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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31)화 (131/449)
  • 제131화

    황제가 내린 병론을 펼친 현일이 엄숙하게 표정으로 읽다가 마지막에는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병론을 덮었다. 그는 병론을 현천기에게 건넸다.

    현천기는 병론의 필체를 보며 별로 달갑지 않은 여인을 떠올렸지만 곧 그 내용에 매료되었다. 구염락의 말이 떠올랐다. 역사는 끊임없이 반복되고 사람은 언젠가 죽는다. 이야기는 잊혀지는 법이지만 도리만큼은 변하지 않는다. 그는 세상 이치와 도리를 깨닫기만 하면 이 넓은 천하에 도모하지 못할 일이 없다고 했다.

    현천기가 구염락을 따른 건 이때부터였다. 그와 함께 병론을 바탕으로 천하를 누비며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현천기는 벌써부터 온 세상이 마치 자신의 것이 된 것만 같았다. 구염락은 치밀하고 주도면밀한 인물이었다.

    현천기는 황제와 아버지의 대화에 흥미가 없었다. 노인들은 언제나 일을 복잡하게 생각했다. 그들은 마치 하나하나 세세하게 분석하지 않으면 그 속에 숨겨진 음모를 가려낼 능력이 없는 사람처럼 굴었다.

    그러나 현일은 황제의 일거수일투족에서 그의 속내를 꿰뚫어 보는 사람이었다. 그건 현천기가 구염락의 앞에서 쓸데없는 말을 하지 않는 것과 비슷했다. 현천기가 본 구염락은 말보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결과물을 중시 여겼다.

    뚫어져라 병론을 바라보는 현천기의 눈빛이 이글이글 타올랐다. 그는 하마터면 가면을 뚫고, 숨겨 왔던 속내를 모두 드러낼 뻔했다.

    태자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태자의 일등 친위대인 그 역시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하루 속히 호부(戶部)가 쥔 권력을 손에 넣어야 했다.

    현천기는 헌원가의 비협조적인 태도를 떠올리며 입가에 비열한 웃음을 올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굴복시킬 것이다.

    ‘당자를 좋아한다……?’

    당자의 얼굴 가죽을 가면으로 만들려면 아무리 빨라도 한 달은 족히 걸릴 것이다. 가면을 쓰고 어린 아가씨를 속이는 건 식은 죽 먹기였다. 현천기는 일을 단숨에 해치우리라 마음먹었다.

    * * *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권세에 눈이 먼 이들처럼 몹시도 싸늘한 바람이었다.

    초목이 우거진 곳에는 사원이 자리하고 있었다. 연경 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국암사(國庵寺)는 한창 향불을 피울 시간이면 희미한 연기가 온 사원을 뒤덮고 있어 고요하고 성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충왕부의 행렬이 국가의 제1사원인 국암사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장서열의 손을 꼭 잡은 충왕비가 안절부절못하며 말했다.

    “왜 그런지 모르겠으나 요즘 밥도 잘 안 넘어가고 잠도 잘 안 오는구나. 아무래도 나쁜 일이 생길 것만 같아. 서열아, 혹시 풍엽이에게 무슨 일이 있는 게 아닐까?”

    충왕비의 말에 장서열의 얼굴에도 근심이 어렸다.

    “걱정 마세요, 왕비마마. 착한 사람은 하늘이 돕는다 했으니 세자께 무슨 일이 생겼을 리 없습니다. 감찰사(監察史)가 지원을 나갔으니 머지않아 돌아올 거예요.”

    충왕비가 가슴을 쓸며 말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구나. 하지만 역시 마음이 놓이질 않아. 향불을 올려 부처님의 가호를 청해야겠다.”

    충왕부의 마차는 온 나라를 통틀어 흔치 않은 물건이었다. 화려한 지붕과 백 명이 넘는 의장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는 하인들의 행렬은 황실 버금가는 위용을 자랑했다.

    충왕부가 움직이는 이날 국암사는 깨끗하게 정돈되었고 산길은 모두 봉쇄되었다. 깨끗하게 청소한 사원의 입구에는 덕망 높은 승려들이 모두 나와 충왕비의 행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혹여라도 귀빈을 놀라게 하는 일이 없도록 사원에서는 미리 죄인에게 감시인을 붙여 자리를 이탈하지 못하게 했다.

    기 씨는 어린 비구니가 화장실을 간 틈을 타 평소 친분이 있던 약연(若然)을 데리고 몰래 빠져나왔다. 산중턱에 도착한 그녀는 위풍당당한 충왕부의 행렬을 엿보았다.

    여섯 대의 마차는 갑옷을 입은 의장대와 함께 거침없이 국암사의 입구를 통과했다.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긴 행렬은 가운데 놓인 마차를 둘러싸고 있었는데, 마차의 외부는 구슬과 옥, 비단으로 장식되어 화려하고 장엄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모서리마다 장식된 작은 두꺼비는 커다란 야명주를 입에 물고 예사롭지 않은 광채를 뿜어냈다.

    관목 사이로 몸을 숨긴 기 씨의 상한 얼굴에 번뜩이는 원한이 스쳐 지나갔다. 기 씨가 이내 공손한 모습으로 곁에 있는 여인에게 웃어 보였다.

    “부인, 저기 오는 사람이 바로 충왕비예요.”

    기 씨는 이 지긋지긋한 사원에서 너무나도 나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눈앞에 선 여인의 비위를 맞추는 것만이 유일한 방법이었다.

    아리따운 자태의 약연이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멀어지는 의장 행렬을 바라보았다. 넋을 잃은 그녀의 눈동자에 아가씨들의 비단옷이 일렁거렸다. 그녀는 국암사에서 머문 지난 칠 년 동안 회색 이외에 어떠한 색채도 보지 못했다.

    시선을 거둔 약연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아름다운 미소를 지었다.

    “부유하고 고귀한 태생의 여인들이군요……. 어찌나 부러운지…….”

    만일 자신 역시 저들과 같은 신분이었더라면 그는 절대로 자신을 하찮은 바둑돌처럼 취급하지 않았을 것이다. 약연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녀는 여전히 고요했다.

    기 씨가 즉시 허리를 구부리며 아첨했다.

    “부인, 아무도 부인의 고귀함에 견줄 수 없습니다. 저들과 부인을 비교하지 마세요. 곧 세상의 모든 화려한 마차가 부인의 것이 될 겁니다.”

    빙그레 웃은 약연이 온화한 눈길로 먼 곳으로 사라지는 의장 행렬을 바라보았다.

    “제 큰아들이 말하기를 열셋째 황자가 태자로 봉해졌다고 해요. 부인께 곧 좋은 소식이 올 겁니다.”

    기 씨가 음흉한 속내를 감추며 말했다.

    ‘조옥언, 내 비록 이런 곳으로 보내졌지만 끝까지 살아남을 것이다.’

    게다가 이렇듯 대단한 인연도 얻었으니 조옥언도 더는 어찌할 수 없을 터였다. 기 씨는 조옥언이 가진 것을 하나하나 빼앗으리라 다짐했다.

    약연은 마치 기 씨의 생각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듯 그녀를 쳐다보다 곧 자신과 관계없는 일인 양 시선을 거뒀다.

    “그 아이의 부귀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겠어요.”

    말을 마친 약연은 뒤돌아 자리를 떠났다. 기 씨가 허겁지겁 그 뒤를 쫓았다.

    어찌 상관이 없겠는가. 사원의 비구니들은 약연을 결코 함부로 대하지 않았다. 심지어 물을 길러오지 않아도 아무도 그녀를 해코지하지 않았다. 이를 지켜본 기 씨는 깨달았다. 아직 시기가 도래하지 않았을 뿐, 때가 되면 약연은 분명 존귀한 몸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부인! 천천히 가세요! 그러다 넘어지기라도 하면…….”

    “악!”

    놀란 기 씨가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입방정을 떤 꼴이었다. 황급히 달려간 기 씨는 약연의 버선을 벗기고 바닥에 꿇어앉아 그녀의 발에 침을 발랐다. 기 씨가 아첨하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부인? 저희 부모님께서 그러셨어요. 이렇게 하면 소독이 돼서 아프지 않다고요. 금방 좋아질 거예요.”

    약연은 별 것 아닌 일로 호들갑을 떨며 충성을 다하는 기 씨를 저지하지 않았다. 굳이 고결하게 굴 필요는 없었다. 가끔은 상대에게 아첨할 기회를 주는 것도 시주(施主, 자비심으로 남에게 조건 없이 베푸는 것)와 다름없으리라.

    오늘 기 씨의 모습은 예전의 자신과 많이 닮아 있었다. 과거 그녀는 자존심을 버리고 한 남자를 받들었지만 결국엔 다른 남자의 품속으로 떠밀어졌다.

    그가 잠결에 부른 여인의 이름은 ‘옥언’이었다. 그 여인은 그것만으로 삶의 의미가 있을 것이다. 세상에 그토록 자신을 아껴주는 남자가 있다면 그것으로 족하지 않은가.

    고개를 든 기 씨가 정성을 다해 약연에게 버선을 신겨 주었다.

    “부인은 발도 참 향기롭네요.”

    싱긋 웃는 약연의 모습은 주변의 꽃들마저 무색하게 할 정도로 곱고 아름다웠다. 갑자기 흥미를 느낀 듯 약연이 돌연 기 씨에게 물었다.

    “당신네 정실부인은 정말 그리도 가혹하고 무자비한 사람인가요?”

    그 말에 약연을 부축하던 기 씨가 눈물을 보이며 한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기 씨는 드디어 기회가 왔음을 알았다.

    “전 정실부인보다 아이를 두 명 더 가졌을 뿐이에요. 그런데 그녀는 제 복중 아이를 죽였지요… 게다가 얼마 전 소식을 하나 들었는데…….”

    기 씨가 갑자기 얼굴을 감싸 쥐고 울기 시작했다. 비통한 울음소리는 도저히 가짜처럼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제 딸아이를 외실의 아들에게 시집보내려 한대요. 그 아이는 사실상 부친이 누군지도 모르고요. 대체 그녀는 무슨 속셈으로 제 딸에게…….”

    그러나 기 씨는 순간 자신이 말실수를 했다는 것을 깨닫고 황급히 다시 바닥에 꿇어앉았다.

    “부인, 부탁 한 가지만 해도 될까요? 제 딸아이에게 살길을 마련해 주세요. 저는 제 딸이 저처럼 살기를 바라지 않아요. 잘 알지도 못하는 이에게 시집을 가서 저와 같은 고생을 하게 할 순 없어요!”

    말을 하며 기 씨는 살짝 약연을 쳐다보았다. 약연이 귀를 기울이는 듯 보이자 기 씨는 더욱 대담하게 말했다.

    “제 딸아이는 좌상부 장 씨 가문의 딸이랍니다. 저보다 훨씬 뛰어난 아이예요. 제1교방에서 금과 바둑, 서예, 서화를 배웠고 시문을 짓는 데도 능통해요. 특히 서책을 즐겨 읽는답니다. 제 딸아이는 부인께서도 본 적이 있으실 거예요. 잘 생각해 보세요…….”

    약연은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얼핏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서녀 같지 않게 적녀의 분위기를 지닌 예쁘장한 아가씨였다.

    “네.”

    절박한 모습으로 약연의 발치로 기어간 기 씨가 서둘러 말했다.

    “부인! 부디 제 딸을 거둬 주세요. 제가 부인의 노비가 되어 평생을 모시겠습니다. 만약 제 딸에게 복을 내려 주신다면 그 아이를 낳은 일이 결코 헛되지 않을 거예요.”

    기 씨가 다시 얼굴을 묻고 흐느껴 울었다.

    그러나 약연은 그리 호락호락한 사람이 아니었다. 현재 기 씨가 벌이고 있는 농간은 과거 그녀 역시 모두 해 본 것들이었다. 만약 생사가 걸려 있는 일이었다면 기 씨는 죽음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이러한 연기 실력으로는 어림없었다.

    그러나 이 단조롭고 지루한 사원에서 답답한 마음을 해소할 수 있는 건 기 씨를 받아 주는 일뿐이었다.

    게다가 앞으로 정말 아들에게 효도를 받을 기회가 온다면 기 씨를 돕는 건 스스로를 돕는 일이 될 것이다. 어쨌든 다른 선택권이 없는 지금, 기 씨의 충성을 받아 주는 건 불가피한 일이었다. 어차피 여자아이 한 명이지 않은가. 아들의 곁에 둔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 것이다. 그녀는 아들이 그 정도로 멍청할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약연의 눈에 한줄기 눈물이 흘렀다. 딱 맞추어 약연이 기 씨를 부축하며 말했다.

    “정말 가여운 아이네요. 안타깝게도 저는 현재 형편이 좋지 못 하니 차라리…….”

    “아닙니다, 부인! 아니에요! 부인께서는 훌륭하신 분이에요. 암요. 우리 서영이가 부인을 모실 수만 있다면 그건 엄청난 복이에요. 딸아이는 부인에게 많은 걸 배울 수 있을 거예요. 부인, 제 딸을 꼭 거둬 주세요. 서영이 대신 제가 절을 올릴게요.”

    기 씨는 바닥의 가시덤불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얼른 무릎을 꿇고 앉아 바닥에 쿵쿵 머리를 찧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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