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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40)화 (140/449)

제140화

앞을 바라보던 장서열이 별안간 금방이라도 꺼질 듯이 몸을 휘청거렸다. 구염락은 당장이라도 그녀가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열셋째…….”

그제야 미친 사람처럼 달려간 구염락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행여나 불면 날아갈까 구염락은 감히 그녀에게 손끝 하나 갖다 대지 못했다. 그 모습에 현천기가 잠시 멈칫했다. 장서열은 현천기가 놀랐다는 걸 눈치챘다.

‘현천기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뭐였지?’

그가 두려워하는 건 권세를 잃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천기는 풍윤제는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구염락이었다. 구염락은 황권과 관계없이 타고난 위압감으로 그를 제압하는 사람이었다.

‘현천기, 너도 쥐처럼 놀라 허둥대는 때가 있구나.’

갑자기 다른 한편에서 소란이 일었다. 말을 탄 무리가 급히 몰려왔다. 말에서 내린 서풍엽이 몸을 날려 장서열에게 뛰어들었다.

“서열아!”

장서열이 본능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익숙한 체취와 품이 느껴지자 비로소 그녀의 눈에서 통제할 수 없는 눈물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녀는 서풍엽을 끌어안고 온몸으로 흐느껴 울었다. 그녀는 정말로, 너무나 두려웠다.

순간 굳어진 구염락이 말없이 바닥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계속해 고개를 들지 못했다.

현천기는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돌리는 한편 속으로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태자의 반응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서풍엽의 품에 안긴 장서열은 마치 눈물로 억울함을 토해내려는 사람처럼 정신없이 흐느껴 울었다. 서풍엽은 마음이 아팠다. 진작 그녀를 구하러 오지 못한 원망을 듣는 것만 같았다.

장서열의 눈물에 모든 사람들이 고개를 떨궜다. 서풍엽은 자책했고, 구염락은 침묵했다.

현천기는 영문을 알 수 없어 멍하니 서 있다가 문득 자신의 마음을 심란하게 했던 장서열의 서글픈 눈매를 떠올렸다.

서풍엽은 구염락보다 반 시진 늦게 나타났지만 채 일각이 되지 않아 그녀를 데리고 떠났다. 사람들이 장서열에게 무슨 사고가 있었는지 기웃거리는 게 싫었고, 복수를 빌미로 그녀에게 질문을 퍼붓는 것도 원치 않았다. 그에게는 장서열의 안위를 확인하고 명성을 지켜 줘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는 즉시 장서열을 안아 들고 자리를 떠났다.

구염락은 그 자리에 못 박힌 사람처럼 가만히 서 있었다. 세상 어떤 슬픔도 자신이 장서열에게 필요 없는 존재가 되어버린 순간에 비할 수 없었다.

구염락의 뒤에 선 현천기는 여전히 공손하게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생각지 못한 변수에 적잖이 당황하는 중이었다. 그는 태자의 마음속에 장서열이 어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현천기는 세상에 무엇 하나 두려운 것이 없는 태자와 과거 장서열의 뒤를 따라다니던 어린 태자의 모습을 차례로 떠올렸다. 그가 눈썹을 찡그렸다. 한줄기 불안감이 솟구쳐 올랐다.

헌원가는 서풍엽과 태자의 보호 아래 저택으로 돌아갔다. 누구도 그녀에게 함부로 입을 열지 못했다. 이는 모친인 헌원 부인도 마찬가지였다.

하루 사이 국암사 주변의 모든 도적들은 단 한 명도 남지 않고 전부 사라졌다. 거대한 태풍이 휩쓸고 간 듯 사원 주위는 몹시도 고요했다.

장서열은 서풍엽을 끌어안은 채 놓아주지 않았다. 그에게 모든 원망을 쏟아 내려는 듯 그대로 쉬지 않고 울었다.

조옥언은 오랫동안 딸아이를 바라보다 결국 사람들을 데리고 자리를 떠났다. 조옥언의 눈에 처음으로 두려움이 일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장신성의 얼굴이 촛불에 의해 번쩍거렸다. 세월이 가져다 준 흔적이 오히려 잘 어우러져 여전히 기골이 장대하고 준수한 외모였다.

조옥언이 나오자 장신성이 얼른 앞으로 다가가 물었다.

“어떻게 됐소? 서열이가 변을 당한 게요? 말을 좀 해 보시오!”

뜰에 가득 모인 식솔들에 아랑곳없이 조옥언이 장신성을 향해 매서운 시선을 던졌다. 황급히 입을 다문 장신성은 갑자기 낯선 사람처럼 변한 부인을 까닭 모를 눈으로 쳐다보았다.

‘내가 뭘 잘못한 것이지? 딸이 한 시진 동안 납치를 당했으니 아비로서 걱정하는 건 당연한 일이거늘! 만약 혼인이 어려운 몸이 되었다면… 그러면 어쩌면 좋단 말인가!’

장신성은 만에 하나 서풍엽이 파혼을 요구할 경우 다른 딸을 보내서라도 혼사를 성사시키리라 마음먹었다. 세자에게 딸아이를 한 명 더 시집보낸다면 어느 정도 마뜩찮은 마음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이다.

‘그래도 안 되면 서열이를 첩으로라도 받아 달라고 해야겠구나. 이미 정혼까지 했으니 설마 세자가 그마저도 거절하진 않겠지.’

그는 서풍엽이 절대로 딸을 버리지 못하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기로 결심했다. 무어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조옥언의 매서운 얼굴에 머리를 움츠리며 걱정스런 마음을 속으로 삼켰다.

동시에 장신성은 조옥언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장서열의 아버지였다. 아버지가 딸을 걱정하는 건 당연했다. 그런데 조옥언은 마치 대역죄인을 대하듯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대책을 마련하는 게 뭐가 문제란 말인가. 자칫 잘못하면 서열이는 세자에게 버림받는 신세가 될 수도 있다. 장신성은 이건 순전히 서열이를 위한 일이며, 오히려 대신 충왕부에 시집을 가는 서영이 쪽이 큰 손해를 보는 것이라 생각했다.

‘우리 서영이에게는 더 좋은 앞날이 기다리고 있지 않은가!’

가문과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하려는 그에게 조옥언은 이렇게 많은 식솔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부라리고 있었다. 장신성은 역시 여인이라 식견이 좁다는 말을 감히 입 밖으로 내지 못했다.

조옥언은 사람들을 모두 처소로 돌아가게 했다. 사실 마음 같아서는 서풍엽도 보내고 싶었으나 어찌된 일인지 딸아이가 그를 끌어안고 놓아주지 않았다. 차마 딸이 유일하게 붙잡고 있는 사람까지 떠나게 할 수는 없었다.

조옥언은 딸에게 아직 울 힘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나쁜 일이 벌어진 건 아닐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딸아이보다 더욱 심각했던 헌원가의 상태를 떠올리면 이 또한 장담할 수 없었다.

‘대체 서열이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인가.’

조옥언은 마음이 조급했지만 선뜻 딸아이에게 물어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 * *

칠흑 같은 달빛 아래 구염락이 서 있었다. 그는 뒷짐을 진 채 저군전 연못에 가득한 연꽃을 바라보았다. 그의 머릿속은 온통 서풍엽의 품에 안기던 장서열의 모습으로 가득 차 있었다.

다소 거만하기까지 했던 당당한 모습을 모두 버린 그녀는 난생 처음으로 나약하게 울었다. 서풍엽 앞에서 감정을 숨기지 않는 것으로 보아 그녀는 진심으로 그를 믿고 있었다.

구염락은 이루 말할 수 없는 서늘함을 느꼈다. 또 다시 차가운 거리를 걷는 것 같았다. 목이 터져라 소리쳐도 아무런 대답이 들리지 않는 무덤가처럼 무서울 정도로 한기가 느껴졌다.

아름다운 자태로 소리자의 곁에 다가온 금용이 걸음을 멈췄다. 큰 눈을 동그랗게 뜬 그녀가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 왜 저러시죠? 돌아오신 후부터 상태가 이상해요.”

금용을 쳐다본 소리자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별일 아니다. 아마 피곤하셔서 잠시 혼자 있고 싶으신 것 같다.”

소리자는 처음으로 금용에게 거짓말을 했다. 바보가 아닌 이상 금용이 무슨 꿈을 꾸고 있는지 모를 리 없었다. 그런 금용에게 사실을 알리는 건 괜히 그녀를 괴롭히는 일이 될 뿐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금용이 갑자기 빙그레 웃었다.

“그럼 제가 전하를 위해 탕을 끓여 올게요.”

소리자가 애정 어린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어쩌면 전하께서 허기를 느끼실 지도 모르겠구나.”

금용이 기뻐하며 자리를 떠나자 소리자는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전하께서 허기를 느낄 리 만무했다. 사랑하는 이에게 그렇듯 무시를 당했다면 자신 역시 전하와 같은 기분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누군가가 나타났다. 이를 확인한 소리자는 뒤로 몇 걸음 물러나 그들에게 대화할 공간을 마련해 주었다.

잠시 뒤, 구염락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렸다. 그는 그 길로 제1군을 소환하고 일등공을 움직였다.

드디어 원하던 바를 이뤘지만 도둑이 제 발 저리듯 현천기는 왠지 모르게 자신을 바라보는 태자의 시선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까지 구염락은 황제를 협박하기 위해 동남 세력이 장서열을 납치했을 가능성, 혹은 그들이 황제를 진노케 하기 위해 장서열을 죽이려 했을 가능성을 고려하고 있었다.

이 역시 현천기의 계략이었다. 당초 그가 생각했던 것보다 일이 너무 커진 탓에 장서열을 노린 동남 세력의 소행으로 몰고 가야만 의심을 피할 수 있었다. 만약 사고의 중심이 헌원가가 된다면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 나갈 구멍이 없었다. 치밀한 계략을 세워 납치를 단행할 정도가 되려면 상대는 반드시 모두가 납득할 만큼 고귀한 인물이어야 했다.

현천기는 괜한 걱정이라 생각했다. 태자가 자신을 의심할 리 없었다. 그와 장서열 사이에는 어떠한 접점도 없었다. 그가 아내로 맞이하려는 헌원가가 장서열과 친한 것뿐이었다.

* * *

희미한 달빛이 너울거리는 그림자를 드리우며 어두웠다 밝아지기를 반복했다.

울다 지친 장서열은 서풍엽의 품에 기대 잠들어 있었다. 그는 장서열이 편히 잠들 수 있게 침대에 눕혀 주려 했지만 그러지 못할 만큼 그녀가 자신을 꽉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이따금씩 아직 다 울지 못한 사람처럼 울먹거렸다. 퉁퉁 부어 오른 빨간 눈가가 절로 그를 자책하게 만들었다.

서풍엽은 농교를 시켜 시위를 부른 뒤, 자신이 떠난 것처럼 보이도록 마차를 몰고 왕부에 돌아갈 것을 명했다.

장서열을 품에 안은 그는 그대로 그녀가 모든 걸 잊길 바랐다. 현장에 도착했을 당시 공포에 질린 헌원가의 눈은 많은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잠에서 깨어난 그녀가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면 그 역시 아무 일도 없던 것이다. 그녀가 여전히 자신을 원한다면 그것으로 족했다.

장서열은 밤새 편치 못했다. 그녀는 얼굴을 찡그리다가도 깜짝 놀랐고, 미간을 찌푸린 채 아이처럼 작은 소리로 울먹이다 또 순식간에 멈추곤 했다. 이렇듯 놀란 그녀에게 서풍엽은 무슨 일이 있었느냐 다그치며 상처를 헤집는 행동을 할 수 없었다. 그는 그대로 장서열을 끌어안은 채 안심하고 잠들 수 있도록 부드럽게 그녀의 등을 토닥여 주었다.

* * *

다음날, 청명한 가을 햇살이 밝았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가 시작되는 가운데 황제를 격노케 할 소식이 황궁에 전해졌다. 조례가 시작되기 전 황제는 뒤에서 소문을 퍼뜨리던 신하들을 먼저 처단했다.

“국가의 대사는 논하지 않고 아이처럼 말장난이나 지껄이다니! 녹봉을 박탈하고 관직을 강등하라!”

황제의 불호령에 대신들은 침묵을 지키며 일제히 고개를 숙였다.

* * *

장서열이 잠에서 깨어났을 때는 이미 정오에 가까운 시각이었다. 일어나자마자 잔뜩 눈이 충혈된 서풍엽과 마주한 그녀는 잠시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마음 한편이 따뜻해진 그녀가 환한 미소를 지었다.

“난 괜찮아요. 뭘 그리 걱정하고 있어요.”

그 말에 비로소 서풍엽의 마음이 느슨해졌다. 그는 충격을 감당하지 못한 그녀가 다시는 예전의 해맑은 모습으로 돌아오지 못할까 두려웠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자신을 염려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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