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2화
‘내게서 뭘 배운다는 거지? 남자의 환심을 사는 방법?’
약연은 속으로 조소했다.
“어서 일어나세요. 자매끼리 이러지 말아요. 부인의 아이는 제 아이나 마찬가지예요. 부인만 괜찮다면 제가 데리고 있다가 훗날 좋은 상대를 골라 시집을 보내도록 해 볼게요.”
기 씨가 마침내 찡그린 미간을 펴고 기쁜 목소리로 외쳤다.
“감사합니다, 부인! 정말 감사해요!”
드디어 좋은 날이 왔다. 일이 제대로 풀리기만 한다면 조옥언과 국공부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태자의 친모를 뒷배로 둔 이상 모든 게 그녀의 것이었다. 기 씨의 눈이 빛났다. 자신이야말로 장신성의 진정한 부인이었다.
한편, 장서열은 신불 앞에 향을 피워 올리고 등잔에 기름을 채워 넣는 충왕비를 부축하고 있었다. 그녀는 충왕비의 기대에 찬 눈빛 아래 신중하게 제비를 뽑았다. 뽑는 내내 장서열은 감히 신불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상상(上上)’이라는 두 글자에 비로소 충왕비가 안도하며 말했다.
“잘됐구나! 정말 잘 됐어. 지성이면 감천이라지. 우리 풍엽이는 분명 위험을 만나도 전화위복의 기회로 만들어 무사히 돌아올 거야.”
충왕비가 장서열의 손을 끌어당겼다.
“자, 이제 혼인 후 너희가 이 본궁에게 언제쯤 떡두꺼비 같은 손자를 안겨 줄지 점사를 보자.”
“왕비마마…….”
장서열이 쓴웃음을 지었다. 다행히 그녀는 낯이 두꺼운 편이었다. 그녀는 서풍엽의 안전은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다. 그는 결코 요절하는 왕이 아니었다.
“그래, 그래. 우리 서열이가 부끄러운가 보구나.”
충왕비는 위풍당당하게 일행을 이끌고 해암당(解庵堂)에 도착했다. 경사스러운 일을 접한 사람처럼 몹시도 기분 좋은 표정이었다.
‘그럼 그렇지.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한 거야.’
이윽고 일행은 다시 기분 좋은 모습으로 해암당을 나왔다.
“어라? 서열아. 서열이는?”
뒤따라 나온 장서열이 충왕비의 팔을 잡으며 말했다.
“여기 있습니다. 혼자 즐거워하시느라 저를 잊고 가셨네요.”
충왕비가 그녀를 달래듯 손을 잡고 함박웃음을 지었다.
“그럴 리가. 나를 잊을지언정 어찌 너를 잊고 가겠니.”
밖으로 나온 두 사람이 해암당에서 아주 멀어졌을 때, 그제야 장서열은 이해할 수 없다는 시선으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충왕비가 해암당을 나선 뒤 막 그녀가 뒤를 따르려 할 때였다. 한 비구니가 갑자기 장서열을 붙잡았다.
“만사에 마음을 편히 가지십시오.”
장서열은 이해할 수 없었다. 자신은 이미 충분히 마음 편히 살고 있었다. 마음을 편히 먹지 못할 이유도 없지 않은가.
“뭘 보니?”
“아닙니다.”
갑자기 충왕비가 장서열의 귓가에 바싹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소문에 태자의 생모가 여기서 수행을 한다는구나.”
그리고는 다시 소곤거렸다.
“대체 어떤 여인이기에 그토록 제왕을 치 떨리게 만든 걸까.”
허락 없이 황제의 아이를 낳는 건 금기였다. 그걸 해낸 여인이라면 얼마나 무서운 사람일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무언가를 떠올린 장서열이 입을 가리고 싱긋 웃었다. 마치 충왕비의 말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어차피 그녀는 두 번 다시 그 음흉한 시어머니를 모실 일이 없었다.
말을 마친 충왕비는 인생이 참 덧없다고 생각했다.
‘태자를 낳았으면 뭐하나. 그래 봐야 국사에 갇혀 있는 처지인 것을. 아마 평생을 그리 살겠지.’
등잔불을 벗 삼아 홀로 의미 없는 밤을 지새운다면 아무리 뛰어난 절세미인이라도 언젠가는 빛이 바랠 것이다. 충왕비가 연민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인생이란 알 수 없는 거야…….”
장서열은 충왕비에게 의아한 시선을 던졌다. 앞으로 구염락의 친모 앞에 펼쳐질 반평생은 어느 누구의 연민도 필요 없는 삶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구염락의 친모에게 재기할 가능성이 없다고 여겼다. 그녀에게 대주국 최고의 아들이 있다는 사실을 놀라울 정도로 잊은 듯했다.
“그렇지요. 하지만 언젠가 이곳을 나가 모든 이에게 절을 받는 사람이 될 수도 있습니다.”
황급히 장서열의 입을 가로막은 충왕비가 사방을 둘러보며 시녀들을 멀리 물렸다.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함부로 말하면 안 돼. 아직 황후마마께서 계시잖니.”
장서열이 다시 한번 의아한 시선으로 충왕비를 바라보았다.
‘아직이라니?’
이 말은 충왕비 역시 구염락의 친모가 득세할 수 있다는 걸 짐작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녀가 의아한 얼굴의 예비 며느리에게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왜 그러니? 과거 황제에게 죽을 뻔한 황자에게 부모에 대한 공경심이 뭐 얼마나 있겠니. 하물며 그런 밑바닥 출신인데, 품위 있게 법도를 지킬 리가 없지.”
충왕비가 한껏 비꼬았다.
장서열은 동요했다. 씁쓸하게도 이제야 이해가 되는 기분이었다. 구염락이 어째서 세상 사람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기어이 생모를 황궁으로 데려왔는지. 그녀 또한 전생에서 갖은 고생을 겪어 보았기 때문에 이제는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왕비마마는 어째서 금세 알아챈 걸까?’
장서열은 충왕비에 대해 말을 아끼던 어머니의 모습, 그리고 이상할 정도로 왕비라는 신분에 애착을 보이는 충왕비의 모습을 동시에 떠올렸다. 아마 유년 시절 충왕비에게도 씁쓸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장서열이 가장 놀란 건 충왕비의 말에 담긴 확신과 구염락을 향한 경멸이었다.
세상이란 이런 것이었다. 앞으로 구염락이 뛰어난 모습을 보일수록 그의 결점은 암암리에 더욱 널리 퍼질 것이다. 구염락이 권세가들을 경멸하는 것도 당연했다. 하지만 그는 소문이 사라질 때까지 그냥 내버려 두었다.
장서열은 충왕비가 자신을 가족으로 생각하기에 하는 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럼 왜 가서 말을 걸어보지 않으세요?”
“귀찮다. 인사하러 갈 수도 있고 모르는 체할 수도 있지. 문제는 그녀가 식견이 짧은 사람일 수도 있다는 거야.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의도가 있다고 오해를 살 수 있어.”
충왕비가 도도하게 발걸음을 옮기며 이어 말했다.
“가자. 머리 아픈 이야기는 관두고.”
‘식견이 짧다’라……. 물론 처음에는 그렇게 보일 수 있지만 구염락의 생모는 학습에 능했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외모를 갖고 있었다. 마지막에는 조정에서도 그녀를 비난할 수 없었으며, 결국 그녀는 궁에 거처를 마련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니 충왕비의 말이 맞는 셈이었다.
인생이란 정말 알 수 없는 것이다.
과거 장서열은 구염락의 모친을 싫어했고 그녀 역시 장서열을 싫어했다. 어떤 이유도 없이 첫 눈에 그렇게 되었다.
* * *
세월은 꿈결처럼 눈 깜짝할 새에 빠르게 지나갔다. 뜨거운 태양이 쏟아졌고 대주국 절반의 영토가 찌는 듯한 여름에 접어들었다. 매미가 울고 물안개가 피어올랐다. 안개와 노을 속에서 가벼워진 비단 옷차림은 부드럽고 아름다운 빛을 냈다.
남방 지역의 가뭄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었다. 조정 안팎으로 백성을 이주시키는 정책이 만장일치의 동의를 얻어 시행되었다. 시간이 지나 남방의 가뭄은 안정세에 접어들었고, 인명 피해 없이 정책은 일사불란하게 진행되었다. 남은 것은 피해 복구와 수리시설 정비였으나 이는 더 이상 서풍엽이 관여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붉은 구름으로 뒤덮인 밤, 서풍엽은 몰래 남방으로 도망친 사공주(四公主)를 데리고 연경으로 되돌아갔다. 그는 연경성에 들어서자마자 사공주에게 휴식을 취하게 한 뒤, 시위를 통해 황궁으로 모시라 이르고 곧장 말에 올랐다. 사무치게 그리운 이를 보러 가기 위함이었다.
갑자기 사공주가 마차의 휘장을 걷었다. 황제의 위풍당당한 모습과 꼭 닮은 얼굴로, 그녀가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서풍엽! 어디 한 발자국만 떼 보시오! 내 아바마마께 고하여 당신의 머리를 벨 것이오!”
사공주는 서풍엽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공주를 이렇게 내팽개치고 가는 자가 어디 있는가. 그녀는 그가 자신을 그 정도로 싫어한다고 믿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서풍엽은 오는 길에 그녀를 한 번도 거들떠보지 않았다. 과거 그녀에게 아바마마의 기세를 닮았다고 칭찬했던 일을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를 구하는 일이 그렇게 난처할 리 없을 텐데도 그는 오는 길 내내 자신과 말 한마디 섞지 않았다.
서풍엽은 뒤돌아 공손하게 머리를 조아리며 말했다.
“공주마마, 소신의 임무는 끝났습니다.”
“그래서요? 날 여기에 내팽개치고 가겠다 이 말입니까? 당신은 나와 함께 아바마마를 뵈러 갈 겁니다.”
사공주에게 서풍엽은 자신의 몸을 만진 남자였다. 고개 숙인 서풍엽의 눈이 살짝 싸늘해졌다. 사공주가 지금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는지 눈치채지 못할 정도였다면 그는 오늘날 국정에 참여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서풍엽은 사공주를 분명히 거절했다. 하지만 사공주는 끈질기게 매달렸고, 철없이 타인을 다그쳐 모욕을 줬다. 높은 신분을 타고난 사람들은 이게 문제였다. 과도한 자신감에 얌전하게 굴지를 못하고 언제나 사고를 치기에 바쁘니, 그야말로 병이 아닐 수 없었다.
서풍엽은 몸을 일으켜 말에 올라탔다.
“공주께서 요구하시니 그럼 소인이 피서지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사공주의 입가에 승리의 미소가 떠올랐다. 세련된 차림을 한 그녀가 거만한 뺨을 치켜들고 떼를 쓰듯 말했다.
“그래야지.”
서풍엽은 무표정했다.
호위 수령 육영(陸永)이 동정하는 눈길로 상사인 서풍엽을 바라보았다. 서풍엽은 이를 못 본 척 그에게 말했다.
“좋은 일이 생길 테니 이따 나를 따라와라.”
사공주는 서풍엽이 자신을 구하기 위해 팔을 ‘잡아당긴’ 것을 ‘만진’ 것이라 우기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단 말이지?’
서풍엽이 육영에게 덧붙여 말했다.
“바짝 따라붙어라. 단번에 네 신분이 상승할 기회가 올 것이다.”
육영이 눈을 반짝였다. 연경에서 수령까지 올랐으니 그 또한 한미한 집안의 출신은 아니었다.
“형님, 정말입니까? 군공을 세울 기회인가요?”
“그래. 어마어마한 기회를 얻게 될 거다.”
서풍엽이 말에 올라 등자(鐙子, 말을 탈 때 두 발로 디디게 되어 있는 것)를 세 번 밟았다. 무리는 다시 길을 나서기 시작했다. 육영이 뒤를 바짝 따르며 말했다.
“형님, 남방은 무척 아름답죠? 미인도 많고요.”
“글쎄.”
육영이 고개를 젖히고 하하 웃다가 장서열의 아름다운 모습을 떠올리며 탄식했다.
“형님이야 형수님이 계시니 평범한 여인들은 당연히 눈에 들어오지 않았겠죠. 하지만 형님, 이 아우의 곁엔 아직 아무도 없으니 제게…….”
“뒤에 귀한 분이 계시니 경을 치기 전에 말 조심하거라. 헌데 폐하께서는 어째서 최근에 군정을 개혁하려 하시지?”
외부에서의 오랜 생활로 서풍엽은 그간 밀정에게 자세한 보고를 받지 못한 상태였다. 웃음기를 거둔 육영이 생각에 잠겨 말했다.
“군부의 반응이 대단합니다. 병부상서는 위지 전(前) 대사마의 수하입니다. 대사마가 실각했으니 당연히 찍소리도 낼 수 없지요. 이는 폐하의 조치에 조정 대신 절반은 동의한다는 뜻입니다. 변경에서는 사태의 추이를 지켜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