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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3)화 (133/449)
  • 제133화

    육영이 목소리를 낮추고 서풍엽에게 다가갔다.

    “폐하께서 태자가 조정을 통제하지 못할까 염려하는 마음에 미리 태자를 위해 대비하는 것이라 추측하고 있습니다.”

    “뭐?”

    조정을 통제하지 못할 것 같은 자를 태자로 옹립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황제는 그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육영이 감개무량한 목소리로 말했다.

    “폐하로선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겁니다. 존귀한 태자가 뜻밖의 변고를 당했고, 새로 옹립한 태자는 출신이 미천하기 짝이 없으니 훗날 제위를 물려줄 때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계책이겠지요.”

    서풍엽은 속으로 실소를 금치 못했다. 어디서 무슨 배짱으로 황제의 심중을 함부로 재단하는가. 육영의 말처럼 정말로 구염락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면 애초에 황제는 그를 태자로 옹립하지 않았을 것이다.

    허나 황제는 구염락을 택했다. 이는 황제가 그에게 충분히 만족하고 있다는 증거였다.

    육영이 거리낌 없이 계속 말했다.

    “이번 개혁은 곧 조정에서 만장일치로 통과될 겁니다. 대신들이 동의하지 않아도 어쩔 수 없어요. 폐하께서는 이미 제1군의 부지를 선정하셨으니까요.”

    서풍엽은 전혀 놀라지 않았다. 그가 알고 싶은 것은 황제의 이번 결정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가였다.

    “태자 쪽 움직임은 어떠하지?”

    육영이 멈칫했다. 태자에게 무슨 움직임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는 그저 배불리 먹고 높은 자리에 오르기만 기다리면 되는 자였다. 육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답했다.

    “태자께서는 폐하와 함께 피서 산장에 계십니다. 밤낮으로 책만 보고 있다고 합니다.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합니까?”

    서풍엽이 미간을 찌푸렸다.

    ‘구염락, 무슨 속셈이지?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육영은 미간을 찌푸리는 서풍엽을 보며 그가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한다고 생각했다.

    “세자께서 생각하시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한 일이 아닙니다. 폐하께서는 어질고 유순한 태자의 앞날이 염려되어 미리 반대파를 제거하려는 겁니다. 대사마 사건 이후로 변경이 불안정해졌으니 이번 기회에 확실히 그들에게 겁을 주려는 거지요.”

    “그렇게 간단한 일일까?”

    “복잡할 게 뭐 있습니까? 폐하께서는 인의 정치를 유지할 생각이신 겁니다. 그러니 일부러 고분고분한 태자를 선택하신 거죠.”

    육영은 빈정거렸다. 어찌 고분고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구염락은 언제 태자 자리에서 쫓겨나도 이상할 게 없는 천한 출신이었다.

    “솔직히 대체 윗전에서 무슨 생각으로 그런 자를 태자로 옹립한 건지 모르겠습니다. 혹 반드시 그를 태자로 만들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 걸까요?”

    순간 서풍엽이 멈칫했다. 마침내 묘한 불안감의 실마리를 잡은 것 같았다.

    “뭐라고?”

    “전… 별말 안 했어요…….”

    문득 정신을 차린 육영이 불안한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상부의 결정에 왈가왈부하는 건 금기였다.

    서풍엽이 답답한 듯 소리쳤다.

    “아니, 방금 마지막에 했던 말을 다시 해 보란 말이다!”

    서풍엽이 정색을 하자 육영은 설마 벌을 받지는 않을 거라 여기며 쭈뼛쭈뼛 입을 열었다.

    “어쩌면 반드시 그를 태자로 만들어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 것인지…….”

    서풍엽의 눈이 반짝 빛났다. 황제가 구염락을 태자로 만들어야 할 이유. 그것은 두말할 것 없이 장서열을 며느리로 맞아 황후로 만드는 것이었다. 설령 그게 아닐지라도 황제는 이와 거의 흡사한 이유여야만 만족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구염락이 황제에게 약속한 것은 무엇인가.

    대체 구염락의 무엇이 황제를 만족시켰는가.

    서풍엽은 위험을 감지했다. 그는 반드시 내막을 파헤쳐야 했다. 황제와 구염락이 어떤 계획을 세우고 있는지를 알아야 다음의 행보를 결정할 수 있었다.

    “형님, 이렇게 늦은 시간에 공주를 이동시키는 게 과연 옳은 일일까요? 어째 주변이 갈수록 으스스해지는데요.”

    서풍엽이 여전히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공주님의 명이니 어쩔 수 없다. 설마 연경 근처에서 무슨 일이야 있겠느냐.”

    무슨 일이 일어난다면 그것은 전적으로 황제의 뜻일 것이다.

    그러나 육영은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연경을 나오자 점점 인가가 드물어졌다. 곧 지나가게 될 유명한 계곡은 밤에 지나기에는 어쩐지 음산하고 불길한 느낌이 드는 곳이었다. 육영은 역시나 사공주는 골칫덩어리라고 생각했다.

    서풍엽은 주변 지형을 살피는 것과 동시에 구염락이 황제에게 했을 법한 다짐을 추측해 보았다. 그는 황제가 장서열을 황후로 만들려는 목표를 포기했을 리 없다고 생각했다. 허나 그와 장서열의 혼사는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는 중이었고, 흠천감 역시 두 사람의 혼사가 길하다는 점사를 내놓은 후였다.

    ‘혹시 장 부인이 폐하를 찾아가 무슨 이야기라도 나눈 걸까?’

    “세자.”

    어린 환관 한 명이 다가왔다.

    “공주님께서 잠시 쉬고 싶으니 행렬을 멈추라 하십니다.”

    서풍엽과 육영이 동시에 미간을 찡그렸다.

    “돌아가 공주님께 전해라. 이곳은 낙하봉(落霞峰)이라 쉬어 가기 적합하지 않은 곳이라고.”

    곧장 달려간 어린 환관은 얼마 되지 않아 다시 뛰어와 난처한 기색으로 말했다.

    “세자, 공주님께서 말씀하시길 이곳의 이름이 낙하봉(落霞峰, 노을이 지는 봉우리)이면 분명 저녁노을이 예쁠 것이니… 노을을 보시겠다고 합니다…….”

    육영이 눈을 부릅떴다. 이곳이 어딜 봐서 노을을 감상하기에 좋은 곳인가. 군공을 세우기는커녕 여차하면 공주를 제대로 보필하지 못했다는 죄로 목이 달아날 판이었다.

    “안 된다고 전해라!”

    서풍엽이 완강히 거부하자 육영이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환관이 감히 반론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다시 뛰어갔다.

    그러나 얼마 못 가 행렬은 모두 낙하봉에서 억지로 멈춰야 했다. 마차에서 내린 사공주는 무슨 말을 해도 듣지 않았다.

    선두에 선 서풍엽은 말 위에 앉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육영은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서풍엽의 곁에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뭡니까? 이러다 들짐승이라도 튀어나오면 누구보고 책임지라고요.”

    “병사 몇을 데려가 공주님의 곁을 지켜라.”

    육영이 명을 수행했다. 그러지 않는다면 그의 벼슬길은 저 골칫덩어리에 의해 끝장이 날 것이다.

    바위에 앉아 멀리서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던 사공주의 얼굴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이를 악 문 그녀가 노기 띤 목소리로 소리쳤다.

    “서풍엽은 어디 있느냐! 당장 오라고 하라! 공주가 여기 있는데 감히 직접 호위하지 않다니!”

    허리를 푹 숙인 어린 환관과 시녀는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물론 행렬은 멈추지 않는 게 마땅했다. 하지만 사공주는 한번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므로 누구든 그에 따르는 수밖에 없다는 걸, 안타깝게도 세자만 모르고 있었다.

    말에서 내린 육영이 공손하게 손을 모으고 말했다.

    “공주님, 세자께서는 선두에서 행렬을 감찰하고 계십니다. 하여 소인에게 공주님을 호위하라 명하셨습니다.”

    화가 난 사공주가 벌떡 일어섰다. 그녀가 노기를 띤 거만한 얼굴로 발을 굴렀다.

    “당장 서풍엽을 데려와! 만일 그가 오지 않으면 이 몸이 친히 가겠다고 전하라!”

    육영이 속으로 치밀어 오르는 짜증을 눌렀다.

    “공주님, 세자께서는 바쁘십니다. 소인이…….”

    “물러가라!”

    “공주님!”

    “물러가라는 소리가 들리지 않느냐?”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 아닌 육영 또한 미칠 지경이었다. 사공주는 귀비 소생으로 그녀에게는 태자 자리를 노리던 오라비가 하나 있었다. 그러나 태자 자리는 황후가 지지하는 십삼황자에게 돌아갔다. 이제 사공주와 그 오라비의 신세는 끈 떨어진 두레박이나 다름없었다. 이렇게까지 횡포를 부릴 일이 아니었다.

    결국 육영이 서풍엽을 데려오려 막 뒤를 돌았을 때였다. 공중을 꿰뚫고 나타난 화살 하나가 갑자기 빠르게 공주의 등을 향해 날아들었다.

    즉시 달려든 육영이 공주를 바닥에 내리누른 순간, 곁에 있던 시녀의 몸에 칼날이 날아와 박혔다. 어린 시녀는 놀랄 새도 없이 바닥에 쓰러졌다. 사공주가 비명을 질렀다.

    육영은 벌떡 뛰어올라 날아오는 적의 공격을 맞받아쳤다. 갑작스러운 공격에 행렬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사방에서 적이 습격하는 가운데 육영은 사공주의 곁을 한 발자국도 떠나지 않았다.

    검광이 번뜩이고 핏자국이 난무했다. 겁에 질린 사공주는 계속해 비명을 질렀다. 조금 전까지 방자하고 제멋대로 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채 늙은 환관 뒤에 몸을 숨긴 그녀는 핏기가 사라진 얼굴로 아연실색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몸을 날린 서풍엽이 바람처럼 적을 베어 나갔다. 그가 검을 휘두르고 말에 올라타자 석양이 내려앉은 칼날에 복면을 한 자의 얼굴이 비쳤다. 자객은 서풍엽을 피해 공주에게 덤벼들었다.

    육영은 즉시 공주의 앞을 막으며 용맹하게 맞섰다. 얼마 못 가 육영은 온통 피투성이가 된 채 예닐곱 명의 적에게 포위되었다. 손에 표창을 든 자객 한 명이 기회를 노리며 육영 뒤로 표창을 날렸다. 그러나 장검으로 표창을 막아낸 육영은 재빠르게 공주를 들쳐업고 서풍엽이 있는 곳으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서풍엽 역시 사람들을 이끌고 파죽지세로 적에게 공격을 퍼부었다.

    잠시 뒤, 서풍엽 일행은 육영과 합류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한 자객은 시체 몇 구를 남겨둔 채 빠른 속도로 사라져 버렸다.

    바람이 불자 바닥에 흥건한 피비린내가 코끝을 자극했다. 서풍엽이 살짝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추격하지 마라. 바닥에 있는 핏자국을 없애고 즉시 이곳을 떠난다.”

    피비린내는 필시 들짐승을 부를 것이다.

    시위들은 육영의 품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사공주를 강제로 마차 안에 밀어 넣고 재빨리 그곳을 떠났다. 이렇듯 위험한 상황에서까지 공주의 생떼를 들어줄 순 없었다.

    적을 추격하는 것도 적합하지 않았다. 공주가 있는 이상 조금이라도 변고가 생긴다면 누구도 책임을 면할 수 없었다.

    서풍엽은 다시 돌아오는 육영을 바라보았다. 전신을 덮었던 핏자국을 지우고 팔뚝의 상처 또한 이미 붕대로 감은 후였다. 안색이 조금 창백한 것을 제외하면 멀쩡한 모습이었다.

    조금 전 육영의 품에 안겨 있던 사공주를 떠올리며 서풍엽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모든 게 해결되었다.

    서풍엽이 이내 심각하게 물었다.

    “보이느냐?”

    육영이 인상을 잔뜩 찌푸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일부러 공주를 노리고 습격한 자들입니다. 아무리 낙하봉이 연경 밖에 있지만 그래도 천자와 지척에 있는 곳인데 감히 자객이 날뛰다니요. 저와 칼을 겨누었던 몇 명의 무예는 연경의 것이 아니었습니다. 형님, 이건 혹시…….”

    두려운 표정의 육영이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서풍엽이 진지한 얼굴로 깊은 생각에 잠겨 말했다.

    “그럴 가능성이 있지만 그들에게는 공주를 공격할 이유가 없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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