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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4)화 (134/449)
  • 제134화

    육영 역시 이해할 수 없었다. 갑자기 어깨가 아팠는지 끙, 소리를 낸 그가 별안간 무엇이 번뜩 생각난 사람처럼 고개를 쳐들었다.

    “설마 누군가 태자 전하를 모함하려는 게 아닐까요?”

    서풍엽이 기특하지만 한편으론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뜻이냐?”

    육영이 다시 한번 자신의 추론을 펼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서풍엽 앞에서 능력을 떨칠 기회였다.

    “생각해 보세요. 십삼황자가 태자가 되고나서 가장 불리해진 사람이 누구죠? 이황자잖아요. 십삼황자와 태자 자리를 겨룬 게 귀비파(貴妃派)이기도 하니, 사공주가 공격당하면 사람들은 태자가 반대 세력인 이황자 쪽에 보복한 거라고 생각할 거예요.”

    서풍엽은 짐짓 칭찬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대견하구나. 허나 함부로 추측하지 마라. 황실의 일은 멋대로 입에 담아서는 안 된다. 우리는 오직 사실에 근거해 폐하께 보고하고 개인적인 추측은 삼가야 해.”

    육영이 더욱 득의양양하게 말했다.

    “형님, 당연히 저도 알고 있지요. 우리가 이런 음흉한 계략에 개입해서야 되겠습니까. 배후에는 분명 변경의 대장군 무리가 버티고 있을 거예요. 위지 대인이 무너진 후로 변경의 움직임이 갈수록 심상치 않아요.”

    서풍엽은 전방을 응시하며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여전히 황제와 태자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폐하께서는 어떤 움직임을 보이실까? 이 기회를 틈타 반대파를 제거하려 하실 텐데, 그렇다면 제일 먼저 공격하는 건… 분명 서북 대장군이겠지.’

    서풍엽은 영명한 황제가 지난 이 년간 서북 지방에서 일어난 수상한 움직임을 모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미 예전부터 서북 세력과 구염락의 결탁을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황제가 서북 세력을 상대로 칼을 뽑아든다면 태자는 막강한 조력자를 잃게 될 것이다.

    서풍엽은 그 틈을 타 장서열과 혼례를 올릴 계획이었다. 하나의 대비책이었고, 시간은 충분했다.

    ‘허나 만에 하나 폐하께서 움직이지 않는다면…….’

    그렇다면 서풍엽은 내일이라도 즉시 장서열과 혼례를 올릴 생각이었다. 황제와 태자는 미처 손쓸 틈도 없을 것이다.

    물론 서풍엽은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라면 그렇게까지 되지 않길 바랐다. 혼인은 인륜지대사였다. 그는 장서열에게 도둑 결혼이라는 한을 남겨 주고 싶지 않았다.

    장서열이 올해 혼례를 올리는 데 동의한 것만으로도 서풍엽은 이미 그녀에게 많은 빚을 졌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혼례의 설렘을 채 느끼지도 못한 채 그녀를 몰래 아내로 맞는다면 서풍엽은 장모님을 뵐 면목이 없었다. 그는 부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상황이 일어나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사공주 습격 사건은 그 즉시 연경에 퍼져 세도가를 술렁이게 만들었다. 위지 대사마의 실각이 채 마무리되기도 전에 십삼황자가 태자 자리에 올랐으며, 그 여파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공주가 습격을 당한 것이다.

    ‘황제 폐하께서 움직이려는 건가? 이제 대주국에도 큰 변화가 생기는 것인가?’

    조정 대신들은 밤낮으로 올려대던 상소를 중단하고 최근 벌어진 일련의 사건들을 헤아리기에 바빴다. 병부(兵部)는 황제의 코앞에서 벌어진 중범죄에 대한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낙하봉은 본래 불미스러운 일 없이 평화로운 곳이었다. 시간이 지난 뒤 비난의 화살은 이 모든 음모를 꾸민 것으로 추측되는 변경의 대장군에게로 향했다.

    피서지에 머물던 황제는 상소를 내던지고 그날 바로 황궁으로 돌아갔다. 이번 사건은 누구든 죽어 마땅한 반역이었다.

    황제는 문득 이황자를 떠올렸다. 이쯤 되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자식이었다. 구염락이 지닌 능력의 절반도 채 못 갖춘 녀석이 감히 몹쓸 생각을 품지 않았는가. 둘째는 열셋째와 다툴 줄만 알 뿐 스스로 무엇이 부족한지도 모른 채 일을 망치고 있었다.

    황제는 이번 습격 사건의 배후가 이황자일 거라고 단정 지었다. 설령 아니라 해도 둘째가 연관되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는 재물밖에 모르는 소인배들과 결탁해 간교한 계책으로 열셋째를 음해한 것이다.

    ‘몹쓸 것 같으니라고! 모두에게 비웃음거리가 되리란 것도 모르는 멍청한 녀석!’

    황제가 돌아온 후 연경은 혼란에 빠졌다. 팔백 리 밖에서 변경의 관문을 지키는 4대 장군들은 여덟 명의 부장들과 합의하여 황급히 충심첩(忠心帖, 충성을 맹세하는 서약을 적은 문서)을 지어 올렸다. 그들 모두가 이번 변고를 전혀 알지 못했으며 자객의 무공이 변방의 것과 비슷하나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 그들은 나라와 제왕에 충성하고 절대 역심을 품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를 기회로 황제는 나라의 기강을 해치는 간악한 무리와 싸우는 한편 군정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그는 연경의 치안을 문제 삼아 금군(禁軍)을 여덟 대로 재편성하여 제1군으로 명한 뒤 태자의 지휘 아래 두었다.

    조정은 술렁거렸다. 사공주 습격 사건에 감춰진 내막, 연경을 염탐하는 변경 세력에 대한 의구심, 심지어 대사마의 원혼이 노한 것이라는 두려움까지. 소문은 끊이지 않고 꼬리를 물었다. 황제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나날을 보냈다.

    뜨겁게 들끓던 연경은 저녁이 되자 비로소 짙은 어둠에 휩싸였다. 전전긍긍하는 조정과 달리 백성들은 보름 만에 찾아온 서늘함에 기뻐했다. 광풍이 몰아치며 하늘이 흐려졌다. 태양이 서산으로 넘어가자 주위는 깜깜한 어둠으로 물들었다.

    백성들이 모처럼 시원한 밤공기를 즐기고 있을 때, 구염락은 한 무리의 사람을 거느리고 조용히 낙하봉에 나타났다. 차가운 비가 몰아치고 있었다.

    회색 의복을 걸친 현천기는 무리에 은밀히 섞여 있었다. 우산을 펼친 듯한 갈모(고깔과 비슷하게 생겼으며, 비에 젖지 않도록 기름종이로 만든 모자) 위로 빗물이 흘러내리며 그의 주변에 안개를 형성했다.

    구염락이 비틀거리는 그림자 하나를 잡아당겼다. 내리는 비를 얼어붙게 만들 듯 싸늘한 말투였다.

    “정말 사공주를 공격하지 않았습니까?”

    온통 붓고 멍든 얼굴을 든 그가 쉬지 않고 살려 달라며 애걸했다. 자세히 보면 걸음이 삐뚤고 가운데 손가락이 뒤틀려 있어 마치 중병이 든 노인 같았다.

    “아니야! 아니야, 아우! 이 형을 믿어 줘! 정말 내가 그런 게 아니야. 내가 한 짓이라면 네게 이대로 맞아 죽어도 할 말이 없어!”

    구염락이 손을 놓자 이황자가 순식간에 진흙탕 바닥에 쓰러졌다. 과거 고귀했던 황자는 감히 경솔하게 굴 생각을 하지 못한 채 그저 무릎을 꿇고 목숨만 살려 달라 애걸하고 있었다.

    이황자는 이제껏 유순하기 그지없던 열셋째 아우가 망설임 없이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꿈에도 알지 못했다. 지난 사흘간 그는 차라리 단칼에 죽기를 바랄 정도로 혹독한 고문을 당했다.

    그는 끌려온 첫날부터 본능적으로 거짓을 고해서는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한 마디도 허투루 말할 수 없었다. 구염락의 수법은 그만큼 악랄한 구석이 있었다.

    사람들 사이로 몸을 숨기며 이황자는 감히 구염락에게 복수할 생각 따윈 하지 못했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자신에게 이런 엄청난 누명을 뒤집어씌운 자가 죽도록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갈모를 쓴 채 단출하게 선 구염락의 그림자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강렬한 존재감을 드러냈다. 사공주가 자객을 맞닥뜨린 곳까지 몇 걸음 걸어 나간 그가 가만히 선 채 깊은 생각에 잠겼다. 멀지 않은 곳에는 검은 옷을 입은 친위대 몇 명이 그를 호위하고 있었다.

    다시 몇 걸음 앞으로 향한 구염락이 이번에는 서풍엽이 있던 자리에 섰다. 한참 뒤, 그가 제자리로 돌아와 현천기의 곁에 섰다.

    “전하, 무엇을 찾아내셨습니까?”

    구염락은 물안개 사이에 놓인 산길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주변은 온통 칠흑 같은 어둠으로 가득했다. 높은 곳에서 흘러내린 빗물은 작은 강으로 떨어져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구염락은 앞다투어 낙하봉을 빠져나가는 빗물을 바라보며 입가에 조소를 그렸다.

    이황자가 벌인 짓이 아니다.

    현천기는 이미 사건 당시 연경 주변 백 리 밖까지 낯선 이가 드나든 적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해 주었다. 이는 곧 내부인이 벌인 소행이라는 뜻이었다.

    이번 일로 가장 큰 이득을 보게 될 자. 이건 두말할 것도 없이 구염락 자신이었다.

    이번 일은 비천한 그를 가여운 태자로 만들어 주었으며, 귀한 신분이라는 명분을 쥔 이황자를 비난 받게 만들었다. 이는 스스로 생각해도 구염락 자신이 세상 사람들의 이목을 딴 데로 돌리고자 벌인 연극 같았다.

    여기까지 생각이 미친 구염락이 눈을 치켜떴다. 자신을 제외하고 이득을 본 자가 또 한 명 있지 않은가.

    서풍엽이었다.

    사공주는 거만하고 제멋대로인데다 수다스러운 성격이었다. 그녀는 이미 황실에 서신을 보내 서풍엽과 혼인하겠다는 결심을 전한 바 있었다. 그가 자신의 몸을 만졌으니 마땅히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하지만 습격 사건 이후, 사공주는 다시는 같은 말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구염락 역시 위급한 상황에서 육영이 사공주를 껴안았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로써 사공주에게는 서풍엽을 협박할 구실이 사라진 셈이었다.

    서풍엽의 입장에서 이번 사건은 나쁠 게 없었다. 사람들에게 서풍엽은 당연히 범인일 리 없는, 공주를 호위하며 혁혁한 공을 세운 인물이었다.

    당시 서풍엽은 복면을 쓴 자객 대부분을 소탕했다. 게다가 충왕부에 최근 주목할 만한 은자의 흐름이 없다는 걸 고려하면, 그는 마땅히 의심을 피해가는 것이 옳았다.

    그러나 구염락은 알고 있었다. 서풍엽이 있던 곳은 공격과 수비가 모두 유리한 곳이었다. 이번 습격 사건의 배후로 가장 의심이 가는 인물이라면, 여러 정황상 그에게는 단연코 서풍엽이었다.

    현천기가 쏟아져 내리는 빗속에서 들릴 듯 말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

    “전하께서는 아직도 그 생각에 변함이 없으십니까?”

    “그렇다.”

    하지만 구체적인 증거를 중요시 여기는 현천기로서는 아무리 보아도 그럴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태자는 사공주와 얽힌 채로 혼인하고 싶지 않았던 서풍엽이 이 모든 사건의 주동자라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더불어 서풍엽이 얻고자 하는 것은 무엇이겠는가. 장서열과의 혼인에 대한 황제의 태도? 이를 막기 위한 황제의 계책? 아니면 반응?

    빗줄기를 바라보던 구염락이 갑자기 나른한 표정을 지었다. 긴장이 풀려 모든 일에 무관심해진 것 같기도, 혹은 더욱 냉랭해 보이기도 했다. 사실 그는 두 사람의 혼사에 황제가 어떠한 태도를 보이든 상관없었다. 만약 황제가 서풍엽의 혼사를 막더라도 그는 서풍엽의 곁에서 황제에게 혼사를 허락해 달라고 청할 생각이었다.

    구염락은 옅게 미소 짓는 장서열의 모습을 떠올렸다. 누구라도 그 눈동자에 원망이 맺히는 걸 원하지 않을 것이다.

    현천기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체 왜 저리 고집을 부리는지 영문을 알 수 없던 그가 무심코 폭우에 쓰러진 야생화를 바라보다 무언가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혹 황제께서 사공주를 이용해 서풍엽을 도발한 것이라면?’

    그러나 현천기는 곧 스스로를 비웃었다. 만약 그러한 의문이 사실이라면 자신은 세자에게 장서열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부터 다시 헤아려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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