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5화
사실 현천기는 그게 사실일 거라 믿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서풍엽이 애국심에 불타 구염락의 옆자리를 노리고, 황제와 태자를 더욱 가깝게 만들어 변경 세력을 두려움에 떨게 만들 목적이었다면 모를까. 이 모든 게 진정 한 여자를 위해 벌인 자작극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었다.
현천기는 사내라면 마땅히 권력과 부귀, 나라와 천하를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풍엽 같은 인물이 고작 한 여자를 위해 음모와 계략을 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러나 만에 하나 그것이 사실이라면 유감스럽게도 그는 그 사랑놀음에 장단을 맞춰 줄 생각이 없었다.
빗줄기가 점점 가늘어졌다. 구름 사이로 희미한 달빛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차가운 바람은 벌써 가을이 온 듯했다.
황궁은 여전히 등불을 환히 밝혀두고 있었다. 달빛의 차가움은 커다란 촛불을 흩뜨리지 못했다.
홑옷을 걸친 황제가 침대에 앉아있었다. 공기 중에는 아직 비빈이 남기고 간 향기가 남아 있었다.
“만일 이번 사건이 사공주를 밀어내기 위한 서풍엽의 소행이라면 폐하께서는 어찌 하시겠습니까?”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앉은 구염락이 황제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반드시 답을 들어야 했다. 그래야만 앞으로의 행보가 결정될 것이다.
이제부터는 한 치의 실수도 용납할 수 없었다.
황금빛 용비봉무도(龍飛鳳舞圖)와 촛불이 조석궁(朝夕宮) 내부를 대낮처럼 환하게 밝히고 있었다. 금황색 용포를 입고 바로 앉은 황제가 아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최근 단행한 개혁을 자식에 대한 지극한 사랑 따위로 만들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상황은 황제가 가장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다. 구염락의 눈 속에 감춰진 감정을 마주하며 그는 알 수 없는 두려움을 느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차라리 장서열이 서풍엽과 혼인하기를 바랐다. 그건 비단 서풍엽이 장서열을 위해 노력하고 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만에 하나 구염락이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엇나가면 어찌할 것인가.
황제는 평온한 얼굴과 달리 거칠 것이 없는 그의 행보를 보며 문득 조옥언을 떠올렸다. 원한에 사무친 그녀는 아무 남자와 혼인하여 십수 년간 스스로를 집안에 가둬 버린, 참으로 고집스런 여인이었다.
황제는 과연 장서열이 조옥언을 얼마나 닮았을지 궁금했다. 장서열은 줄곧 온순하게 행동했지만 가끔씩 그녀와 비슷한 눈빛을 보이곤 했다. 믿는 건 끝까지 믿고, 마음에 들지 않는 건 그 자리에서 부수어 버리는 성격임이 분명했다.
황제는 왠지 그 점에서만큼은 장서열이 조옥언보다 한 수 위일 거라고 생각했다. 만약 마음에 차지 않는 일이 벌어진다면 그녀는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울 것이다.
자신과 아들이 과연 장서열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혹 그녀가 모든 사실을 알게 된다면, 과연 구염락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 만약 최악의 사태가 벌어진다면 구염락은 장서열의 분노를 감당할 수 있을까?
어쩌면 장서열이 구염락을 증오하기도 전에 이미 그가 스스로를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구염락은 황제에게서 아무런 말이 없자 미간을 찌푸렸다.
“폐하.”
역시나 예상한 그대로였다. 구염락은 장서열과 관련된 일에서만큼은 유독 황제보다 조급하게 굴었다.
황제는 기이할 정도로 냉정했다. 일부러 속아 주는 척을 하는 게 아닌 이상 함부로 그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그럴 바엔 차라리 장서열에 대한 열망을 솔직하게 드러내는 편이 나았다. 황가의 사람들은 싫증이 나 버릴지언정 갖고 싶은 걸 얻지 못하는 건 참지 못했다.
황제가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돌아가거라. 앞으로 장서열의 일은 짐이 직접 처리할 테니 너는 더 이상 관여하지 마라.”
구염락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어느새 여유로운 눈빛을 지워 버린 그가 불같은 시선으로 황제를 쳐다보았다.
“폐하!”
황제가 먼저 입을 열었다.
“짐은 이제껏 네게 해준 것이 없다. 그러니 혼인만큼은 반드시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겠노라 약조하마. 대신, 앞으로 모든 형제에게 반드시 관용을 베푸는 것이 조건이다.”
“불가능합니다. 신뢰할 수 없습니다.”
“닥쳐라! 네가 직접 나선다고 뭐가 해결될 것 같으냐? 진상을 알게 된 장서열이 후에 어떤 후폭풍을 불러올지 생각은 해 보았느냐? 과연 그때도 그 아이가 너를 사랑할 거라 장담할 수 있느냐? 당장 네 목을 조르고 이 나라와 구염 가문을 멸하지 않으면 다행이다!”
“…….”
“됐다. 짐에게 다 생각이 있으니 이만 물러가라!”
구염락은 ‘목을 조른다’는 말에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당장이라도 자신이 감쪽같이 해낼 수 있다고 외치고 싶었지만, 왠지 입을 뗄 수가 없었다.
앞으로 나선 진 공공이 공손하게 태자를 모시고 나갔다. 문 앞에 놓인 은백색 깔개에 시선을 고정한 황제의 눈빛은 조금씩 차갑고 딱딱하게 변했다. 아들과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 * *
가을바람이 스며들 기미도 없이 뜨거운 햇살이 다시 떠올랐다. 솥뚜껑처럼 달아오른 공기는 많은 사람들을 숨 막히게 했다.
뜨거운 열기를 그대로 옮겨 놓은 듯 선명한 붉은 옷자락이 경쾌하게 뛰어들었다. 열기 따위는 아랑곳없이 오히려 홀로 청량한 모습이었다. 익숙한 정원에 선 서풍엽은 꿈에도 그리던 이가 자신을 향해 달려들자 자신도 모르게 입꼬리를 올렸다.
“서풍엽! 돌아왔군요!”
장서열의 어여쁜 콧날이 그의 가슴에 닿을 정도의 거리에서 돌연 멈춰 섰다. 그녀의 얼굴은 온통 환한 미소로 가득했다.
“자, 말해 봐요! 혹 바깥에서 다른 여인에게 눈을 돌리지는 않았나요?”
순간 초 마마의 얼굴에 진땀이 흘렀다. 그동안 아가씨에게 가르쳤던 수많은 법도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서풍엽은 당장이라도 장서열을 품에 안고 싶었다. 그러나 지켜보는 시선이 너무 많았다. 그는 아쉽게 두 손을 뒤로한 채 몸을 숙여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나 보고 싶었어?”
장서열의 귓불이 살짝 붉어졌다. 그의 숨결이 아슬아슬하게 목에 닿았다. 순간 떨리는 마음을 억누른 그녀가 웃어 보였다. 그리고 서풍엽의 장난을 알아듣지 못한 사람처럼 무미건조하게 말했다.
“살이 좀 탔네요.”
서풍엽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지 못하고 그녀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너처럼 이 몸을 홀대하는 사람은 없구나.”
주변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그녀가 서풍엽에게 다가가 팔짱을 꼈다. 굳이 사공주의 일에 대해 묻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사공주가 떨어져 나간 건 기쁘고 안심할 만한 일이었다.
사실 장서열은 앞으로 서풍엽 앞에 나타날 두 명의 공주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미리 계획해 둔 상태였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한 명이 나가 떨어졌다. 역시 서풍엽은 매우 똑똑한 사람이었다. 이로써 장서열은 다시 어질고 현명한 여인으로 살 수 있게 되었다.
위지해어를 처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또 그녀가 사공주와 얽혔다면, 결국 그녀의 평판은 예전처럼 땅에 떨어졌을 것이다.
장서열은 생각할수록 절로 웃음이 나왔다. 부군이 자신을 도와 여인을 물리쳤다고 생각하니 날아갈 듯 마음이 가벼웠다.
서풍엽은 사랑하는 마음을 고이 접어둔 채 그녀의 손을 잡고 정원(正院)으로 향했다.
“평안부(平安符, 안전을 기원하는 부적) 고마워.”
고개를 든 장서열이 자신을 내려다보는 서풍엽의 시선을 마주했다. 넘치는 마음을 그대로 표현하는 그를 바라보며, 장서열은 백지 한 장을 선물해도 서풍엽에게는 보물이 될 거라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 얻은 가장 값진 것은 누군가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 * *
마침내 여름의 끝자락이 다가왔을 때였다. 서풍엽은 갈수록 바빠졌지만 되도록 장서열에게 공무에 관해 말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는 원활한 혼사를 위해 황실과 장서열 사이에서 부단히 노력했다.
얼마 전, 서풍엽을 부른 황제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짐은 네가 사공주와 혼인하기를 바란다.”
서풍엽은 현명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사공주와 그를 맺어주려던 자신의 심중을 서풍엽이 모를 거라 생각지 않았다.
서풍엽이 고개를 들었다. 황제가 이렇듯 직설적으로 나올 줄이야. 하지만 그렇다 해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명을 받들지 못함을 용서하십시오.”
“지금 항명(抗旨, 황제의 명을 어김)하겠다는 것이냐?”
바닥에 꿇어앉은 서풍엽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역시 황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끝끝내 사방에서 전쟁의 불길이 피어올라야만 집착을 멈출 듯했다.
황제가 아래에 꿇어앉은 신하를 쳐다보았다. 과거 그가 총애해 마지않던 충왕부의 세자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난 능력을 발휘했다. 황제 또한 진심으로 대주국의 훌륭한 인재를 잃고 싶지 않았다.
“너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짐의 말 한마디가 너희 둘을 갈라놓을 수 있다는 것을.”
고개를 든 서풍엽의 눈에 싸늘한 기운이 스쳤다. 비록 바닥에 꿇어앉아 있었지만 기백만큼은 소나무처럼 꿋꿋했다.
“폐하, 고작 여자아이 하나에 그럴 가치가 있습니까?”
날카로운 시선이 황제를 향했다. 난생 처음 마주보는 황제의 눈이었다. 서풍엽은 생각처럼 황송하지는 않다고 생각했다.
황제가 서풍엽의 시선에도 아랑곳없이 말했다.
“풍엽아, 먼저 줄을 선 것이 네가 아니라는 걸 알아야 한다. 네가 짐의 손에서 그 아이를 빼앗으려 하는데, 짐이 가만히 앉아 내어줄 수는 없지 않느냐.”
서풍엽의 눈빛이 더욱 차가워졌다.
“그게 바로 서열이에 대한 폐하의 총애입니까?”
용좌에 앉은 황제가 천자의 위엄이 느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다. 그것은 나의 집념이다.”
서풍엽이 또박또박 힘주어 말했다.
“만일 소신이 동의하지 않는다면 어찌하시겠습니까?”
황제는 마치 아래에 있는 서풍엽이 보이지 않는 양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천자가 하지 못할 일은 없다. 넌 대주국에 어떠한 인물로 남길 원하느냐? 심지어 짐은…….”
잠시 말을 멈춘 황제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널 단념시키기 위해서라면 그 아이를 죽일 수도 있다.”
그날 이후, 서풍엽의 주변에는 낯선 이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왕부에는 몇몇 하인까지 바뀌어 있었다. 그가 길을 나설 때마다 알 수 없는 자들이 따라붙었다. 이들을 떼어내는 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황제는 서풍엽의 일거수일투족에 대비하고 있었다.
서풍엽은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이따금씩 씁쓸한 표정을 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그는 평소처럼 업무를 보았고, 가끔은 조옥언의 허락을 얻어 장서열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전과 다름없이 평온한 나날이었다.
황제는 점점 의구심이 들었다. 낙하봉에서의 일이 정말 서풍엽의 소행이었을까? 그게 사실이라면 서풍엽은 어째서 앉아서 죽기만을 기다리고 있는가.
‘혹 그의 소행이 아니라 변경 세력이 황권을 시험하고 있는 거라면?’
황제는 구염락처럼 오로지 서풍엽 한 사람만 의심할 수 없었다. 만일 서풍엽의 짓이 아니라면 이는 변경 세력을 키워주는 꼴이 된다. 이대로 앉아서 적을 놓칠 수는 없었다. 황제는 사실 여부를 떠나 사공주의 습격 사건을 빌미로 변경 세력을 제압하기로 마음먹었다.
전쟁을 앞에 둔 일촉즉발의 상황에서 조정의 분위기는 몹시 미묘했다. 그러나 서풍엽은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