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7화
황량한 풍경이 나타났다. 익숙한 길이 아니었고, 익숙한 얼굴도 없었다. 마차 주변은 검은 옷을 입은 낯선 자들로 가득했다. 마치 약속된 물건을 전달하기 위해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장서열이 재빨리 사방을 훑어보았다. 우뚝 솟은 산 아래 오솔길은 협소했고, 마차는 이미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나 있었다. 앞에는 낭떠러지가, 좌우로는 온갖 초목이 우거진 숲이 있었다. 전부 처음 보는 풍경이었다.
‘어떡하지?’
당황한 장서열이 마차의 휘장을 내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마차를 바꿔치기한 것이라면 어떻게 아무런 기척이 없었단 말인가.
긴장한 헌원가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언니… 어떡해요……. 정말 어쩜 좋아요…….”
장서열은 스스로에게 침착하자 되뇌었다. 이건 누군가 그녀들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꾸민 치밀한 덫이었다. 반드시 냉정을 유지해야 했다. 주인이 사라진 것을 발견한 농교는 반드시 사람을 보낼 것이다.
“침착해.”
“언니…….”
헌원가가 장서열을 바라보았다. 비록 두려웠지만 그녀 역시 연약하기만 한 아가씨는 아니었다. 헌원가는 허둥대는 기색 없이 정신을 가다듬었다.
“어쩌면 저들이 사람을 잘못 본 건지도 몰라요.”
물론 말을 하는 헌원가 스스로도 그럴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걸 알고 있었다.
“혹시 은자를 원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제가 원하는 대로 줄 수 있어요…….”
장서열은 떨리는 손발을 애써 감추었다. 한낱 은자를 위해 이렇게까지 큰일을 벌였을 리 없다. 그녀는 장서열을 안심시키기 위해 되는대로 내뱉는 것이었다.
비록 헌원가보다 냉정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긴장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는 전생에서조차 겪어본 적 없는 상황이었다.
“마차에 활이 있니?”
“네.”
황급히 자리를 옮긴 헌원가가 의자 밑에서 평범하기 짝이 없는 활 하나를 꺼내 들었다.
“걱정하지 마. 어쩌면 기회가 있을지도 몰라.”
누군가 협상을 걸어온다면 충분히 상황을 모면할 수 있었다.
장서열의 뛰어난 활솜씨를 떠올린 헌원가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꽉 잡은 그녀의 옷자락을 놓지 못했다. 헌원가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언니, 이건 나 헌원가의 마차예요. 저자들은 저를 노리고 온 게 분명해요. 언니는 반드시 도망쳐야 해요. 여기에서 벗어나면 꼭 저를 구할 사람을 보내 주세요. 혹시라도 제가 죽으면 절 대신해 복수해 주고, 어머니와 아우를 돌봐 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장서열의 품에 뛰어들었다. 미안함과 두려움이 가득한 모습이었다.
“언니…….”
장서열은 갑자기 마음이 몹시 차분해지는 걸 느꼈다. 자신을 믿고 있는 헌원가 때문이었을까, 그녀를 둘러싼 두려움이 일순간 사라졌다. 순간 뇌리 속을 스쳐 지나가는 음침한 얼굴 하나가 있었다.
‘그자야. 그자가 분명해!’
현천기는 아직도 단념하지 않은 것이었다.
장서열은 곧 맞닥뜨리게 될 위험을 떠올렸다. 이렇게 빨리 마주하게 될 거라고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 행동으로 옮긴 것으로 보아 그 역시 더는 오래 끌 수 없다고 느낀 듯했다.
갑자기 마차가 심하게 흔들리더니 불쑥 휘장이 올라갔다. 마차를 훔친 자들이 아닌 십여 명의 도적들이 칼을 든 채 기분 나쁜 눈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킬킬대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야! 찾던 게 여기 있었구나!”
흉흉한 눈빛을 번뜩인 자가 칼을 쥔 채 그녀들을 향해 달려들었다.
장서열은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그들은 그녀와 담판 지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역시 금전을 노린 게 아닌 듯했다.
그녀는 조금 전 마차를 가로챈 자들이 바로 이 산적 무리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대화가 통할 리 없었다. 어느 하나가 죽어야 끝날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장서열은 한 발 먼저 움직였다. 순식간에 살기를 드러낸 그녀가 손과 다리를 놀려 상대의 목을 세게 비틀었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에 놀란 것도 잠시, 그녀는 서둘러 정신을 차리고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그녀가 재빨리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구염락과 함께 한 여인에게 무공을 쌓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이 순간 장서열은 전생에서 구염락을 미칠 듯이 사랑했던 스스로에게 처음으로 감사했다.
검을 든 그녀가 두 번째 남자를 향해 돌진했다. 그 역시 장서열의 칼 아래 죽자 분노한 십여 명의 산적들이 포악하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저 계집을 죽여라!”
“감히 우리 형제를 죽여? 아주 잔인하고 고통스럽게 죽여 주마!”
두려웠다. 하지만 두려워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마차를 끌던 말 역시 이미 저들의 손에 죽고 없었다.
장서열은 달려드는 산적을 피하는 동시에 그의 허점을 찾아 공격을 시도했다. 그 손놀림은 노련한 무장처럼 침착하고 잔인했다. 산적의 시체에 놀라 정신을 놓고 있는 헌원가의 앞에 장서열이 던진 활이 날아들었다.
“넋 놓고 뭐하고 있어! 어서 공격해!”
그제야 정신을 차린 헌원가는 멀지 않은 곳에서 다가오는 예닐곱 명의 산적을 발견했다. 그들은 손에 칼을 들고 있었다.
두려울 새도 없이 다급해진 헌원가가 활을 쏘기 시작했다. 그녀는 먼 곳의 적을 한 명씩 쏘아 맞히며 계속해 장서열과의 간격을 좁혀갔다.
장서열은 홀로 십여 명의 산적을 상대하느라 몹시 애를 먹고 있었다. 아직 어린 나이였던 탓에 그녀는 본래 지닌 어떠한 특기도 발휘할 수 없었다.
두 사람을 향해 몰려드는 또 다른 패거리는 어느 누구도 말을 타고 있지 않았다. 헌원가가 도망칠 것을 대비한 것으로, 이는 필시 헌원가를 잘 아는 자의 소행이었다.
잠시 뒤, 헌원가는 장서열의 뒤에 몸을 숨겼다. 헌원가가 활을 쏘는 빈도가 많아질수록 등에 짊어진 화살의 수는 점점 줄어들었다.
멀지 않은 곳에는 시종일관 움직이지 않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계속해 자신들을 주시하고 있었다.
기력이 부친 장서열은 거의 장검을 휘두르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새로 주어진 생이 이곳에서 끝장날 수도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극도로 분노했다.
“언니, 저 두려워요. 두려워 죽을 것 같아요!”
헌원가가 흐느껴 울며 활시위를 잡아당겼다. 그녀에게는 마지막 화살 두 개가 남아 있었지만 힘이 없는 화살은 상대에게 어떠한 위협도 되지 못했다.
장서열은 몰려드는 산적들을 바라보았다. 더는 상대할 수가 없었다.
“숲으로 도망쳐서 시간을 끌어. 시간을 오래 끌수록 좋아.”
하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서른 명이 넘는 사내가 두 아이를 죽이려고 덤비는 중이었다. 얼마 뛰지 못한 채 헌원가는 결국 그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살려 달라는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헌원가는 어디론가 끌려가고 있었다. 이런 무력감은 처음이었다. 장서열은 밝은 대낮에 대주국의 영토 안에서 이토록 흉악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믿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후회했다. 차라리 그날 헌원가를 구하지 말았어야 했다. 산적의 손에 끌려가 죽느니 차라리 낭떠러지에 떨어지는 편이 나았다.
순간 옷이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시 한번 비명이 들려왔다. 헌원가의 날카로운 비명은 증오로 가득 차 있었다!
장서열에겐 아직 달아날 힘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를 내버려둔 채 혼자 도망칠 수는 없었다. 피투성이가 된 장서열이 헌원가를 구하기 위해 뛰다 돌연 발을 멈추고 뒤돌아 크게 소리쳤다.
“현천기! 이리 나와! 네가 죽여야 할 사람은 헌원가가 아니고 나야!”
그러나 곧 산적에게 붙잡힌 장서열은 더 이상 움직이지 못했다. 죽음의 문턱이 눈앞에 있었다.
“네가 미워해야 할 사람은 나야! 애초에 헌원가를 구해 네 계획을 망친 게 나라고! 넌 헌원가를 아내로 맞이해 호부상서를 손에 넣을 속셈이지? 황제는 마흔 살에 승하할 거야! 바로 너와 구염락의 계략 때문에!”
순간 주변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다.
“너희는 지금 여덟 장군과 반란을 모의하고 있어! 후에 구염락이 정식으로 제위에 오르면 제일 먼저 서북 세력을 멸하고 그 다음 서남을 짓밟을 거야! 내가 어떻게 모든 사실을 알고 있는지 궁금하지? 더 말해 줄까? 넌 가지를 제일 좋아하지만, 제일 좋아하기 때문에 절대 먹지 않아! 또!”
“멈춰라.”
줄곧 움직이지 않고 있던 남자가 지시를 내린 후 갑자기 사라졌다. 그녀의 입에서 황제가 마흔 살에 승하한다는 말이 나왔을 때부터 이미 누구도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장서열이 털썩 주저앉았다. 깊이 숨을 들이마신 그녀가 이내 자리에서 일어나, 멀지 않은 곳에 쓰러진 헌원가를 향해 걸어갔다. 곁에 다가가 몸을 웅크리고 앉은 그녀가 초점을 잃은 헌원가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가야… 날 봐. 이제 괜찮아. 괜찮아…….”
장서열은 발버둥치는 헌원가를 품에 꼭 껴안고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나야. 서열 언니야.”
정신을 놓은 헌원가가 미친 듯이 발버둥치기 시작했다. 장서열의 팔뚝을 꽉 깨문 헌원가의 입이 순식간에 피로 물들었다. 놓치지 않고 헌원가의 얼굴을 붙잡은 장서열이 그녀를 품에 안으며 애석하게 입을 열었다.
“괜찮아. 나를 봐……. 이제 괜찮아. 다 끝났어. 넌 아직 살아있어.”
장서열은 그들 모두를 단 한 명도 살려 두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아무리 사내처럼 자란 헌원가라도 저항할 수 없는 무력 앞에 초연할 리 만무했다. 심지어 전생에서 수많은 죽음을 겪었던 그녀조차 두렵지 않았던가.
하지만 장서열은 버텨내야 했다. 헌원가가 정신을 놓지 않도록 자신이 곁에 있어 줘야만 했으니까. 그녀가 헌원가를 품에 안았다. 일순간 몸을 떨리게 만드는 공포가 멀어졌다.
헌원가를 안은 장서열은 어린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그녀를 도닥이며 위로했다. 장서열이 평온하고 나긋한 목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모두가 움직이지 못했다. 범접할 수 없는 기운과 낮게 흥얼거리는 소리는 순식간에 그들의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어떤 이는 심지어 한 발 뒤로 물러선 채 몸을 휘청거렸다. 그들은 엷게 미소 짓는 장서열을 감히 쳐다보지도 못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린 현천기가 우거진 수풀 속에서 몇 걸음 걸어 나왔다. 그는 장서열을 죽여 화근을 없앨 심산이었다.
현천기는 이번 일을 매우 오랫동안 계획했다. 그는 현 씨 가문에서 부리던 물밑 세력을 동원해 일부러 혼란을 조장하고 마차를 강탈했다. 혹시라도 헌원가가 자살하지 못하도록 당자 얼굴을 모방해 만든 가면까지 가져왔다. 헌원가를 손에 넣은 뒤 그녀를 집에 방치하고 호부상서의 세력을 흡수하여 이용할 계획이었다.
모든 걸 철저히 준비한 그에게 장서열의 등장은 전혀 예상치 못한 변수였다. 이미 연경은 발칵 뒤집혔으리라. 그는 장서열을 죽이지 않을 수 없었다.
남아있던 산적들이 현천기를 위해 길을 터 주었다. 현천기는 다리를 저는 노인 한 명과 함께 모습을 드러냈다. 장서열을 보고 잠시 멈칫한 현천기가 이내 다시 미간을 찌푸렸다. 과연 세자를 꼼짝 못하게 만들 만큼 아름다운 용모였다. 하지만 그는 미인계나 쓰는 여인을 살려둘 생각이 없었다.
“한마디 하게 해 주겠다. 만일 나를 만족시키지 못한다면 죽일 것이니 원망 마라.”
산적들 사이에서 뜻밖의 탄식이 들렸다. 저렇게 아름다운 아이를 죽인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