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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6)화 (136/449)

제136화

가을이 되자 장서열의 혼례 준비는 막바지에 이르렀다.

황제는 구염락의 주청에도 불구하고 동남부 지역에 군사를 보냈다. 조정은 세차게 술렁였다.

최근 장신성은 감히 외출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있었다. 출병하는 군사들이 금광으로 번쩍이는 갑옷으로 무장한 모습은 위압적이었다. 이는 평소 글을 짓고 서책을 암송하던 이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평소 고상한 논리를 늘어놓기에 여념이 없던 호방한 이들도 직접 군대의 위용을 맞닥뜨리자 두려움에 떨었다.

진정으로 황권을 위해 싸우는 이들을 제외하면 조정은 기이할 정도로 조용했다. 문관들은 황제의 명을 두려워하며 숨을 죽였다.

서재에 앉아 있던 서풍엽이 조용히 한숨을 내쉬었다. 어둠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울렸다.

“세자, 움직일까요?”

서풍엽이 긴장을 덜어낸 목소리로 말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는 12월쯤 움직일 계획이었다. 의심에 의심을 더한 황제가 모든 기운을 소진하고 더 이상 험한 수를 쓰지 못할 때까지 기다릴 심산이었다.

같은 시각, 저군전은 조용했다.

대전에 들어찬 십여 명의 태감과 궁녀들은 찍소리도 내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모두들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머리 꼭대기에 눈이라도 달린 듯 보지 않고도 주인의 표정을 알 수 있었다.

이 공공은 기척 없이 여위고 허약한 몸을 가누며 맨 끝자리에 서 있었다. 현천기의 입꼬리에 잔인한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당장이라도 군대를 움직이고 싶어 안달이 난 그가 물었다.

“군대를 움직일까요? 제1군이 결성된 지 삼 개월이 지났습니다. 전투 능력은 충분합니다.”

“아니.”

제1군과 1등 공(一等功), 어느 것 하나 움직여서는 안 된다. 현재 황제가 동원하고 있는 병권은 공개적인 군대였다. 변경을 지키는 각각의 장군들은 모두 황실의 군력을 손금 보듯 알고 있는 노장들이었다. 쉽지 않은 전투가 될 것이다.

구염락이 붓을 들어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했다. 곧 이어 특수한 모피로 만든 파란색 밀지(密旨, 비밀리에 내리는 명령이 적힌 문서)가 탁자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것을 베껴 대장군이 있는 곳으로 보내라.”

모든 이가 어리둥절했다. 조정에서는 대장군 한 사람만 파견했는데 굳이 이를 베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다른 한 사람은 누구지?’

또 다른 대장군이라면 적군인 동남 대장군뿐이었다.

의문을 갖던 이들은 이내 빠르게 생각을 지웠다. 그들은 서둘러 주인의 명령에 복종했다.

대전의 상황은 몹시도 심각했다. 팔백 리 바깥에서 쉴 새 없이 다급한 전갈이 도착했다. 봉화(烽火, 옛날에 신호용(信號用)으로 사용(使用)했던 횃불)가 타올랐으며, 만신창이가 된 군대가 짙은 연기를 뿜어내는 나날이 지속되었다. 양측의 군대는 무자비한 전투로 수많은 사상자를 냈다.

화가 난 황제가 상소문을 집어던졌다. 그는 일필휘지로 제1군의 참전을 허가하고, 최대한 빨리 동남쪽의 변경을 장악할 것을 명했다.

그러나 구염락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때를 기다렸다. 참다못한 황제가 끝내 충왕부에 출병을 명령하기만을.

서풍엽 역시 기다리고 있었다. 동남 대장군이 대승을 거두기 전, 황제로부터 충왕부의 출병 명령이 떨어지기만을.

전국이 요동치고 있었다. 전쟁터에 나가지 못하는 집안의 부녀자들은 모두 자중했다. 여인들은 침묵했지만 남자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를 듯이 높아졌다. 그 기세등등함이 말로 다할 수가 없었다.

좌상부에도 자잘한 사건이 지나갔다. 최근 조옥언은 풍한에 들어 사흘 동안 침대에 누워 있었다.

며칠 전 서풍엽은 좌상부에 의원을 데리고 왔다. 그는 장 부인이 풍한에 든 것이 분명하니 열심히 몸조리를 하면 나을 것이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장서열은 어머니의 침대맡을 떠나지 않으며 효를 다했다. 시간이 나면 전장에 나간 오라버니에게 서신을 적어 격려했다. 겨우 제3차 파병 부대의 명단에 올랐을 뿐이었지만 그녀는 오라버니가 새 생명이라도 얻은 듯 기뻐하던 모습을 떠올릴 때마다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아주 작은 조의 조장을 맡은 오라버니는 금방이라도 승리를 거머쥘 것처럼 자신에 차 있었다.

장서전이 전장으로 떠난 뒤, 장서열은 겉으로는 걱정스러운 모습을 보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기뻐했다. 그가 전장을 좋아한다는 걸 그녀만큼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그녀로선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장서전은 피가 들끓는 전투에 뛰어드는 걸 좋아했다.

조옥언의 병세가 전해지자 황궁에서는 대량의 약재를 하사했다. 조옥언은 평소처럼 집안의 첩실들에게 이를 나눠 주었다. 황제가 친히 보낸 태의와 서풍엽이 데려온 의원이 교대로 조옥언의 진맥을 보았다. 서풍엽은 자신이 데려온 의원을 신뢰하여 그에게 매일 조옥언의 진맥을 보게 했다.

풍한에 든 지 나흘째 되는 날, 조옥언은 기력을 되찾았다. 장서열의 얼굴에도 마침내 미소가 돌아왔다.

한숨 돌리게 된 그녀는 그제야 서풍엽의 행동이 평소와 다르다는 걸 눈치챘다. 곧 사위가 될 그가 효심을 표하는 건 이상할 게 없었지만, 왠지 지나치게 적극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서열은 의원을 데리고 떠나는 서풍엽을 붙잡고 웃으며 질문했다. 서풍엽이 애정이 담긴 시선으로 장서열의 코를 건드리며 답했다.

“장모님께 잘 보여야지.”

장서열이 해맑게 웃음을 터뜨렸다.

“출병할 건가요?”

서풍엽은 전투를 좋아했다. 전생에서 그는 구염락의 수하에 있던 십대장(十大将) 중 한 명이었다. 이는 그가 당당히 전공을 세워 쟁취한 자리로, 장서열은 이대로 전장의 대치 상태가 지속된다면 충왕부 역시 반드시 전투에 참가하게 될 것이라 추측했다.

그녀의 물음에 서풍엽이 아직 자라지도 않은 수염을 쓰다듬는 척하며 눈을 빛냈다.

“기대하는 중이야.”

장서열은 그를 툭 건드렸다.

“그게 뭐예요.”

말을 마친 그녀가 왠지 모를 슬픔에 고개를 떨어뜨렸다. 갑자기 마음이 답답해졌다. 서풍엽이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혼례일 전에 반드시 돌아올게.”

* * *

내전은 장서열의 상상보다 더욱 참혹했다. 그녀는 여유가 있을 때마다 사원에 들러 오라버니를 위해 기도를 올리거나 평안부를 받아오며 안도하는 습관이 생겼다.

연경의 큰 사원에는 시시때때로 인파가 몰렸다. 대부분 전장에 나간 남편과 아들, 손자를 걱정하는 부인들이었다. 이들은 아낌없이 거액의 은자를 바쳤다.

부처에게 올린 향이 피어오르는 가운데, 장서열은 청색 적삼을 입은 여인들 사이에 서 있었다. 문득 그녀는 이 모든 게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어오르는 연기를 바라보던 그녀가 손에 쥔 황색 부적을 구겨 버렸다. 만약 서풍엽이 출정하게 된다면 그녀 역시 따라갈 것이다. 온 세상을 덮친 봉화에 그가 변을 당한다면 그녀 역시 그 뒤를 따를 작정이었다.

비로소 지난 며칠 동안 긴장했던 마음이 풀리는 듯했다. 그제야 맑은 하늘을 즐길 수 있게 된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하산하기 시작했다. 반쯤 다다랐을 때, 그녀는 향을 피우러 올라오는 익숙한 사람과 마주쳤다.

휘장을 걷어 올린 헌원가가 얼른 마차에서 뛰어내렸다.

“서열 언니, 언니도 여기 온 거예요?”

헌원가는 전장에 나가 있는 장서열의 오라버니 장서전과, 최근 출병 명령을 받았을 거라 짐작되는 서풍엽을 떠올리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그녀가 장서열의 손을 잡고 안타깝게 말했다.

“정말이지 마음 쓰이게 하는 사람들뿐이네요.”

장서열이 웃었다.

“당자가 걱정되나 보구나?”

헌원가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여인 특유의 수줍은 모습이었다.

“누가 그를 걱정해요. 아주 부친 곁으로 가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장서열은 빙그레 웃었다. 당자는 전장에서 돌아오면 말괄량이인 그녀를 아내로 맞이할 거라고 약조하고 떠났다. 달콤한 청혼이라고 할 수는 없었지만 헌원가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언약이었다. 장서열은 친구의 기분을 좋게 해 주기 위해 부러 말했다.

“당자는 아버지께 혼인 날짜를 여쭤보러 갔을 거야.”

주먹을 쥔 헌원가가 장서열의 뒤를 쫓으며 달려갔다.

“그만 놀려요!”

결국 헌원가와 함께 다시 사원으로 발길을 돌린 장서열은 다시 한번 향을 피우고 제비를 뽑았다.

해첨전(解簽殿, 뽑은 제비의 뜻을 풀이해주는 곳)의 나이든 비구니는 헌원가가 뽑은 제비를 한참동안 바라보다 다시 지그시 헌원가를 쳐다보았다. 오래도록 그녀의 얼굴을 응시하던 비구니가 아무 말 없이 제비를 내려놓았다.

화가 난 헌원가는 해첨전의 책상을 뒤엎으려 했다. 결국 시녀들에게 끌려나온 그녀는 제비를 든 채 노기 등등한 얼굴로 소리쳤다.

“뭐하는 짓이야! 난 분명 최상의 제비를 뽑았는데 어째서 풀이를 해 주지 않는 거야? 좋은 말을 해 줘야 마땅하잖아!”

그녀가 뽑은 제비라면 대충 지어낸 덕담이라도 들려 줘야 정상이었다.

헌원가는 제비를 들고 점사를 기다리는 백성들 사이를 휘저으며 ‘좋은 점사예요.’, ‘아가씨의 소원이 이루어진대요.’, ‘부귀영화를 얻을 거래요.”라고 닥치는 대로 풀이를 해주었다. 득의양양해진 헌원가는 웃고 있는 장서열을 끌고 마차에 올라 자리를 떠났다.

마차 행렬은 산 아래를 향해 내려갔다. 헌원가는 손에 든 제비를 바라보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그녀가 맑은 눈빛으로 장서열을 보았다.

“어때요? 제비 뽑는 솜씨 굉장하죠?”

헌원가의 진솔한 매력을 좋아하는 장서열이 웃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그녀의 마음은 줄곧 그 나이 든 비구니에게로 향해 있었다.

‘대체 뭘 본 걸까?’

사람의 운명을 읽는 건 매우 신묘한 능력이었다. 그리고 대주국에서 이러한 경지에 이른 고승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공교롭게도 그 중 한 명이 방금 전 국암사(國庵寺)에 있는 자였다. 그리고 장서열은 제비를 뽑는 몇 안 되는 순간마다 항상 그녀를 마주쳤었다. 충왕비와 함께한 날, 불쑥 나타나 만사에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말을 한 것도 그녀였다.

장서열은 생각에 잠겼다. 새로운 삶을 얻은 후 여전히 그녀가 원한을 품고 있는 자는 단 두 명뿐이었다. 여기에서 뭘 더 어떻게 마음을 편히 가지라는 말인가. 그녀는 부처님이 한낱 중생에게 요구하는 게 많다고 생각했다.

헌원가가 큰 목소리로 장서열을 잡고 흔들었다.

“언니! 지금 언니한테 말하고 있는데 왜 다른 생각을 하는 거예요!”

장서열이 풋 하고 웃었다.

“그만 좀 흔들어. 다 듣고 있었어. 게다가 나도 좋은 제비를 뽑았는걸? 네 솜씨 하나도 안 부러워!”

“또 놀리기예요?”

두 사람이 장난을 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마차가 덜컹거리며 요동쳤다. 그 소란에 선반에 쿵 소리를 내며 부딪힌 헌원가는 아파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녀는 힘껏 팔걸이를 붙잡은 장서열 덕분에 두 번 다치는 불상사를 피할 수 있었다.

즉시 자리에서 일어난 헌원가가 휘장을 걷고 성난 목소리로 외쳤다.

“대체 마차를 어떻게 모는 게……!”

돌연 마차 휘장을 내린 헌원가가 창백한 얼굴로 장서열을 보았다.

“언니… 큰일이에요. 아무래도 곤경에 처한 것 같아요……. 이 일을 어쩌면 좋아…….”

별다른 낌새를 느끼지 못한 장서열은 어리둥절했다. 그녀가 휘장을 걷고 바깥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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