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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후중생계 (129)화 (129/449)
  • 제129화

    장서열은 초목이 우거진 뜰을 바라보고 있었다. 세상은 새로운 태자 책봉에 환호하는 중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오직 녹음으로 뒤덮인 풍경만을 바라보았다.

    비단 속 서신을 손에 쥔 그녀가 만면에 웃음을 지어 보였다. 서풍엽은 남쪽 지방이 가물고 민심이 흉흉하다고 했다. 그는 하마터면 조정에 재해 상황을 알리기도 전에 백성들에 의해 진흙 속에 처박힐 뻔했노라 이야기하고 있었다.

    서신은 담담했다. 서풍엽은 간략하게 정사를 논한 후 곧 남쪽 지방의 풍경과 그녀에 대한 깊은 그리움으로 모든 내용을 가득 채웠다.

    장서열은 선반 밑에 놓인 의자에 걸터앉았다. 그의 애정은 이전까지 느껴본 적 없는 충만함을 선사했다. 누구라도 수년간 극진한 대접을 받는다면 마음이 쏠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장서열은 비록 간략히 쓰였지만 눈에 그려지는 재해 상황을 떠올렸다. 서풍엽은 아마 위협을 당했던 것이리라.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서신 내내 녹음이 우거진 뛰어난 풍경을 구구절절 늘어놓았을 것이다.

    장서열은 백성들에게 비난을 받고 눈살을 찌푸리는 서풍엽의 모습을 상상했다. 하지만 그는 설령 백성들에게 이리저리 잡아 뜯기다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력을 사용할 사람이 아니었다. 그를 추종하는 여인이 끊이지 않는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서풍엽은 너무나 눈이 높았고, 그녀들이 갖은 수를 써도 절대 넘어가지 않았다.

    지필묵을 들고 다가온 농교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가씨, 세자께서 아가씨의 서신을 받으면 이를 봄비로 여기고 정말 스스로를 땅에 묻으려 할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재해 상황을 조정에 알리려는 백성들의 소원이 이루어질 테니 일석이조인 셈이죠.”

    장서열에게 부채를 부쳐주고 있던 완정이 입을 가리고 웃으며 한마디 했다.

    “설사 흙에 묻혀 계신다 해도 아가씨의 서신을 받으면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 돌아오실걸요?”

    장서열은 왠지 마음이 스산했다. 이 얼마나 근심 없는 대화인가. 그녀는 안락하고 편안한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같은 시각 서풍엽은 몹시 애를 먹으며 정신없는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붓을 잡은 장서열은 연애 감정을 논할 새도 없이 한 문장을 적었다.

    「이민취식(移民就食, 이재민을 양식이 비축된 지역이나 토지가 광활한 지역으로 이주시킨 뒤 양식과 물자를 보내어 생활을 안정시키는 중국 고대의 구제 방법)

    대주국은 그동안 많은 물자를 비축해 왔으니 분명 백성을 구제하는 데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녀는 사실 이민취식에 대해 아는 바가 극히 적었지만 전생에서 구염락이 이 방법을 활용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재난이 일어나기 전 예방책을 마련하고, 이재민을 구휼하고, 농작물을 보호하는 일은 모두 장기적인 준비가 필요한 것으로 당장 절박한 시기에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보다 못한 구염락은 문관들을 한바탕 꾸짖은 뒤 즉시 그 자리에서 ‘이민취식’을 결정했다. 그리고 덧붙였다.

    “짐이 재난을 평정했다고 기록하라.”

    구염락은 그런 남자였다. 구염락이 가장 밉살스러웠을 때를 꼽는다면, 그건 식견이 얕고 총애를 다툴 줄만 아는 그녀를 한껏 얕잡아 볼 때였다.

    하지만 지금 그녀에게는 얕은 식견은 안중에도 없이 그저 덮어놓고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이 있었다.

    ‘어서 돌아와요.’

    * * *

    피서지에 와 있던 장서전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비록 자기 입으로 뛰어나다고 말할 순 없었지만 그는 분명 모자란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태자는 친위대에 자신을 선발하지 않았다.

    ‘설마 서열이와 자리를 마련해 달라던 부탁을 들어주지 않은 것 때문인가? 그래도 공과 사는 구분해야지!’

    장서전은 생각 끝에 깨달았다. 그런 유치한 일이 이유일 리 없었다. 오히려 과거의 해묵은 앙금이 남아있을 가능성이 컸다.

    이제 구염락은 명실상부한 대주국의 태자였다. 만약 그대로 구염락이 마음을 풀지 않는다면 장서전에게는 출세를 향한 모든 길이 막히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강해지기 위해 밤낮으로 고생한 노력이 모두 물거품이 될 것이다.

    장서전은 혼삿길이 막히는 건 전혀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어머니와 누이동생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교대 근무를 마치자 저녁노을이 내려앉았다. 과연 피서지답게 서늘한 공기가 느껴졌다. 장서전은 곧바로 내전으로 향했다. 태자에게 확실한 대답을 듣고 싶었다.

    태자의 침전은 무장한 시위들과 하인들로 가득했다. 정자와 누각은 화려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의 처소는 최근 황제가 태자에게 내린 것으로 낡은 느낌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장서전은 인생의 무상함을 느꼈다. 과거에 자신이 괴롭혔던 비천한 아이가 이제는 그를 괴롭힐 수 있는 존귀한 태자가 되어 있었다.

    잠시 뒤, 소리자가 친히 나왔다.

    “태자 전하께서 잠시 기다리라 하십니다.”

    말을 마친 소리자는 자리를 떠났다.

    장서전은 구염락이 얼마나 바쁜지를 다시 한번 실감했다. 오가는 신하들 사이에는 친위대도 섞여 있었다.

    친위대 중 장서전이 아는 이는 한 명도 없었고 심지어 귀족 자제조차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모두 이상할 정도로 침묵을 지키며 뜰을 오갔다. 그 모습에 장서전은 문득 살을 에는 듯한 한기를 느꼈다. 그들은 어떤 것에도 관심 없이 그저 야심으로 가득 찬 새까만 눈을 하고 있었다.

    몸서리를 치던 장서전은 갑자기 자신감이 사라지는 걸 느꼈다. 그 순간 친위대 중 낯익은 자가 한 명 눈에 띄었다. 누구도 예상치 못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평소 말수가 적었고 사람들과 교류가 거의 없었다. 전해 듣기로 그의 삶은 기구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친을 여의었고 중병이 든 어머니가 있었다. 사나운 여인을 아내로 맞이한 큰형으로 인해 일찍 집을 떠난 것도 모자라, 그의 큰 누이는 은자 열 냥에 몸을 팔아 한 사내의 첩실로 들어갔다. 그 돈은 어머니의 하루치 약값이 되었다.

    그에게는 누이동생도 있었다. 그녀의 정인은 가난한 서생이었기에 결국 그녀는 늙고 돈 많은 영감의 후처로 들어갔다. 그녀는 매달 영감을 어르고 달래 많은 생활비를 받아냈지만 영감 슬하의 자식들이 반발하여 최근 서로 다투기에 여념이 없었다.

    엉망진창인 그의 개인사는 장서전에게는 불가사의하고 낯선 영역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고, 장서전 역시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먼저 말을 걸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그가 친위대에 들어갔다는 소식이 전해졌을 때 모든 이들이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는 결코 무예가 출중한 자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자의 최정예 부대가 된 것이다.

    장서전은 답답한 마음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낯익은 얼굴을 본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그는 한 달 새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날이 선 검처럼 그는 다른 친위대와 똑같이 전신에 어두운 기운을 풍겼다. 장서전을 발견한 그는 잠시 멈칫했다가 곧 표정을 풀고 싱긋 웃어 보였다.

    장서전의 몸이 돌연 부르르 떨렸다. 갑자기 구염락을 만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그는 비로소 이해할 수 있었다. 구염락은 신분이 높고 능력이 뛰어난 친위대를 원한 것이 아니다. 그는 미치도록 부귀영화를 바라는 자, 이를 위해 어떠한 대가도 치를 수 있는 자를 원한 것이었다.

    오늘 본 친위대는 모두 전장의 불벼락 속에서도 망설임 없이 갑옷을 벗고 전진할 수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에게는 생사보다 성공이 우선이었고, 전장에서 공로를 세울 수 있다면 모든 걸 잃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소리자가 말을 건네자 그는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몸을 돌려 자리를 떠났다. 그를 보낸 소리자가 다시 종종걸음으로 달려와 장서전에게 허리를 굽히고 말했다.

    “전하께서 들라 하십니다.”

    잠시 멈칫한 장서전이 무의식적으로 한 발 뒤로 물러섰다. 그는 불현듯 자신이 또 어리석은 짓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았다.

    소리자는 여전히 허리를 굽히고 서 있었다. 마침 그는 앞으로 자신이 영원히 허리를 펴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던 참이었다.

    “안으로 드시지요.”

    장서전은 결국 태자를 만났다. 구염락은 금색의 이무기가 수놓아진 태자복을 입고 있었다. 옛 친구를 마주한 장서전은 본래 하려던 말을 꺼낼 낯이 없어 애매모호한 말 몇 마디를 꺼낸 뒤 맥없이 물러났다.

    장서전은 자신의 도량이 좁았음을 깨달았다. 만일 구염락이 정말 자신에게 앙금이 남아 있다면 매번 자신을 만나 줄 이유가 없었다. 그는 결국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은 태자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는 바깥의 수많은 이들보다 가치가 없는 사람이었다.

    한편 구염락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소리자를 바라보았다.

    “장서전은 왜 저러는 것이지? 태자가 된 걸 축하하기 위함인가?”

    구염락의 말투에는 비웃음이 가득했다. 그러나 소리자는 감히 함부로 말할 수 없었다. 상대는 장서열의 오라비였다.

    “아마 전하가 그리웠던 것 같습니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구염락의 눈길이 소리자를 향했다. 조금 전 무료한 얼굴로 장서전을 바라볼 때와는 다른 얼굴이었다. 소리자가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노비는 그런 뜻이 아니옵고… 장 도련님께서 오랫동안 전하를 뵙지 못하여 만나 뵈러 온 것이 아닌지…….”

    구염락이 비웃으며 소리자의 말을 끊었다.

    “장서전은 내가 앙심을 품고 있을까 걱정되어 나를 떠보러 온 것이다.”

    소리자가 즉시 입을 다물었다. 전하의 말은 곧 법이었다.

    구염락이 반쯤 뒤집어 놓았던 상소를 다시 읽기 시작했다. 그는 전부 읽은 뒤 한쪽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문장이 지나치게 번잡했다.

    * * *

    다음날, 상소를 재검토하던 황제는 구염락이 반절 이상에 ‘재미없다’, ‘쓸모없다’, ‘시시하다’란 평을 내린 것에 진노했다. 순간 눈앞이 핑 도는 느낌이었다.

    ‘이것이 정녕 미래의 제왕이 사용할 언사란 말인가!’

    너그러움이라고는 눈곱만치도 찾아볼 수 없는 냉정한 평가에 황제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는 뜻을 이루자마자 경거망동하는 천한 서자를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었다.

    “태자를 불러와라!”

    잠시 뒤, 구염락이 정덕전(正德殿)에 나타났다. 그는 평소와 다름없이 차분한 표정이었다.

    “소자, 폐하를 뵈옵…….”

    쾅, 소리와 함께 한 무더기의 상소가 구염락의 앞에 쏟아졌다. 구염락은 미동도 없이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그는 틀린 글자가 있었는지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황제는 머리끝까지 화가 났다. 구염락은 대주국 역사상 가장 짧은 기간 태자였던 인물로 기록될 듯했다.

    “모두 물러가라.”

    진 공공이 즉시 사람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나갔다. 그가 태자를 향해 우호적인 경고의 눈빛을 보냈다. 이를 본 구염락이 무표정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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