람들은 멋대로 입방아를 찧겠지. 너, 아직 네가 원하는 사람과 혼인하고 싶지? 나도 마찬가지야. 하지만 현천기를 죽이려면 모든 걸 포기해야 해. 그 버러지 같은 인간 하나 때문에 우리는 세간의 입에 오르내리며 온갖 추측과 소문에 시달리겠지. 얼마나 부질없는 일이니?”

“…….”

“너도 나와 같은 생각일 거라 믿어. 현천기 역시 그래서 우리가 감히 복수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을 거야. 하지만…….”

장서열이 놀라울 정도로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왜 그 자의 뜻대로 움직여야 하지? 나는 평생 그를 괴롭히고 세상에서 가장 처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할 거야. 이 모욕은 내가 반드시 백 배 천 배로 갚아.”

순간 헌원가가 장서열의 품에 달려들었다. 눈물을 왈칵 쏟아낸 그녀가 살점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분노에 차 말했다.

“전 반드시 그 자를 제 명에 죽지 못하게 만들 거예요! 제 명에 죽지 못하게! 그들 모두 죽어서도 편히 눈 감지 못하게 할 거예요! 반드시!”

헌원가는 현천기가 처참하게 죽기를 바랐다. 곧 한 맺힌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방 안에는 온통 원망과 증오가 가득했다.

오로지 가문의 영달을 위해 힘써 오던 아이가 모든 걸 버리고 누군가를 지옥에 떨어뜨리기 위해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녀는 저주를 퍼부으며 어느 누구도 영원히 환생하지 못하도록 한 사람 한 사람 남김없이 도려내리라 다짐했다.

장서열은 헌원가의 등을 토닥였다. 누가 이들의 깊은 원한을 이해할 수 있단 말인가. 그녀는 현천기가 속옷 하나로 자신을 망신 줄 수 있을 거라 자신한 것을 떠올리며 실소를 금치 못했다.

‘실컷 떠벌려 보거라.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알도록!’

어차피 서풍엽은 아직 자신과 혼인하지 않은 몸이었다. 그의 명성은 변함없을 것이다. 그녀는 모든 걸 버리고 현천기와 싸울 작정이었다.

‘그림을 그려서 집집마다 돌리겠다고? 좋다. 일손이 부족하면 내가 대신 그림을 그려서 돌려주마. 내 반드시 너의 간악함을 만천하에 알릴 것이다. 어차피 난 권모술수에 익숙한 몸이다.’

헌원가는 계속해 울고 또 울었다. 문 밖에 서 있던 헌원 부인은 딸이 마침내 소리 내어 울자 그제야 안도하며 쓰러졌다. 저택은 소란으로 몹시 들끓었다.

헌원가가 잠든 것을 확인한 뒤, 장서열은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저택을 나와 마차에 올랐다. 그녀가 조심스러운 눈길로 자신을 쳐다보는 서풍엽을 바라보며 웃었다.

“왜 그리 쳐다봐요? 곧 출정하게 될 몸이라 내가 당신 얼굴을 잊어버릴까 겁나요?”

서풍엽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언제나 속마음을 감추고 보여주지 않았다. 깊은 슬픔이 있었지만 때로는 무척 천진난만한 아이 같았으며, 또 어떤 때는 단단한 껍질 속에 스스로를 감추는 듯 보이기도 했다. 분명한 건, 그녀가 무엇이든 스스로 해낼 수 있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서풍엽은 말없이 그녀를 껴안았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몹시 아팠다. 그는 차라리 그녀가 헌원가처럼 두려움에 떨거나 자책하며 온갖 소동을 피우기를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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