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9화
현천기가 자신의 아래에 놓인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붉은 나뭇가지와 잎사귀 사이로 차갑고 매서운 눈이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난초처럼 은은한 숨결이 사람의 혼을 사로잡았다. 현천기는 자신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의 체향을 들이마셨다.
목에서 느껴지는 현천기의 숨결에 장서열이 땅바닥에 있는 덩굴을 힘껏 움켜잡으며 소리쳤다.
“꺼져!”
“정말 슬프군. 이렇게 친해졌는데 아직도 그런 험한 말을 하다니.”
장서열이 돌연 손을 뻗어 현천기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그녀의 넓은 옷소매가 흘러내리며 파랗게 멍든 새하얀 팔뚝이 드러났다. 목덜미에 그녀의 차가운 피부가 닿자 현천기는 오싹함에 소름이 돋았다.
순간 낯선 감정이 일었다. 황홀함에 잠시 정신이 아득해졌지만 그는 곧 정신을 차리고 등 뒤에서 자신을 공격하려던 헌원가를 발로 걷어찼다. 그녀는 나무둥치에 머리를 강하게 부딪히며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헌원가의 습격을 틈타 장서열이 빠른 속도로 현천기를 향해 몸을 날렸다. 그러나 재빨리 고개를 돌린 현천기는 그녀의 공격을 피했다. 단숨에 그녀의 뒤를 잡은 그가 장서열의 어깨를 잡아 다시 그녀를 땅바닥에 내리 눌렀다.
“날 폭력적으로 만들지 마.”
현천기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는 부하가 전해줄 소식을 기다리고 있었다.
‘만약 장서열을 이곳에서 죽인다면…….’
현천기의 밑에 깔린 장서열이 힘껏 몸부림쳤다.
“어디 한번 쳐 봐! 우린 필사적으로 싸울 테니까! 가야, 정신 차려! 가야!”
“닥쳐, 장서열!”
그 움직임에 현천기의 눈빛이 어두워지더니 뭔가를 참고 있는 사람처럼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움직이지 마.”
장서열은 등 뒤에 있는 현천기의 몸에 민망한 변화가 일어난 것을 느꼈다. 그녀는 더 이상 함부로 움직일 수 없었다.
기묘한 열기에 사로잡힌 현천기가 장서열의 새하얀 목덜미를 한참 바라보더니 시험하듯 입을 맞췄다. 고개를 든 그는 매혹당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시 정신을 차렸다. 그는 자신이 제압한 여인이 무척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를 살려 두고 후일을 도모하는 건 부적절했다.
장서열은 당장 현천기를 산산이 조각내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현천기는 그녀의 뼈를 부러뜨릴 듯 잡고 한시도 경계를 놓지 않았다.
잠시 뒤, 등을 구부린 노인이 빠른 속도로 돌아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살짝 저었다. 그제야 장서열은 한줄기 희망을 본 듯했다. 분명 누군가 그녀가 납치되었다는 걸 알린 것이다. 그녀는 서풍엽과 어머니를 믿었다. 외숙 역시 그녀를 구하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할 것이다.
“이거 놔! 이제 대화로 해결해야 하지 않겠어?”
그러나 현천기는 지금 이 순간을 모면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게다가 조금 전 그의 부하는 좌측 눈을 깜박였다. 우측은 황제를, 좌측은 태자를 뜻했다. 최악의 소식이었다.
‘태자는 대체 무슨 수작이지?’
현천기는 힘을 풀지 않았다. 죽일 수도 없었지만 살려 두면 더욱 귀찮을 계집이었다.
“장서열. 나도 널 살려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럼 아무도 날 살려 주지 않을 거야. 어떻게 해야 네 입을 다물게 만들 수 있을까?”
현천기가 장서열의 볼을 만지작거렸다. 그녀는 지금도 충분히 아름다웠고, 자라면 더욱 빛이 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가 손에 넣을 수는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죽음에 이르게 할, 독을 품은 여인이었다.
장서열은 솟구치는 증오심으로 눈이 멀 지경이었다. 현천기를 토막 내 죽일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 죽어도 여한이 없었다.
“이거 놔! 입 다물겠다고 했잖아! 나야말로 황제를 모욕했어!”
현천기가 곧바로 받아쳤다.
“하지만 그 말은 아무도 믿지 않겠지.”
장서열은 발버둥치다 이내 헛수고임을 깨닫고 고개를 돌려 분노한 눈길로 그를 노려보았다.
“죽느니만 못한 삶을 살고 싶으면 마음대로 해.”
그러자 현천기는 그녀가 깨물지 못하도록 한쪽 손으로 그녀의 아래턱을 잡은 채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그가 그녀를 향해 몸을 더욱 바짝 밀착시켰다. 문득 현천기가 무언가를 찾는 듯 그녀의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살기로 가득한 눈을 번뜩였다. 그 순간 현천기의 손에 그가 찾던 것이 잡혔다. 현천기가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가 찾아낸 것은 좌측 하단에 ‘열(悦)’이라는 글자가 수놓아진 비단 속옷이었다. 산수해당화가 수놓아진 작은 옷감에는 따뜻한 체온과 그녀 특유의 향기가 남아 있었다.
“내가 이걸 가지고 있다는 걸 서풍엽이 알게 되면 화가 나서 길길이 날뛰겠지? 내가 그의 상상보다도 훨씬 너와 가까운 사이라고 생각하면 말이야……. 어떻게 생각해?”
말을 잇는 현천기의 눈이 다시 밝게 빛났다.
“서풍엽이 별로 개의치 않아 할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온 세상 사람들이 이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떨까? 다른 사람들도 과연 서풍엽처럼 똑같이 굴 수 있을까? 네 체면과 네 어머니의 체면은?”
“…….”
“이렇게 말을 맞추는 게 어때? 너와 헌원가는 길을 잃고 헤어졌다가 강도를 만나 위협을 받은 거야. 그러면 너도, 나도 각자 살던 대로 살 수 있어. 난 죽었다 다시 살았네 하는 네 허무맹랑한 말을 캐묻고 싶은 생각 없어. 그리고 난 네가 고작 오늘의 복수를 위해 태자와 혼인해 인생을 망칠 정도로 바보는 아니라고 생각해.”
현천기가 몸을 일으키자 비로소 장서열의 폐에 충분한 양의 공기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물론 내 뜻대로 안될 수도 있어. 그러면 나는 죽는 순간 사람을 시켜 이걸 성벽에 걸라고 시킬 거야. 아니, 아예 그림을 그려서 집집마다 돌리라고 해야겠군. 세자 나리께서 존귀한 세자비를 얼마나 아끼고 사랑할지 참 궁금해.”
“…….”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널 살려서 보내는 걸 후회하게 되잖아. 그리고 우선 자리에서 일어나주면 안 될까? 내 자제력은 네 상상만큼 높지 않거든.”
장서열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치욕을 느꼈다. 시선을 돌리고 아무것도 보지 않고 듣지 않으려 애썼다. 울지 말자고 다짐하던 그녀의 눈가가 촉촉이 젖어 들었다.
“누구 보라고 눈물을…….”
반짝이는 눈물 한 방울이 또르륵 그녀의 새하얀 얼굴 위로 떨어져 내렸다. 현천기가 말을 멈췄다. 그는 그녀를 껴안으며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부드러운 입맞춤을 건넸다. 장서열은 순간 온 힘을 다해 발버둥 쳤으나 현천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입맞춤을 다 마친 뒤에야 그녀를 놓아주었다.
현천기는 말없이 우거진 수풀 사이에서 홀로 아름다움을 발산하고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한참 뒤에야 그가 겨우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기억해. 내가 죽으면 너도 죽는 거야.”
그는 장서열이 목숨을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녀는 어쩌면 그녀 자신도 알아채지 못한 무언가를 더욱 소중히 여길지도 모른다. 그는 왠지 질투가 이는 걸 느꼈다.
주먹을 쥔 장서열은 차라리 그를 죽이고 자신도 죽고 싶었다. 여전히 분노에 찬 그녀의 눈빛을 바라본 현천기가 혀를 차며 고개를 저었다.
등이 굽은 노인이 다시 나타났다. 그는 손에는 붉은색과 분홍색 의복 두 벌이 들려 있었다. 장서열과 헌원가의 옷과 동일한 것이었다.
“피범벅이 된 옷을 입고 갈 수는 없겠지?”
장서열이 거칠게 붉은 옷을 낚아챘다. 현천기가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두려워할 게 생겼으니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넌 참 희한해. 이런 피바다 속에서도 냉정을 유지할 수 있다니 말이야.”
장서열은 대꾸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녀가 손에 든 옷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현천기를 죽인다면 서풍엽을 포기해야 한다.’
장서열은 현천기를 힐끗 바라보았다. 평범하기 짝이 없는 얼굴이었다.
장서열은 자리를 떠나 백 년은 족히 넘어 보이는 큰 나무 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하늘거리는 붉은 옷자락이 그녀의 기분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현천기가 등이 굽은 노인을 바라보았다. 그는 주인을 바라보며 모든 일을 잘 처리했음을 알렸다. 만일 장서열이 약속을 깬다면 준비해 둔 일은 즉시 실행될 것이다. 현천기는 안도하며 노인에게 현장을 정리하라고 지시했다.
장서열은 정신을 잃은 헌원가의 옷을 갈아입혔다. 주변은 지저귀는 새소리와 발 아래 밟히는 나뭇가지 소리뿐이었다. 조금 전 일어났던 모든 일은 그저 나쁜 꿈을 꾼 것만 같았다.
장서열은 갑자기 미친 듯이 웃고 싶어졌다.
현천기 그 쳐죽일 작자 덕분에 그녀가 그려온 행복이 틀어지고 있었다. 오늘 겪은 끔찍한 기억들은 영원히 그녀를 불쾌하게 만들 것이다. 충분히 도망치고 달아났다고 생각했는데,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장서열은 얼마 남아있지 않던 선량한 마음이 모두 조각나는 걸 느꼈다. 이미 그녀는 전생에서부터 삶에 실망한 지 오래였다. 당시 그녀는 긴장을 늦추지 못한 채 하루하루를 필사적으로 살았다. 하지만 전생에서 그녀는 황후였고, 최소한 선택할 자격이라는 게 있었다.
그런데 지금 이 생은 무엇이란 말인가. 평온한 생활이 이어졌고,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이 있었고, 전생에 저질렀던 실수에 대해 속죄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제멋대로 행동했던 그 인간 말종 같은 전생보다 더 못한 삶을 사는 느낌이었다.
장서열은 다시 미친 듯이 웃었다. 현천기의 모습은 곧 전생에서 그녀의 모습이었다. 그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라면 어떠한 수단도 가리지 않았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자신을 미워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헌원가를 끌어안은 장서열은 순식간에 말끔히 치워진 현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아주 잠깐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멍한 그녀의 눈에 어느덧 사람들로 가득 찬 주변이 들어왔다.
땅거미가 진 어두운 밤이었다. 멀리서 구염락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사람들 사이에 선 그는 뚜렷하고 차가워 보였다.
고개를 든 장서열이 구염락을 바라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구염락 역시 미동도 없이 줄곧 먼 곳에 선 채 그녀를 바라만 보았다. 붉은 옷을 입고, 녹음이 짙게 깔린 풀숲에 앉아있는 그녀는 우연히 나타난 정령인 듯 조그만 소리에도 그대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아무도 감히 움직이지 못했다. 너무 조용해서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현천기는 사람들의 뒤를 따라왔다. 고개를 숙인 그는 공손하고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마치 한시도 주인의 곁을 떠나지 않은 척, 줄곧 주인과 함께 근심한 사람인 척,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려는 척 열심히 주변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장서열을 쳐다보지도 않는 그는 몹시도 태연자약했다. 현천기의 완벽한 연기를 바라보던 장서열은 화가 치솟는 걸 느꼈다. 잘못을 저질렀다는 자각조차 없다. 현천기야말로 몇 번의 생애를 다시 살든 갱생의 여지가 없을 작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