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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8)화 (138/449)

제138화

현천기의 목소리에 멍하던 헌원가의 눈에 다시 공포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가 부들부들 몸을 떨며 장서열의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장서열은 현천기의 말이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애초에 현천기가 세운 계획이 무엇이었든 이미 일은 걷잡을 수 없이 커져 있었다. 추후 황제와 충왕부를 속이기 위해서라도 현천기는 그녀를 죽여야 했다. 헌원가는 살려줄 수 있겠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장서열은 간절히 살고 싶었다. 아직 아무 것도 이룬 게 없었다. 그녀에겐 아직 혼인하지 못한 오라버니와 딸을 끔찍이 위하는 어머니가 있었다. 어떻게 어머니께 자식을 잃는 불효를 저지른단 말인가. 장서열은 절대 어머니를 울려선 안 된다고 다짐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장서열이 담담하게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몸에서 발산되는 듯 보였던 광채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보통의 소녀처럼 초연해진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가 죽었을 때는 영덕제(贏德帝) 51년이었어요. 난 당신이 현천기라는 걸 알아요. 실은 매우 뛰어난 용모를 가졌다는 것도, 당신이 형제를 죽였다는 것도 압니다. 당신은 부친을 증오하고 복수하고 싶어 해요. 그가 당신의 생모를 늙은 남자에게 보냈고, 그 남자는 당신의 어머니를 죽도록 괴롭혔으니까요.”

순간 힘이 풀린 현천기가 창백한 얼굴로 장서열을 쏘아보았다. 어느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사실이었다.

‘장서열이 어떻게 알고 있지? 대체 어떻게 아는 거야? 영덕제 51년에 죽다니. 영덕제가 대체 누…….’

현천기는 별안간 한 가지 사실을 떠올렸다. 최근 대신들이 태자 구염락의 봉호를 ‘영()’자로 결정한 바 있었다. 하지만 장서열은 그녀가 미래에 죽었다고 말하지 않는가.

장서열은 이 상황이 모순적으로 느껴졌다. 방금 실토한 내용은 이번 생에서 그녀가 갖고 있던 가장 큰 비밀이자 무기였다. 잔꾀를 부려 새로운 삶을 살고자 했던 자신은 전생의 불행을 숨긴 채 사람들을 속여 가며 행복을 손에 넣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살아남기 위해 치욕스러운 전생을 폭로했다.

어차피 사람들은 그녀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현천기는 충격이 컸다. 음흉하고 악랄한 그에게도 지금 이 순간은 매우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지금 저 계집은 과거에 한 번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고 말하는 건가? 황당하군! 이런 장난이 재미있어?’

앞으로 다가간 현천기가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장서열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는 모든 걸 알고 있는 장서열의 눈을 보며 마치 발가벗겨진 듯한 공포를 느꼈다. 주변에 이런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어디서 얻은 정보인지 말해! 안 그러면 지금 당장 헌원가를 폐인으로 만들겠다!”

현천기가 자신을 해치지 않을 거라는 걸 직감한 장서열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동요한 이상 아직 기회는 있었다. 화끈거리는 목의 통증을 참으며 그녀가 여전히 헌원가를 끌어안은 채 두려움 없는 차가운 눈빛으로 현천기를 쏘아보았다.

“모든 일을 손바닥 보듯이 훤히 꿰뚫고 있는 사람이 규방 아가씨 하나 이기지 못하다니, 현천기에게 두려운 일도 있군. 내가 지금 뭘 할 수 있겠어? 네가 숨기고 있던 이야기들을 낱낱이 밝혀내 널 수치스럽고 화나게 하는 수밖에!”

현천기가 손을 들어 올리다 한 뼘 정도의 거리에서 돌연 손을 멈췄다. 장서열은 방금 그가 정말로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사실에 등골이 서늘했다.

별안간 웃고 싶어졌다. 지금 이 순간조차도 마음대로 통제하지 못하는 사내가 후에 세상을 쥐락펴락했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구염락과 현천기, 그들에게는 세상 모두를 경멸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는 듯했다. 어려웠던 유년 생활, 살고자 하는 욕망. 마음의 상처를 안고 살아온 그들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 권력과 부귀영화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그들의 눈에 장서열처럼 태생부터 바보인 귀족들은 그저 어리석은 제물로 보였을 것이다.

“말해! 누가 네게 그런 사실을 알려 줬지? 서풍엽?”

서풍엽일 거라 확신하는 현천기의 태도에 장서열이 냉소를 터뜨렸다.

“네 능력에 그리도 자신이 없어? 아니면 다른 사람도 다 너처럼 악독할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서풍엽은 관계없어.”

잠시 눈빛을 흐리던 현천기는 조금 전 느꼈던 불안에서 벗어나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가 부친을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건 누구도 알지 못했다. 아예 입 밖으로 내본 적이 없었다.

반역과 관계된 일 역시 마찬가지였다. 서풍엽이 아무리 정보에 능하다 해도 미리 아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그걸 눈앞의 여자아이는 알고 있었다.

‘어떻게 가능하지?’

장서열은 마음을 가라앉힌 현천기를 바라보았다. 곁눈질로 주변을 바라보던 그녀가 문득 조용히 말했다.

“이건 모두 제위에 오른 뒤 구염락이 내게 해 준 이야기야. 내가 왜 그렇게 그에게 잘해 줬는지 알아?”

장서열이 비웃으며 자조적으로 말했다.

“난 그가 미래의 제왕이라는 걸 알고 있었거든. 천추의 패업을 일궈낸 황제이자 자신을 이용한 사람들을 모두 짓밟은 남자. 미래를 알고 있다면 앞으로 최고의 권력을 가질 그의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하는 게 당연하잖아.”

“…….”

“어때? 난 너보다 한 발 앞서 그와 끊을 수 없는 관계를 맺었어. 그런데… 지금 이 대화를 저들이 들어도 될까?”

갑자기 누군가 도망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현천기는 무슨 속셈인지 다 알고 있다는 듯 장서열을 쳐다봤지만 그녀에게서는 어떠한 불안과 거짓도 찾아볼 수 없었다.

현천기가 손을 한 번 내저었다. 등이 굽은 그림자가 빠르게 튀어나간 후, 주변은 눈 깜짝할 사이 온통 핏자국으로 가득 찼다. 날카로운 비명 소리와 목숨을 구걸하는 소리에 새들이 날아갔다. 이윽고 숲은 고요해졌다.

장서열이 날카로운 시선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모진 고문을 가하다 죽여도 속이 시원하지 않을 것들을 저렇게 쉽게 죽여 버리다니. 운이 좋은 작자들이었다.

현천기는 이제야 막 장서열을 본 사람처럼 쳐다봤다. 장서열의 얼굴에 묻은 핏자국은 이미 말라붙어 그녀의 하얀 피부를 더욱 돋보이게 했다. 낭패를 입은 상황에서도 그녀의 더없이 아름다운 미모는 숨겨지지 않았다.

서 세자가 좋아하고 황제가 총애하며 심지어 태자까지 가끔씩 그녀에게 관심을 두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참 좋은 운명을 타고 났다. 짓밟고 싶을 만큼!

현천기는 넝쿨 위에 선 채 장서열을 언제 죽일지 고민했다. 최대한 빨리 처리할수록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순간 살기가 감돌기 시작하자 장서열이 휘둥그레진 눈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날 죽일 생각이군. 넌 내 말이…….”

“내 운명을 다른 사람에게 듣고 싶지 않아.”

현천기가 그녀의 말을 낚아챘다. 언제든 행동으로 옮길 수 있다는 듯 그가 잔인한 미소를 지었다.

“만일 내가 죽는다면 그건 내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고, 죽지 않는다면 네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도 손해 볼 건 없어.”

장서열은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역시 누구도 믿지 않는 현천기다웠다. 그는 많은 변수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어찌 보면 전생에서 그가 높은 자리에 올랐던 것도 당연했다. 황후였던 자신을 폐한 일조차 그에게는 상소문 하나면 끝인 간단한 일이었을 것이다.

‘설마 정말로 이렇게 죽게 되는 걸까.’

장서열이 말했다.

“네가 헌원가를 해치지 않겠다고 약속하면 헌원가와 혼인할 수 있도록 설득할게.”

“아니. 그건 내가 결정해. 그걸로 날 설득하려고 하지 마. 장서열, 넌 내 계획을 망쳤어. 네가 있다는 걸 조금만 더 일찍 알았다면 난 널 진작 숲에 버렸을 거야. 하지만 이미 네가 모든 걸 봤으니 살려 둘 순 없지. 네 운이 나쁜 걸 탓해.”

“아무 것도 말하지 않을 거야.”

장서열은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너무 설득력이 없는 말이었다. 현천기 역시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봐. 너도 네 말을 못 믿잖아. …정말 신기해. 죽을 위기에서 한 명은 놀라서 정신이 나갔는데 다른 한 명은 아무렇지도 않다니.”

“…….”

“장서열, 네가 나라면 너 같은 사람을 살려서 보낼 수 있겠어? 반격할 게 뻔하잖아.”

순간 평범하기 짝이 없는 현천기의 얼굴이 더욱 싸늘해졌다. 반대로 장서열은 더욱 차분해졌다.

“내가 죽는 게 아쉽지 않아?”

“살려 두는 게 오히려 화근이 되겠지!”

현천기가 소리쳤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 한편에 불안감을 느꼈다. 사실 그 역시 궁금했다.

‘장서열이 말한 게 전부 사실이라면… 하지만 말도 안 돼. 이 계집은 원래 교활하고 계략을 꾸미는 데 능해.’

현천기는 잠시 생각하다가 핏자국이 가득 묻은 그녀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죽이는 게 아까운 얼굴이긴 했다.

“과연 미련이 남는군……. 내가 널 이 상태로 돌려보내면 서풍엽이 미치지 않을까?”

현천기가 즉시 자신의 말을 부정하며 비웃었다.

“아니지. 더 가슴 아픈 모습이 되어야 해. 서풍엽이 이성을 잃는다면 그의 세력은 내 것이 될 거야. 아니, 그냥 죽이는 게 더 큰 타격이 되지 않을까? 아니야, 아니야… 만약 서풍엽이 정말로 미쳐 버린다면 변수가 많아질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산송장으로 만드는 게 충왕부를 더욱……. 우선 확인해 봐야겠어.”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현천기가 돌연 장서열의 옷을 풀어 헤치더니 몸에 손을 갖다 대려 했다. 장서열이 그 즉시 현천기에게 따귀를 날렸다. 그녀는 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달려들어 역으로 그의 목을 졸랐다.

“그래, 죽여! 이렇게 큰일을 저질러 놓고 숨긴다고? 너도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 몰랐잖아! 하지만 대체 뒤처리를 어떻게 할 거지? 나와 헌원가를 죽이면 네가 황제와 충왕부의 의심을 피할 수 있을 것 같아?”

“…….”

“다른 사람은 몰라도 구염락은 절대 가만있지 않아! 그는 옛정을 중시하는 사람이야. 내가 그토록 잘해 줬는데 내 죽음 앞에서 그가 태연할 것 같아? 현천기, 모든 걸 통제할 수 있을 거라고 착각하지 마! 넌 네 부친을 죽이기도 전에 먼저 충왕부의 손에 죽을 거야!”

장서열의 손을 낚아챈 현천기는 그녀를 바닥으로 밀치고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날 협박해?”

현천기가 기세 좋게 말했다.

“그럼 어떤 방법이 있는지 말해 봐. 내가 헌원가를 아내로 맞이하면서 동시에 이 짜증나는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 말이야. 내 생각엔 네가 죽는 것 외에는 묘안이 없을 것 같은데?”

말을 마친 현천기가 장서열을 자신의 몸으로 짓눌러 압박해 왔다. 그 무게에 장서열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당장 현천기를 죽이지 못하는 게 한스러웠다.

“그럼 끝내든지.”

그녀는 차라리 죽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오라버니의 안위는 서풍엽에게 맡길 수 있을 것이다.

현천기가 망설이며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네 말대로 너를 죽인다면 일이 귀찮아질 거야. 어떡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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